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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과 유대계 그리스도인들도 구성돼 있는데,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우상의 음식을 먹을 수 있다고 했지만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은 그걸 죄로 여겼죠. 그 문제를 바울에게 질문했는데, 바울은 어느 쪽 논리가 맞다고 이야기하지 않고 그들의 출발점이 잘못 됐음을 지적했죠. 자신들의 지식으로 삼는 것을 말이죠. 바울은 그 문제의 해결점은 지식이 아닌 사랑임을 일깨워주었습니다. 자신에게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자유가 있지만 상대의 믿음을 위해, 상대가 실족치 않도록 하기 위해 자기 자유를 자발적으로 제한하겠다고 말입니다. 그것이 사랑이죠.
오늘 본문도 그 연장선상에서 바울이 말을 하고 있습니다. 본문 1-3절입니다. “내가 자유인이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지라도 너희에게는 사도이니 나의 사도 됨을 주 안에서 인친 것이 너희라 나를 비판하는 자들에게 변명할 것이 이것이니.” 바울이 이른바 자기 변론을 하는 상황입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바울의 사도권을 비판한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바울은 ‘자유인이다’ 곧 ‘로마 시민권자다’하는 것이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구원받은 ‘영적인 자유자다’하는 것이죠. 그래서 ‘내가 사도다’하고 강조합니다. 왜죠? 가롯 유다가 자결하고 사도를 보선하는데 맛디아가 뽑혔죠. 그때 기준점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와 늘 함께 다니던 자’였죠. 그런 관점에서 볼 때 바울은 사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란 ‘보냄을 받은 자’란 뜻으로 바울을 보낸 자는 바로 주님이시죠. 그래서 바울은 사도라는 것입니다. 더욱이 바울을 주님을 본 자죠. 사도행전 9장에서 바울은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봤죠. 또 사도행전 18장 9절에서 주님은 환상 중에 바울에게 나타나주셨죠.
2절에 “나의 사도 됨을 주 안에서 인친 것은 너희라”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의 역사가 아니고서는 이 타락한 고린도 도시에 주님의 이름으로 교회가 세워질 수 없다는 뜻입니다. 너희들이 그 증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3절에서 “나를 비판하는 자들에게 변명할 것이 이것이니” 비판하다는 ‘아나크리노’나 변명한다는 ‘아폴로기아’는 둘 다 법정용어입니다. 죄인을 향해 검사가 죄인을 다루듯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것, 그게 아나크리노입니다. 거기에 변호사가 피의자를 끝까지 변호하는 것 그것이 ‘아폴로기아’입니다. 지금 바울이 그렇게 변호한다는 것입니다. 왜죠? 사랑을 강조하는 바울과 다른 느낌인데 말입니다. 바울은 이렇게까지 자기 사도권을 변호하는 이유가 있겠죠. 두 가지 관점에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자기 자신이 사도임을 부정하는 사람들의 모함을 내 버려 둘 경우, 결국 사도로서 자신이 전한 복음이 훼손될 수 있기 때문이죠. 그러면 복음의 순수성과 완전성이 훼손되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가 전하는 복음이 훼손되면 복음 위에 세워진 교회가 훼손될 수 있기 때문이죠.
4절 “우리가 먹고 마실 권리가 없겠느냐.” 주안에서 영적인 자유자로 뭐든 먹고 마신다는 그런 이야기가 아니죠. 복음 전하는 자로 교회로부터 경제적 부양을 받을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5절에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믿음의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가 없겠느냐.” 사도 바울이 이 편지를 에베소에 고린도에 써 보낼 때가 A,D.56년입니다. 그때 다른 사도들은 아내를 데리고 함께 선교여행을 다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교통편도 좋지 않고 여러 상황이 여의치 않아 아내들이 밥도 해주고 도움도 줬겠죠. 그런데 ‘다른 사도들’ 곧 여러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 곧 예수님의 형제로서 사도의 반열에 오른 야고보와 유다도 있었고, 그리고 게바 곧 베드로를 말합니다. 다만 게바는 따로 말합니다. 왜죠? 고린도교회에 베드로파 아볼로파 바울파가 서로 싸우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죠. 그런데 그런 사도들이 부부동반 하면서 다니는데, 자신도 그럴 권한이 없겠느냐는 것이죠. 이미 바울이 결혼했음을 지난 번에 말씀 드렸죠. 그래서 6절에 “어찌 나와 바나바만 일하지 아니할 권리가 없겠느냐” 바울이 텐트를 만들어 팔면서 복음을 전했는데, 어찌 나도 교회에서 돈을 받고 복음을 전할 권리가 없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하면서 바나바를 언급하고 있죠. 1차 선교 여행 때 같이 갔다가 요한 마가 때문에 다투고 2차 때 갈라섰고, 3차 때 이 편지를 쓰면서 다시금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 부분에 관해 이미 화해했다는 뜻이죠.
7절입니다. “누가 자기 비용으로 군 복무를 하겠느냐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열매를 먹지 않겠느냐 누가 양 떼를 기르고 그 양 떼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 군인으로 복무하고 또 농부의 일이나 목자의 일을 할 때 그 비용을 받는 것 당연한 일 아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8절에 “내가 사람의 예대로 이것을 말하느냐 율법도 이것을 말하지 아니하느냐.” 그런 부분을 이야기하는 것은 인간 사회에 국한된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에 근거한다는 것입니다. 과연 어떤 율법의 말씀일까요? 9-10절에 “모세의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 오로지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심이 아니냐 과연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밭 가는 자는 소망을 가지고 갈며 곡식 떠는 자는 함께 얻을 소망을 가지고 떠는 것이라.” 신명기 25장 4절 말씀입니다. 일하는 소나 나귀에 망을 씌우지 않는 것처럼, 사도가 하나님의 일을 할 때 먹고 마시도록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11절에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의 육적인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 그렇기에 우리가 너희에게 진리의 복음을 전했다면, 우리의 생계를 돌보도록 하는 것이 과한 일이냐, 하는 것이죠. 하나님 앞에서 당연한 권리이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12절에 “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리를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리를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다.” 복음을 전하는 다른 사도들이 경제적인 부양을 받고 있다면 우리도 똑같지 않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왜 바울이 그런 말을 하는 것이겠습니까? 사도 바울이 밤낮없이 애쓰면서 고린도교회를 세웠기 때문이죠. 그런 차원에서 볼 때 자기 권리가 크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12절 하반절에 바울은 누구보다도 더 권리가 크지만 참는다는 것입니다. ‘참는다’는 헬라어는 ‘덮어 버린다’는 뜻입니다. 나도 쓰고 싶지만,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런 장애가 없게 하려고 덮는다는 것입니다.
13절 “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제단에서 섬기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성전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레위인이죠. 제단에서 섬기는 사람들은 제사장들이죠. 그 사람들이 성전에서 먹는다는 것은, 레위기의 제사법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리고 14절에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 주님께서도 복음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은 복음으로 인해 생계가 부양되도록 하라고 명령하셨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0장 10절과 누가복음 10장 7절 말씀이 그것이죠. 복음을 위해서 애쓰는 자는 마땅히 부양받을 권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바울이 왜 자신의 권리를 계속 강조하는 걸까요? 15절 “그러나 내가 이것을 하나도 쓰지 아니하였고 또 이 말을 쓰는 것은 내게 이같이 하여 달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차라리 죽을지언정 누구든지 내 자랑하는 것을 헛된 데로 돌리지 못하게 하리라.” 이제껏 한 말들을 반전시키는 것입니다. 나에게도 그 많은 권리가 주어졌지만 한 번도 쓰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부터 그 권리를 달라는 게 아닙니다. 내가 이렇게 살아 온 것은, 정말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나의 자랑이 헛되지 않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렇게 산 이유가 18절의 ‘상급’ 차원인데, 그건 다음 시간에 살펴보죠.
중요한 것은 바울이 왜 이런 이야기들을 하는 것입니까? 지금 8장과 9장의 권면은 우상의 음식과 관련하여 자기 자유를 타인을 위해 제한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요, 공동체를 세우는 길임을 밝힌 것입니다. 그것처럼 바울도 사도로서 모든 권한이 있지만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해 사도의 권리를 제한하며 살아왔다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교회공동체가 건강하게 회복되고 존속될 수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죠. 종종 오래된 교회나 선교회 혹은 기독단체들이 문제가 생기는데, 그것은 오래 몸담고 있는 이들이 자기 권리를 주장하기 때문이죠. 중요한 것은 주님이 주신 권리를 공동체를 위해 나누는 것이 소중하다는 것을, 본문을 통해 깨닫게 해 준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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