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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묵상DewSermon/고린도전서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서 났느니라(고전11:4-16)

by 똑똑이채널 2024. 12.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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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1장 2절에서 14장 마지막까지는 공적예배에 대한 바울의 목회적 답변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여자들은 사회의 공적인 모임을 나갈 때도 머리에 흰 수건을 쓰고 다녔고, 공적인 예배 때도 당연히 예배포를 쓰고 다녔다고 했습니다. 간혹 그걸 쓰지 않는 여성들은 창녀였거나 동성애자들이었죠. 그런데 교회안에서 대부분 여성들은 그걸 쓰고 나오는데, 몇 몇 여성들이 자신이 받은 은사를 내세워 그걸 쓰지 않는다면 질서의 하나님을 우습게 여기는 꼴이지 않겠냐고 했죠. 또 반대로 남성들은 대부분 쓰지 않았는데 몇 몇 남성들이 썼던 것은 게이들이 썼는데 그런 모습으로 교회에 나온다면, 그 또한 우습게 여기지 않겠느냐는 것이었죠. 그만큼 여성이 예배포를 쓰고 있었던 것, 남성이 그걸 쓰지 않았던 것은 가부장 사회의 모습이 아니라 남자와 여자를 지으신 하나님의 질서를 따르는 길임을 강조하는 바울이었습니다.

 

본문 4절입니다. “무릇 남자로서 머리에 무엇을 쓰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요.” 만약에 남자가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 할 때 머리에 예배포를 쓴다면 그것은 자기 머리 자체, 곧 자기 존재 자체를 욕되게 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더 나아가 그것은 자기 위에 있는 권세 곧 그리스도를 욕되게 하는 것이란 뜻입니다.

그걸 5절에서 비슷한 이야기를 합니다. “무릇 여자로서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니 이는 머리를 민 것과 다름이 없음이라.” 여기에서 ‘머리’란 말이 세 번 나왔습니다. ‘머리’는 여자의 머리로서 머리에 쓴 예배포를 벗고 기도하고 예언하는 걸 말하는 것이죠. 여자가 성령의 은사를 받았는데,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자신은 자유하고 평등한데, 왜 여자만 머리에 예배포를 써야 하냐면서, 머리에서 수건을 벗는다면 어떻게 되겠냐는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그 머리와 그 머리되게 하신 남편을 부정한 것과 같다는 뜻입니다. 실은 머리를 민 것과 무슨 차이가 있겠느냐는 것이죠. 그것이 머리를 미는 행위 곧 삭발하는 것과 같다는 뜻이죠. 2천 년 전 여자가 삭발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죄를 지으면, 특히 간음죄를 지으면 여자의 머리를 삭발했습니다. 남자도 마찬가지지만, 여자가 간음한다는 것은 그 순간 자기 남편을 부정하는 일이죠. 자기 마음속으로 자기 남편을 죽이는 행위입니다. 그러니까 여자가 머리에 무엇을 쓰지 않고 벗겠다는 것은 곧 자기 남편을 무시하는 행위요, 그것은 삭발하는 것과 같다는 뜻입니다. 그렇기에 여자가 머리를 삭발하는 것은 간음죄를 지은 것처럼 하나님 앞에 용인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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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6절에 “만일 여자가 머리를 가리지 않거든 깎을 것이요 만일 깎거나 미는 것이 여자에게 부끄러움이 되거든 가릴지니라.” ‘여자가 쓰지 않거든 삭발하라.’ 그 말은 아주 모독적인 말입니다. ‘만일 깎거나 미는 것이 여자에게 부끄러움이 되거든 가려라’, 이 말은 여자가 안 쓰겠다고 하면 가위로 삭발하라는 말이 아니라, 예배포를 반드시 쓰고 다니라는 권면입니다.

왜냐하면 7절에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니 그 머리를 마땅히 가리지 않거니와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니라.” 남자는 머리를 가리지 않는 것, 여자는 머리를 가리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지키는 길이라는 것이죠. 뜻입니다.

그래서 8절에 “남자가 여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으며” 최초 하나님께서 남자는 흙으로 빚으셨고, 당신의 생기를 불어넣어 생명을 잇게 하셨습니다. 여자는 남자의 갈비뼈로 만드셨죠. 그와 같은 창조 질서를 존중하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9절에서 “또 남자가 여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지 아니하고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은 것이니.” 창세기 2장 18절을 인용한 것이죠.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않으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나님께서는 남자를 먼저 지으시고, 남자를 돕는 배필로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그 질서를 지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10절에 “그러므로 여자는 천사들로 말미암아 권세 아래에 있는 표를 그 머리 위에 둘지니라.” 여기에서 천사들로 말미암아, 하는 표현은 예배의 현장에 하나님의 영이 임재하시고, 하나님을 보좌하는 천사들도 임재한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께서 영으로 임재하신다면 당연히 그 아래의 표 곧 여자들이 머리에 예배포를 쓰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니겠냐는 뜻입니다. 다만 헬라말이 능동태로 돼 있습니다. 여자들은 스스로 머리에 예배포를 취하는 선택을 하라는 뜻입니다. 강압이 아닌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질서를 존중하고 받아들이라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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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바울이 예배 포 선택에 대해 말하면서, 여기까지만 하고 끝냈다면 어땠을까요? 이 부분이 지난 2천년 동안 남자들에 의해 악용되었겠죠. 남성우월주의자들에 의해 계속 여성을 폄하하는 것으로 말입니다. 바울은 그런 오해의 소지를 없애기 위해 여기에서 ‘그러나’로 시작을 하고 있습니다.

11절에 “그러나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 주님 안에서는 남자나 여자가 절대로 독립적인 존재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서로 상호 보완적이고 연합적인 존재로서 서로의 가치를 지닌다는 뜻입니다. 만약 남자가 홀로 인생을 완성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면 여자를 지어주지 않았겠죠. 그만큼 남자나 여자는 서로 보완하면서 완성케 하신 존재라는 것이죠. 여자가 남편을 도와 남편 인생이 완성된다면 여자의 인생도 마찬가지죠.

12절, “이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 같이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음이라 그리고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서 났느니라.” 아담 이후 모든 남자치고 어머니에게 안 태어난 사람이 없습니다. 여자 없이는 남자의 생명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그만큼 남자도 여자도 상호 보완적이라는 뜻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에게서 낫다는 점입니다. 내가 왜 권씨, 김씨, 내가 왜 미국 사람이 아닌 한국 사람으로 태어났는가? 그 모든 게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13절에 “너희는 스스로 판단하라 여자가 머리를 가리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마땅하냐” 너희들 스스로 생각해 보라는 것이죠.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생각한다면 그 질서를 따르는 게 좋지 않겠냐는 것입니다. 남성우월주의가 아닌 하나님의 말씀 토대로 그 질서를 생각하라는 것이죠.

14절, “만일 남자에게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부끄러움이 되는 것을 본성이 너희에게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남자가 여자처럼 긴 머리를 갖는 것은 본성 자체가 수치스러운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오늘날은 헤어스타일이 강해 여자처럼 머리를 긴 남자들이 있죠. 하지만 인류 문명이 시작된 이래 남자들은 짧게 하고 있고, 여자들은 길게 하죠. 그것이 실은 하나님께서 주신 본성이라는 것입니다. 더욱이 2천년 전 헬라의 잡신을 믿는 사람들 조차도 남자는 머리를 짧게 하는 것이 신의 뜻에 부합한 길이고, 여자는 머리를 기르는 것이 신의 뜻에 부합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15절에 “만일 여자가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영광이 되나니 긴 머리는 가리는 것을 대신하여 주셨기 때문이니라” 여자가 긴 머리를 갖는 게 어떻게 자기에게 영광이 되는 것입니까? 그것 자체가 스스로 여성임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그 긴 머리를 예배포로 가려주기 때문에 그것이 영광스러운 것이고, 그를 위해 공적인 예배 모임 때 예배포를 쓰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16절에 “논쟁하려는 생각을 가진 자가 있을지라도 우리에게나 하나님의 모든 교회에는 이런 관례가 없느니라.” 논쟁을 위한 논쟁으로 말꼬리를 잡는 자가 있을지라도, 하나님을 믿는 우리와 교회에는 남자가 남자이기를 부정하거나, 여자가 여자이기를 부정하는, 그런 창조 질서를 부인하는 일은 있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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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이와 같은 예배포의 문제에 대해 바울의 목회적 답변을 들었는데, 몇 가지 귀한 교훈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세상의 관점이나 다수의 관점이 아닌 하나님의 관점으로 철저히 판단하며 살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만큼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철저히 하나님의 질서를 존중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죠. 나를 남자로, 또는 여자로 태어나게 하신 것, 집안에서 첫째나 둘째로 태어나게 하신 것도 하나님의 질서 속에서 승복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죠. 그리고 우리 각자가 하나님의 질서를 존중한다는 것은 나의 나됨을, 상대의 상대됨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의 남성성을 존중하고, 여성의 여성성을 존중하는 것 말입니다. 그래서 남자의 남상성은 너그러움이고, 여성의 여성성은 부드러움이죠. 그것을 집이나 세상이나 교회에서도 늘 덕으로 갖추고 사는 것, 그것이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요, 질서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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