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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3차 전도여행 끝 무렵 고린도에 머물면서 로마서를 기록했다고 했습니다. 그때가 A.D.56년 경의 일이라고 했죠. 그런데 이 서신에 보면 로마를 방문하여 로마에 있는 성도들과 교제를 나누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곳곳에 묻어나 있습니다.
본문 22-24절을 새번역성경으로 읽어보면 바울의 간절함이 더 묻어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내가 여러분에게로 가려고 하였으나, 여러 번 길이 막혔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 지역에서, 내가 일해야 할 곳이 더 없습니다. 여러 해 전부터 여러분에게로 가기를 바라고 있었으므로, 내가 스페인으로 갈 때에, 지나가는 길에 여러분을 만나 보고, 잠시 동안만이라도 여러분과 먼저 기쁨을 나누려고 합니다. 그 다음에 여러분의 후원을 얻어, 그 곳으로 가게 되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기독교 신앙의 기본 교리를 체계적으로 설명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을 것입니다. 또 ‘서바나’라고 표현된 스페인 지역 전도를 계획하며 로마 교회의 협력이 필요함을 알리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를 가려고 했던 것이죠. 그와 동시에 로마에 있는 성도들과의 교제가 바울과 그들 모두에게 큰 기쁨과 격려가 될 것이라는 기대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로마에 잠시라도 들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던 것이죠.
더욱이 본문 23절의 말씀처럼 “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고”라는 표현을 볼 때, 이전에 로마를 방문할 기회가 여러 번 막혔던 것과는 달리, 이제는 로마를 방문할 수 있는 여건이 갖추어져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로마를 거쳐 스페인으로 가고 싶어 하는 바울의 계획에 앞서서 보다 중요한 일이 생긴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렇게도 방문하고 싶어 했던 로마를 향해 가는 길 위에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그와는 반대인 예루살렘으로 가야만 해결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본문 25-26절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 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연보하였음이라.” 바울은 로마에 있는 성도들 방문하기를 간절히 원했고, 또 새로운 전도를 위해 스페인 지역으로 가기 원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앞서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기쁜 마음으로 연보한 구제금을 전달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야만 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그 일을 ‘성도를 섬기는 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은 간절히 가고 싶은 곳과 멀어지는 정 반대 방향의 길이었지만, 그런데도 반드시 그 길을 향해 가야만 할만큼 바울에게는 중요한 일이었던 것이죠. 왜 그렇습니까? 그 당시 예루살렘에 있는 성도들의 상당수는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26절에 “가난한 자들”로 번역된 ‘투스 프토쿠스’라는 단어는 고전 헬라어 문헌에서 ‘거지처럼 가난하여 전적으로 동정에 의존하여 살아갈 수밖에 없는 자들’을 가리키는 뜻입니다. 그런 의미만 보더라도 그 당시 예루살렘에 사는 성도들의 삶이 얼마나 힘겨웠을지 짐작할 수 있는 것이죠.
그런데 왜 그들이 가난해졌습니까? 이에 대한 정확한 이유를 본문은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사도행전 11장 28절을 통해 유추해 볼 때 큰 흉년이 원인일 수 있고, 또 그 당시 상황을 고려해 볼 때 ‘핍박이’ 원인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어찌 됐든 예루살렘에 사는 성도들 가운데 남의 도움을 받지 않고는 생계유지가 어려운 사람들이 많이 있었던 것이죠. 그런 그들을 위해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구제금을 모아 바울에게 전달해 줬던 것입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8장에 보면, 구제금을 마련한 아가야 지역의 사람들 곧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은 결코 부유한 자들이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고린도후서 8장 1-5절 말씀을 새번역성경으로 읽겠습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께서 마케도니아 여러 교회에 베풀어주신 은혜를 여러분에게 알리려고 합니다. 그들은 큰 환난의 시련을 겪으면서도 기쁨이 넘치고, 극심한 가난에 쪼들리면서도 넉넉한 마음으로 남에게 베풀었습니다. 내가 증언합니다. 그들은 힘이 닿는 대로 구제하였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힘에 지나도록 자원해서 하였습니다. 그들은 성도들을 구제하는 특권에 동참하게 해 달라고, 우리에게 간절히 청하였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기대한 이상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먼저 자신들을 주님께 바치고, 우리에게 바쳤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마게도냐 사람들은 큰 시련과 극한 가난에 처해있던 자들이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루살렘의 성도들에 대한 어려운 소식을 듣자 그들을 구제하는 일에 동참케 해 달라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간청을 했다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 27절에서도 “그들이 기뻐서 하였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이런 사실을 편지에 담아 보내면서 덧붙였던 것이죠. 27절에 “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영적인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적인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 복음을 통해 영적인 은혜를 누리게 하심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라는 것이죠. 하지만 하나님은 예루살렘 교회를 통해 복음을 나누게 하셨으니, 누군가 어렵고 힘든 처지에 있다면 기꺼이 도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것을 당연한 일이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이죠. 그것이 곧 이방인 그리스도인과 유대계 그리스도이라는 신분을 초월하여 하나라는 일체감을 이룰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곧 그리스도 안에서 예루살렘 교회나 로마교회나 마게도냐교회나 고린도교회나 우주적인 교회로 하나라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 누구 됐든지 간에 구원의 은혜에 대한 채무 의식을 갖고 사는 게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그런 채무의식을 지니고 있으면, 사람들에게 봉사하고 내 것을 나누면서도 결코 교만해지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 30절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권하노니.” 여기에서 ‘권하노니’ 하는 헬라어 ‘파라칼레오’는 ‘위로하다' ‘청하다’ ‘권면하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서로 위로하고 권면하는 관계라는 것입니다. 로마서 12장에서 그리스도인이 받는 7가지 은사 곧 7가지 역할에 대해 공부할 때, 그 하나인 ‘위로’였습니다. 바꿔 말해 바울은 15장의 마지막을 권면하는 위로로 끝을 맺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무슨 위로로 권면합니까? 무엇보다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위로하고 있죠. 그만큼 그리스도인은 자기 자랑거리로 위로할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위로해야 한다는 것이죠. 그리고 주님의 위로와 더불어 또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곧 “성령의 사랑”입니다. 성령의 사랑이란 자기중심적인 사랑이 아니라 성령을 중심으로 하는 사랑을 말하는 것이죠. 성령님이 기뻐하실 사랑 말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랑으로 무엇을 위로하고 권면하도록 합니까? 본문 30절 하반절에 “너희 기도에 나와 힘을 같이하여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빌어.” 무엇보다도 함께 기도하도록 요청하고 있습니다. 서로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성령의 위로와 권면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을 위해 기도하도록 요청합니까? 31절 상반절에 “나로 유대에서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로부터 건짐을 받게 하고.” 유대에서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을 핍박하는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을 말하는 것이죠. 그들이 구원받도록 기도해 달라는 것입니다. 또 있죠. 31절 하반절 “또 예루살렘에 대하여 내가 섬기는 일을 성도들이 받을 만하게 하고.” 이른바 자신이 가지고 가는 구제헌금을 예루살렘 성도들이 기쁨으로 받을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 물질의 나눔이 화근이 되지 않고 온전한 열매가 되도록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 더 32절에 “나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쁨으로 너희에게 나아가 너희와 함께 편히 쉬게 하라.” ‘편히 쉬게 하라’는 것은 육체의 안일이 아닙니다. 헬라어 ‘쉬나나파우오마이’는 ‘힘을 주다’, ‘원기를 회복시키다’는 뜻이죠. 바울이 로마교회 성도들을 만날 때 서로에게 힘과 격려를 주도록 기도해 달라는 뜻입니다.
그러면서 33절로 끝을 맺고 있죠. “평강의 하나님께서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계실지어다.” 성숙한 기도의 삶을 살아갈 때 그의 삶에 평강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만큼 숱한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그리스도인으로 남기 위해 힘써 기도할 때, 가지고 있는 물질이 사람들에게 은혜의 도구가 되도록 기도할 때, 서로가 서로에게 힘을 주는 사귐이 되도록 기도할 때, 그런 그리스도인의 삶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강이 차고 넘친다는 뜻입니다. 그만큼 기도만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 새벽도 그렇게 기도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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