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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묵상DewSermon/요한복음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요21:15-25)

by 똑똑이채널 2024. 7.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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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을 먼저 찾아오셨습니다. 부활하신 그날 저녁에, 또 8일이 지나서, 그리고 갈릴리 바다에 그물질을 하고 있던 제자들에게 세 번째 나타나주셨습니다. 그때 그들은 주님께서 막달라 마리아에게 제자들을 향해 갈릴리로 가라고 당부한 그 사실을 주목했어야만 했죠. 하지만 그들은 주님을 향해 20일도 기다리지 못한 채 옛날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고기잡이로 나섰습니다. 하지만 밤새도록 그물질을 했지만 허탕이었죠. 주님의 방식이 아닌, 주님의 말씀을 우선순위로 두지 않는 세상의 방식을 취한 그들의 모습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주님께서 그물을 배오른편에 던지라고, 다시 말해 말씀에 의한 방식을 취하고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우선순위의 방식을 취하라고 했을 때, 그들이 순종하여 그물을 던졌을 때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엄청난 고기를 잡아 올렸죠.

그런데 그것 뿐이었습니까? 주님께서 그들에게 그물질하는 방법을 알려주기 위해 그들에게 찾아오셨겠습니까? 아니죠. 그들을 갈릴리로 부르신 그 사명을 바르게 세워주기 위함이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당신을 배반했던 제자들을 위해 진수성찬에 가까운 조반을 차려놓고 그 제자들을 식탁으로 초대하셨습니다. 그때 함께 아침식사를 드시고 난 후 주님께서 베드로를 향해 세 차례 물으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15)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16)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17)

주님께서 물으신 그 ‘사랑’은 모두 아가페의 사랑을 물으신 것이었습니다. 이성 간의 사랑이나 친구간의 우정 정도의 사랑이 아닌 하나님의 신적인 사랑 말입니다. 그것은 숭고하고 헌신적인 사랑이자 완전한 이타적인 사랑이었습니다.

그런 아가페 사랑에 대해 물어봤을 때, 베드로가 어떻게 대답합니까?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15)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16)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17) 베드로는 인간적인 사랑, 조건적인 사랑, 친구간의 우정에 가까운 사랑을 해 왔노라고 대답했습니다. 베드로는 이미 주님을 배반한 경험이 있지 않습니까? 대제사장의 뜰에서 사람들이 ‘너도 그 당이라’고 말했을 때 극구 부인하며 심지어 저주하고 맹세까지 했던 베드로였죠. 그때 주님과 베드로의 눈빛이 교차했고, 닭이 울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밖에 나가 통곡했음을 우리는 살펴봤습니다. 다들 주님을 버릴지라도 자신만큼은 끝까지 따르겠다 했던 베드로였지만 그렇게 부인했던 베드로였기에, 주님께서 지금 물어보실 때 어찌 자신있게 대답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신적인 사랑으로 주님께서 물으실 때 베드로는 그저 인간적인 우정 정도로 사랑해왔다고 대답한 것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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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시간표 | 권성권 | 유페이퍼- 교보ebook

이 책은 지난 몇 년간 설교 말씀을 통해 나눈 예화다. 예화는 설교에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다. 말씀의 이론을 실제화할 수 있는 간증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예화는 설교에서 중요한 몫을 차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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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같은 베드로의 대답이 주님이 듣기에 어찌 보면 연약하기 짝이 없고 한 없이 부족한 대답 아니었겠습니까? 하지만 그런 베드로였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내 어린 양을 먹이라”(15) “내 양을 치라”(16) “내 양을 먹이라”(17) 여기에서 15절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그 어린 양을 먹이는데에는 더 많은 관심과 사랑이 필요한 법이겠죠. 양을 먹이고 치는 일은 양떼를 목초지로 인도해야 할 뿐만 아니라고 양들의 모든 활동을 돌보는 관심과 사랑이 필수적이기 때문에 말입니다. 그리고 16절의 양은 중급 정도의 양을 말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17절은 성숙한 양, 늙은 양을 가리키는 것이죠. 그래서 어린 양이든 성장한 양이든 주님께서는 양떼를 베드로에게 맡기셨습니다. 실수하고 실패하고 낙망하고 절망한 경험이 있는 베드로에게, 세 차례 사랑을 확인하시고 그에게 주님의 양 떼를 맡긴 것이죠.

왜 그토록 연약한 베드로에게 주님께서 당신의 양들을 맡긴 것이겠습니까? 한 없이 부족하고 연약한 베드로를 주님께서 믿어주고 격려해주고 사랑해 주신 그 사랑에 힘입어 네게 붙여준 양들을 그렇게 사랑하라고 먹이고 돌보라는 주님의 당부였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주님은 베드로의 인생이 어떻게 끝마치게 될지 18절에 말씀해 주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것은 야곱의 브니엘 체험과 비슷한 장면이지 않습니까? 야곱이 이제껏 자기 힘과 자기 방식대로 삶을 살아왔지만, 얍복강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옵는 성령체험을 통해, 그의 허벅지 관절을 치신 그 사건 말입니다. 왜죠? 이제까지는 너의 방식, 너의 힘과 가진 것을 의지하며 살아왔지만, 이제부터는 내가 너를 이끄는 대로 따라왔으면 하는 것 말이죠. 그렇게 꺾어주신 성령체험 후에 야곱은 그야말로 온유한 심령으로 변화되었고, 형에서를 만날때도 하나님의 얼굴을 뵈옵는 것처럼, 또 형에게 일곱 번 절할 때도 하나님을 경배하듯 하는 자세를 갖췄다는 점입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온유한 삶으로 변화된 모습이었습니다. 그로 인해 땅도 사람도 얻게 되었죠.

본문의 베드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전까지만 해도 스스로 띠 띠며 살아왔던 그였죠. 그도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처럼 영의정 좌의정 하는 세상의 욕심을 좇아 살아왔던 베드로였죠. 그렇지만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에게 다시 찾아왔을 때, 그때 이후부터는 ‘남이 네게 띠 띠고 원치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라“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것이 성령께서 이끄시는 삶입니다.

외경인 베드로행전을 보면, 베드로가 훗날 로마의 네로 황제의 박해를 피해 로마를 벗어나려고 했는데, 그때 주님을 만난 것으로 기록이 돼 있습니다. 베드로는 주님께 물었죠. “도미네, 쿼바디오스”, 이른바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하고 말이죠. 그때 주님께서는 “네가 십자가를 지지 않으려 하니 내가 다시 십자가를 지려고 로마로 간다.”하고 대답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들은 베드로는 다시금 로마로 돌아가 사역을 하다가 체포되어, 십자가에서 거꾸로 매달려 처형당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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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먹은 하나님 응답하소서 | 권성권 | e퍼플- 교보ebook

"성경으로 문화 읽기를 접목한 세 번째 책이다. 첫 책은 출애굽기로부터 시작해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까지의 내용이 담겨 있다. 두 번째 책은 여호수아로부터 시작해 사사기, 룻기, 사무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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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부활하신 주님으로부터 자신의 사명을 확인한 베드로가 어떻게 합니까? 그 곁에 있던 다른 제자, 곧 주님의 사랑하는 제자, 구체적으로 사도 요한을 보고서 그가 어찌될지를 물었죠. 그때 주님께서는 본문 22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베드로야, 너는 요한이 어떻게 될지 신경 쓰지 말고, 내가 네게 부여한 사명을 충실히 감당하는 삶에 최선을 다하면 되지 않겠느냐? 하는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23절에서는 “이 말씀이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제자는 죽지 아니하겠다 하였으나” 이른바 베드로가 다른 제자들에게 가서 거짓 풍문을 퍼트리고 다녔던 것입니다. 요한은 죽지 않는데, 하고 말이죠. 베드로가 주님의 말씀을 오해해서 그런 거짓 풍문을 퍼트린 것이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요한복음의 끝부분에 이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왜죠? 사도행전으로 이어지는 시대를 맞이하기 때문입니다. 곧 교회가 도래하면 교회 안에 괜한 거짓말과 뜬소문이 팽배할 수 있다는 것을 미리 알고 있도록 말입니다. 교회 안에서 자기 자신을 바르게 보기보다 타인을 더 생각하면, 그렇게 거짓말과 뜬소문이 횡행할 수 있으니, 늘 사람을 의식하지 말고 자신에게 부여한 주님의 사명을 다하는데 최선을 다하라는 뜻입니다.

그렇기에 오늘 요한복음을 마감하는 이 시점에 가장 깊이 다가오는 것은 25절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 사도 요한이 기록한 이 기록된 책은 예수님이 하나님 되심을 드러내기에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예수님께서도 이 땅에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사역을 감당하였듯이, 우리도 이 땅에 주님께서 부여하신 각자의 사명에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매일매일 주님의 은혜를 공급받아 사는 인생이 돼야 한다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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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흔들릴수록 우직해야 | 권성권 - 교보문고

세상이 흔들릴수록 우직해야 | 우공이산(愚公移山)이란 말이 있다. 어리석은 노인이 산을 옮긴다는 뜻이다.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우직하게 나아가다 보면 결국엔 뜻을 이룰 수 있다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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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시는 주님. 요한복음을 끝으로 살펴봤습니다. 주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 이땅에 사신 것을 책으로 엮기에 한 없이 부족할 뿐이라고 했습니다. 저희들도 주님을 좇아 이 땅에 부여하신 주님의 사명을 이루는데 우리 생이 한없이 짧다고 고백할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한 고백이겠습니까? 오늘도 연약하지만 저희에게 주어진 삶을 통해 주님의 사명을 이루는 은혜를 부어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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