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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의 다락방에서 제자강화의 시간을 가진 주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뒤에 체포당하셨습니다. 그것이 한 밤 중의 일이었고, 그때부터 대제사장 안나스에게 그리고 또 가야바에게 그리고 로마의 총독 빌라도에게 차례로 끌려가 심문을 받으셨습니다. 그때 그 성난 군중들 아니 진리와 생명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난동을 부렸죠. 결국 빌라도 총독도 자신의 정치적인 생명과 그들의 요구를 거래하는 차원에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데 내주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빌라도의 권한도 또 그 군중들의 힘도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일이었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구약성경의 말씀을 그대로 성취하기 위한 주님의 자발적인 십자가 길이었습니다.
그것은 오늘 28절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그 마지막 순간까지 주님은 말씀을 응하게 하시는 분이심을 밝혀줍니다. 28절에 “그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 이르시되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그것은 시편 69편 21절의 말씀 “그들이 쓸개를 나의 음식물로 주며 목마를 때에는 초를 마시게 하였사오니”하는 말씀을 이루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신 포도주는 식초와 같습니다. 목이 마를 때 물이나 포도주가 아닌 식초를 마시면 더 고통스럽기에 차라리 마시지 않는 게 낫죠. 그러나 성경말씀을 응답해 드리기 위해, 하나님의 뜻을 성취해드리기 위해 그렇게 받으시고 죽으신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께서 하나님의 뜻, 곧 구약성경의 말씀을 성취하신 일은 또 나옵니다. 본문 36-37절 말씀처럼 “이 일이 일어난 것은 그 뼈가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 또 다른 성경에 그들이 그 찌른 자를 보리라 하였느니라”하는 상황이 그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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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예수님은 끝까지 하나님의 섭리, 곧 구약의 말씀을 응답해 드린 삶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주님의 죽음과 관련하여 두 장면이 전개됩니다. 하나는 십자가에서 주님의 시신을 내리는 장면이고, 또 다른 한 장면은 주님의 시신을 무덤에 안치하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두 장면 속에 등장하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대조적이라는 사실입니다.
본문 3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 날은 준비일이라 유대인들은 그 안식일이 큰 날이므로 그 안식일에 시체들을 십자가에 두지 아니하려 하여 빌라도에게 그들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 하니”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고개가 떨구어진 것을 알고, 빌라도 곧 빌라도의 명령을 수행하는 군인들에게 예수님의 시체를 한시라도 빨리 치워달라고 요구하고 나선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사형이 집행되었던 그날은 안식일 전날이었고 해가 지면 곧 안식일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사형수들의 다리를 꺾어서라도 시체를 치워달라고 한 것입니다. 그 유월절 기간의 안식일은 그들에게 특별히 ‘큰 날’이었고, 그 날 그들은 구원의 의미를 깊이 묵상하는 날이 아니라 마음껏 즐기며 기뻐하는 축제의 날이었던 것입니다. 사형수의 시체 따위로 그들은 자신들의 축제를 방해받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시체를 한시라도 빨리 치워달라고 요구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빌라도의 명령을 받은 군인들은 사형수인 예수님의 다리를 꺾기 시작했죠. 물론 주님을 제외한 다른 두 사람 곧 왼편 강도와 오른편 강도의 다리는 꺾었죠. 그러나 그 구인들은 주님께서 이미 죽으신 걸 알고 주님의 다리뼈를 꺾는 대신 긴 창으로 옆구리를 찔러 주님의 죽음을 재확인했습니다.
미국 국립 심장폐혈액연구소의 전문의 알렉산더 메드럴(Alexander Metherell)에 따르면 의학적으로 주님은 이미 태형으로 많은 피를 흘린 후 ‘저혈량성 쇼크(hypovolemic shock)’ 상태에 있었다고 합니다. 저혈량성 쇼크에 이르게 되면 심장이 더 이상 피를 뿜어내지 않게 되고, 혈압이 떨어지며 의식도 가물거리게 된다고 합니다. 또한 흘린 피를 보충하기 위해 심한 갈증을 느끼게 된다고 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주님은 너무나 소진된 나머지 숨을 쉬기 위해 다리조차 밀어 올릴 수 없는 상태에서 ‘호흡산독증’에 빠지게 되었고, 결국 심장박동이 멎으면서 죽음을 맞이한 것이었습니다. 그때 심장 주위와 폐 주위에 액체가 고이게 되는데 이것을 각각 ‘심낭삼출’, ‘늑막삼출’이라고 한다고 합니다. 로마 군인들이 주님의 옆구리를 찌를 때 뿜어져 나온 물과 피는 바로 이와 같은 의학적 사실을 뒷받침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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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주님의 십자가 죽으심을 똑똑히 목격했던 사도 요한은 주님께서 얼마나 고통스럽게 죽어가셨는지를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자리에 있던 유대인들에게 주님의 죽으심이 단지 자신들이 즐길 축제를 더럽히는 걸림돌로 여겼다는 것입니다. 그 얼마나 무지몽매한 모습입니까?
그런 유대인들의 모습과는 대조적인 두 사람이 나옵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니고데모가 그들이죠. 요셉은 예수님의 제자였지만 유대인들이 두려워 그것을 숨겨왔던 사람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어떻게 합니까? 본문 38절에 “이 일 후에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니라” 누가복음에 따르면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39절에 나오는 니고데모와 마찬가지로 산헤드린공회의 의원이었습니다. 그는 산헤드린 공회가 주님의 사형집행을 결의할 때 반대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은 요셉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한 나머지 한 때 주님의 제자임을 숨겼지만, 이제는 다르다는 것을 밝힙니다. 주님의 죽으심을 목격한 이후에는 용감하게 주님의 장례를 준비하고 나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장례에 동참한 또 한 사람이 나옵니다. 니고데모가 바로 그 사람이죠. 그는 요한복음 3장에 보면 밤 중에 주님을 찾아온 사람이었습니다. ‘밤’이라는 시간적 배경은 그의 영적 상태를 상징하는 말씀이죠. 그런데 사도 요한은 본문의 39절에서도 그 사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일찍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온지라”
사도 요한은 니고데모가 밤에 찾아왔던 사실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때 주님은 니고데모가 산헤드린공회의 의원이었고, 이스라엘의 선생이었지만, 구원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는 니고데모를 책망하셨던 것이죠. 사도 요한은 그 내용을 떠올리면서 ‘일찍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때는 그랬던 니고메도를 오늘 본문의 19장에서는 다르게 평가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요한복음 3장에서는 니고데모가 ‘밤’에 주님을 찾아올 정도로 그의 영적 상태가 회색지대에 있었다면, 지금은 그 일을 ‘과거’로 돌려놓고 있습니다. 구원의 의미조차 알지 못한 과거의 니고데모가 아니라 주님의 죽으심과 장례를 진정으로 준비한 주님의 참 제자로 말입니다. 그렇기에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니고데모는 어떤 면에서 보면 주님께서 잡히실 때 뿔뿔히 흩어졌던 제자들의 모습과는 또 다른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명목상의 제자가 참 제제가 아니라 주님의 죽으심에 깊이 동참하는 제자가 참 제자라는 걸, 사도 요한이 일깨워주고 있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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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에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에게 일깨워주시는 성령님의 은혜가 무엇입니까? 우리의 거룩함은 유대인들처럼 종교적인 의식을 잘 지킴으로써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의식 너머에 살아계신 주님과 깊은 교제에서 비롯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죽으심과 함께 내가 죽고 주님의 살아나심과 함께 사는 것 말입니다. 더욱이 제자라는 명분, 교회의 직분이라는 명분보다도 주님의 죽으심과 연합하여 살고자 하는 요셉과 니고데모처럼 사는 것이 참된 주님의 제자라는 사실입니다. 오늘도 그런 은혜가 넘치는 하루가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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