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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이 3차 전도여행 때 에베소에 들렀습니다. 그곳 에베소는 당시 소아시아에서 가장 큰 항구도시였습니다. 수도는 버가모였지만 실질적인 도시는 에베소였습니다. 마치 미국의 수도가 워싱턴이라면 가장 큰 도시인 뉴옥과 같은 곳이 에베소였습니다. 그곳은 지금까지도 그 당시 인구 10분의 1 곧 25,000명이 한꺼번에 들어갈 수 있는 극장도 보존돼 있고, 풍요의 여신인 아데미신전도 있습니다. 아데미 신전은 고대세계의 7대불가사리 중 하나입니다.
바울이 그토록 크고 찬란한 그 도시 에베소에 들어가 주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성령이 임하고, 갖가지 기적과 표적들을 행했습니다. 이를테면 바울이 지닌 앞치마나 손수건 같은 것으로 귀신들린 자들의 병이 떠나가는 표적이 나타났던 것이죠. 그 중에는 여태껏 마술을 행하던 마술사도 그 마술을 행하기 위해 사 모은 책값만 해도 은전 오만이나 되었는데, 그 모든 책들을 다 불살라 버린 일도 일어났습니다. 주님의 복음이 그렇게 바울을 통해 역사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런 역사와 함께 소동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데메드리오라는 은장색, 곧 구리새공업자 하나가 여태껏 그 공업을 통해 많은 돈을 거둬들였는데, 바울이 나타나서 그 업이 끊길 지경이었으니, 그가 에베소 사람들 곧 풍요의 신 아데미를 숭배하는 그 사람들을 선동하기 시작했던 것이죠. 바울이란 자가 나타나서 우리가 손으로 만든 것들은 신이 아니라고 한다면서 말입니다. 그러면서 다들 그 연극장으로 몰려가서 무엇을 행했는가? 사도행전 19장 34절은 이렇게 증언을 해 줍니다.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하기를 두 시간이나 하더니”
이 모습을 지금 우리가 바라본다면 축구 경기를 관람하던 그 군중들이 일제히 대한민국 짝짝짝 하면서 두 시간 동이나 열광하는 모습에 비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때 이들은 축구경기나 혹은 로마의 전차경기와 같은 그런 관중들의 모습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저 자신들이 믿는 신전 그 아데미를 향해 무려 2시간이나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하는 목소리를 내면서 열광하는 모습입니다. 우리가 보기에 얼마나 웃긴 모습입니까? 아무런 목적도 없이 그저 자신들이 믿는 신을 떠받드는 형국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런 군중들의 모습이 어제 읽은 로마 총독 빌라도의 관정 앞에서 난동을 부리던 그 군중들의 모습과 똑같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 처 놓은 덫에 걸려 맹목적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려는 성난 군중들의 모습이었기 때문입니다. 마치 구리새공업자 데메드리오의 주가가 내려갈 것을 생각하여 바울을 처단코자 그렇게 아데미를 열광케 한 것처럼, 자신들의 주가가 내려갈 것을 생각한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 그렇게 군중들을 선동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소리치고 군중심리를 부추기는 것과 똑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빌라도 총독도 그렇게 성난 군중들, 그 군중심리에 열광하고 있는 그들의 요구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하라고 내어주고 말았습니다. 물론 그것은 그 군중들의 뜻에 달려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빌라도의 주권에 달린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 이면에 보이지 않는 손길, 곧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일이었습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 인류를 위한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질 수 있는 때였기 때문에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읽은 말씀으로 이어지는데, 오늘 말씀은 ‘십자가’를 기준으로 그 위치에 따라 세 가지 관점으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십자가위의 예수님, 십자가 아래의 사람들, 그리고 십자가 곁의 예수님의 동료들 말입니다. 본문 17절입니다. “그들이 예수를 맡으매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히브리 말로 골고다)이라 하는 곳에 나가시니.” 여기에서 “그들”은 누구이겠습니까? 로마 군병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예수를 ‘맡으매’라고 기록이 돼 있습니다. 로마 군사 4명이 드디어 예수님을 맡아 사형집행장인 골고다 언덕으로 예수님에게 십자가를 짊어지워 가게 한 것입니다. 보통 세로로 된 십자가는 기둥 역할을 하기에 골고다 언덕에 세워져 있었고, 가로로 된 십자가 틀만 짊어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갔을 것으로 추정을 하죠.
그처럼 예수님은 4명의 군사들의 손에 넘겨졌지만, 그 역시 그들이 빌라도 총독에게 넘겨 받은 것 같지만 실은 하나님 아버지께 넘겨받은 것임을, 그 모든 섭리가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온 일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을 기록하면서 예수님을 넘겨받은 그 일을 수동태가 아닌 ‘능동태’로 기록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최초 겟세마네 동산에서 체포당하실 때도 마찬가지였죠. 그때의 상황을 전해주는 요한복음 18장 4절에서 “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나아가”겼다고 증언해 줍니다. 체포하러 온 그 무리들도 다 알고 계셨고, 그리고 피하지 않고 당당하게 나아가셨다는 것이죠.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섭리 속에 나온 일임을 알고 계셨기에, 기꺼이 십자가 현장으로 나아가시는 주님의 모습이라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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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십자가 아래의 사람들은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본문 23-24절에 보면, 4명이 한 조가 되어 사형집행을 하던 군인들은 지금까지 해오던 관례대로 사형수의 옷을 나눠 가집니다. “군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군인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 뽑자 하니.” 그 군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면서, 이내 예수님의 겉옷과 요대와 샌들 같은 것들을 제비뽑아 나눠 갖는 모습입니다. 주님은 지금 십자가에 피흘리며 죽어가는 그런 상황인데, 그들은 그 아래서 옷을 가지고 조롱하는 그런 모습이라는 사실입니다. 온 인류를 위한 주님의 대속의 죽음이 그들에게는 조롱거리가 돼 버린 상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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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제 십자가 곁의 주님의 동료들이 있습니다. 본문 25절을 보면 주님의 그 십자가 밑에는 25절에 4명의 여인이 있었습니다. 또 26절에는 사랑하는 제자도 한 명 있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마지막 죽음의 숨을 들이마시고 있는 그 십자가 밑에 그렇게 끝까지 함께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 중에 한 사람 곧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는 바로 요한복음을 기록한 사도 요한이었습니다. 그에게 예수님께서 당신의 어머니 마리아를 부탁하는 것이죠. 그래서 그때부터 그가 자기 집에 마리아를 모셨다고 증언해주고 있습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요한복음 서두에서 말씀을 드렸었죠. 요한은 그 후에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모시고 예루살렘에 살았는데, 교회의 핍박으로 멀리 에베소까지 갔고, 그 무렵 에베소교회의 담임목회자였던 디모데가 순교당하자, 그 뒤를 이어 사도 요한이 목회자가 되었다고 말이죠. 그때부터 마리아가 돌아가실 때까지 봉양했던 요한이었죠. 그런 과정 속에서 요한복음과 요한1,2,3서를 기록했는데,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죠. 도미티아누스 치세 때에 사도 요한은 밧모섬으로 18개월간 유배를 살다가 성령의 환상 가운데 그림언어로 된 요한계시록을 기록했다고 했습니다. 그 모두가 주님께서 부여하신 십자가를 기쁨으로 짊어졌을 때 부어주신 은총의 선물이었습니다.
이상과 같은 말씀을 통해 2천년 전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 있던 그들 가운데 나는 과연 어떤 자로 살아야 할지, 성령님께서 깨닫게 하시는 은혜를 베풀어주지 않습니까? 십자가 위의 예수님처럼 오늘도 내게 주신 십자가를 기쁨으로 짊어지고 가는 은혜를 부어주시도록, 그리고 처절하게 피를 흘리는데 그 밑에서 조롱하고 희롱하며 예수님의 옷을 제비뽑아 취하려는 그런 자들과는 달리 오히려 예수님과 끝까지 함께 했던 그 여인들과 사도요한처럼, 오늘도 내게 주어진 십자가가 어떤 것이든지, 비록 그 일이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위해 밥을 해 드리고 빨래와 설거지를 하는 일일지라도, 기쁨으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나갈 수 있는 은혜를 부어달라고 기도하면서 하루를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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