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겟세마네 기도를 마친 주님께서 가롯 유다가 끌고 온 대제사장의 하속들과 로마 군사들에게 끌려가셨습니다. 과연 주님께서 어디로 끌려가셨습니까?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아니라, 그의 장인 안나스였습니다. 안나스가 대제사장으로 있다가 후임 대제사장을 그의 사위에게 넘겨줬습니다. 명목상의 대세장은 가야바였지만, 실질적인 실권은 장인 안나스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그때 그 대사장의 집 뜰에 베드로와 다른 제자도 들어갔습니다. 익명으로 처리된 다른 제자가 평소 대제사장과 안면이 있었기에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던 까닭입니다. 그 다른 제자 덕에 베드로도 손쉽게 그 집으로 들어갈 수 있었죠.
그때 대제사장 안나스가 예수님의 교훈과 그 제자들의 교훈에 대해 물었을 때, 예수님은 들은 자들에게 물어보라고 냉소적으로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그 말을 듣고 있던 대세장의 아랫 사람 하나가 어디서 함부로 무례하게 대답하느냐면서 예수님의 뺨을 쳤죠. 그는 진리와 생명이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한 채, 그저 종교적인 명분만 중요하시던 아랫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가 대제사장을 받드는 일이 하나님의 일로 여겼지만 그야말로 무지몽매한 일이었던 것이죠. 그런데 아무런 소득을 얻지 못한 안나스는 예수님을 결박한 그대로 대제사장 가야바 곧 사위 가야바에게 보냈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그 가야바의 집 뜰에 들어가 불을 쬐고 있었습니다. 다들 너도 그 제자라고 알아보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베드로는 세 번씩이나 부인했고 그때 주님과 베드로의 눈빛이 마주쳤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주님께서 “네가 닭 울기 전에 세 번 나를 부인할 것이다.”하신 그 말씀이 생각나 밖에 나가 통곡했죠.
그렇게 예수님 주변의 사람들이 보여준 모습이 실은 우리 자신의 삶의 모습일 수 있다는 것을 늘 감지하며 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나도 때로 베드로가 될 수 있고, 나도 익명의 제자처럼 한 다리씩 세상에 걸치고 살 수 있고, 나도 대제사장 안나스와 그 하속처럼 무지몽매하게 내 욕심을 좇아 하나님을 섬길 수도 있고, 그리고 그 숯불에 불을 쬐고 있는 군중들처럼 군중심리에 휩쌓여 살아갈 수 있다는 것 말입니다. 그렇기에 주님께서 베드로의 눈빛을 바라봐주신 것처럼, 주님께서 당신의 눈빛을 내게 비춰주셔서 주님을 바라볼 수 있도록, 그 분을 향한 시선을 견지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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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읽은 28절 본문은 “그들이”로 주어가 시작합니다. “그들이 예수를 가야바에게서 관정으로 끌고 가니 새벽이라 그들은 더럽힘을 받지 아니하고 유월절 잔치를 먹고자 하여 관정에 들어가지 아니하더라.” 여기에서 ‘그들이’란 대체 누구를 가리키는 것입니까? ‘그들’은 바로 무고한 예수님에게 사형 죄를 덧씌우며 십자가 처형으로 몰고 가려는 주동자들, 그 군중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뭐가 그리 다급하고 촉박했는지, 그들은 이제 겨우 동트는 새벽시간에 가야바에게서 로마 총독인 빌라도 관정으로 끌고 가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어떻게 합니까? 예수님을 로마 총독인 빌라도 공관으로 끌고는 가지만, 거기에는 들어가지 않습니다. 왜죠? “유월절”에 이방인 땅을 밟으면 더럽혀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웃기는 일입니까? 진리와 생명이신 주님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자 난동을 피우면서도, 자신들의 몸이 더렵혀진다면서 로마 총독의 관정으로는 들어가지 않는 그 이중적인 행태 말입니다. 그때 빌라도가 그 군중들을 향해 뭐라고 말합니까? 29절 하반절에 “너희가 무슨 일로 이 사람을 고발하느냐?” 왜 이 사람을 끌고 왔으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그들이 뭐라고 대답합니까? 30절에 보면 예수님을 향해 “행악자”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우리말 ‘행악자’로 번역된 헬라어 ‘카코포이오스’(κακοποιός)는 악을 향하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그때 빌라도는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하고 말합니다. 이른바 너희 종교적인 악행이라면 너희 종교법대로 처분하라는 뜻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뭐라고 말합니까? 본문 31절에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한이 없다”고 응수하죠.
그러자 빌라도가 예수님을 관정으로 불러 심문을 하게 되죠. 뭐라고 심문합니까? 네가 정말로 유대인의 왕이냐, 하고 묻죠. 그때 예수님은 36절을 통해 그렇게 대답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주님은 이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라고, 확실하게 말씀합니다. 그때 빌라도는 그렇다면 네가 왕이 아니냐, 하고 묻죠.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번에는 37절을 통해 “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 하신대.” 곧 주님은 왕이시라고 밝힙니다. 이 세상에 속한 왕이 아니라 저 영원한 세계의 왕이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왔다고, 곧 진리에 대해 증언하여 모든 이들을 구원코자 하는 진리와 생명의 왕이라고 말입니다.
그때 빌라도가 어떻게 합니까? “진리가 무엇이냐”하고 묻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에 대해 진정으로 진리를 좇고자 하는 물음이 아니었죠. 그저 떠보기 위한 물음이었죠. 그때 예수님께서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는지, 그는 곧장 유대 군중들, 그 성난 군중들을 향해 나갑니다. 본문 39절이죠. “유월절이면 내가 너희에게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으니 그러면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하니.” 이른바 거래를 하는 상황입니다. 그 성난 군중들을 달래기 위해서 말입니다. 예수님을 심문해 봤지만, 빌라도가 듣기에 진리에 관해 횡설수설하는 것처럼 느꼈기 때문에 풀어주고자 거래를 하려 했던 빌라도였습니다.
하지만 그 성난 군중들, 군중심리에 치우친 그들이 어떻게 합니까? 40절에 “그들이 또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이 아니라 바라바라 하니 바라바는 강도였더라.” 그들은 강도 바라바를 풀어주라고 소리를 지르는 상황입니다. 여기에서 ‘강도’로 번역된 ‘레스테스’는 ‘산적’이라는 의미의 단어입니다. 로마인들이 열심당원들을 향해 관습적으로 일컫는 용어죠. 그만큼 바라바는 열심당원이라는 뜻입니다. 마가복음 15장 7절에서는 ‘민란을 꾸미고 그 민란 중에 살인하고 체포된 자 중’의 한 사람으로 바라바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마태복음에서는 ‘유명한(소문난) 죄수‘(27:16)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바라바는 유대인들이 대부분 알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른바 유대인들의 독립을 위해 민란을 주도했던 사람이었고, 유대 민중들에게 지지를 받던 걸출한 ’독립운동가‘였던 셈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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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 바라바의 이름의 뜻이 재미있습니다. ‘바’는 ‘아들’이란 뜻이고, ‘아바’는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주요 복음서 사본에는 바라바의 이름을 ‘예수 바라바’로 기록하고 있다는 점이죠. 그리스도 예수와 그 이름이 동일한 것입니다. 그러니깐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인간 아버지의 아들 예수 바라바’인 셈입니다.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는 이름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그 군중들이 사면코자 한 사람은 인간 아버지의 아들 예수 바라바였습니다. 그만큼 그 군중들 역시 진리와 생명을 내다보지 못한 채 그저 이 세상의 독립만을 바라보는 어리석은 모습임을 일깨워주는 것이죠. 그때 누가복음 23장 23절에서는 그들이 더욱 소리높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기를 구했는데, 결국 “그들의 소리가 이긴지라”하고 증언해줍니다. 바꿔 말하면 빌라도가 그들의 눈치를 보면서 십자가 사형 언도를 내려버렸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진리의 목소리가 사람의 목소리에 묻혀버린 꼴이었습니다. 왜요? 빌라도 역시 진리와 생명의 관점, 보이지 않는 영적인 관점이 아닌 이 세상의 탐욕과 권력의 눈에 먼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어찌보면 다른 모습이지만 그 군중심리에 이끌린 자들과 하나도 다를 바 없는 빌라도였습니다.
오늘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내가 그 현장에 있었다면 나도 똑같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렇기에 오늘도 주님의 은총 속에서 이 세상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를 볼 수 있는 은혜를 부어달라고, 기도하면서 하루를 출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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