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SMALL
요한복음 13장에서 16장까지의 흐름들을 우리는 이제 잘 알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제자들에게 친히 발을 닦아 주셨고, 그들과 함께 당신의 살과 피를 나누어주시는 성만찬을 행하셨습니다. 그리고 가롯 유다가 그 밤에 악한 영에 사로잡혀 밖을 향해 나갔을 때, 주님께서는 그때부터 제자강화의 시간을 가지셨죠. 내가 이제 떠나간다는 것, 그래서 너희들을 위해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는 것, 그렇기에 너희들은 이 땅에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서로 사랑하며 살라는 것을 당부하셨죠. 그래서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가 내 안에 있는 것처럼 너희도 내 안에 거하도록, 그래야 서로 사랑하는 새 계명의 삶을 이룰 수 있다고 하셨죠. 바로 그것을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로 말씀해 주셨죠. 포도나무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어야만 수액을 공급받고 영양분을 공급받고 참된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것 말입니다. 그때에만 주님을 좇아 사랑하며 살 수 있다고 말입니다. 다만 너희가 내 제자처럼 서로 사랑하며 살면 세상은 너희를 미워하고 박해를 할 것이라고 했죠. 하지만 그것은 너희를 미워하기 이전에 나를 미워하는 것이고, 곧 하나님 아버지를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라고 했죠. 그러나 그런 상황 가운데서도 너희가 세상의 미움과 박해를 이겨 낼 수 있는 길이 있다고 했죠. 바로 보혜사 성령님께서 너희들을 보호하고, 은혜를 베푸시고, 스승처럼 진리와 생명의 길로 인도할 것이라고 했죠. 그 성령 안에서 서로 사랑하는 삶의 열매를 맺도록 당부하셨습니다.
https://ebook-product.kyobobook.co.kr/dig/epd/ebook/E000002960924
그리고 이제 어제 읽은 요한복음 17장에 이르러 주님께서 그곳 마가의 다락방에서 그와 같은 제자강론의 시간을 마치고 기도를 하셨습니다. 먼저는 당신 자신을 위한 기도를 드리셨고, 이어서 제자들을 위한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셨죠. 당신 자신을 위해 기도할 때 무슨 내용으로 기도하셨습니까? 어제 살펴 본 것처럼 마지막 십자가에 죽는 그때까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을 살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래야 이 땅에 많은 사람들이 영생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그 영생이란 곧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아는 것에 있다고 했죠.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은 지식적으로 정보를 습득하는 앎이 아니라 인격적인 관계를 통해 아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야 했는지, 그 분이 공생애 사역을 통해 왜 연약하고 가난하고 병들고 고통 속에 있는 자들, 심지어 세리와 창녀들을 품으신 삶을 살았는지, 그리고 왜 그 분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셔야 했는지, 왜 3일 만에 부활하시고, 40일간 제자들과 함께 사시다가, 하늘로 승천하셔야 했는지, 그리고 머잖아 이 땅에 다시 심판의 주님으로 재림하시는지, 그 모든 주님의 행적들을 아는 것, 인격적인 체험과 관계성을 통해 아는 것, 그것이 곧 영생을 얻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죽어서 영혼이 천국에 가는 것은 뭔가 끊어지는 게 아니라, 육신만 끊어지는 것이요, 그 영적인 삶을 이 땅에서처럼 이어나가는 것이기 때문이죠.
그리고 이어서 주님은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무슨 기도를 드리셨습니까? 제자들이 이 땅에 이제 남아야 하기 때문에 그들에게 남다른 능력을 부어달라고 하거나, 특별한 권능을 주시라고 하는 기도를 드린 게 아니었죠. 오히려 이 땅에서 살고 죽는 것보다 더 큰 의미를 부여하는 기도를 드려셨죠. 그 기도가 무엇이었습니까? 제자들이 주님과 친밀감을 이어나갔듯이 이 땅에 남은 제자들이 하나님과 친밀감을 유지하며 하나님 나라의 사명을 다할 수 있도록 위해서 기도하셨죠. 그래야 제자들이 악에 빠지지 않고 진리의 삶을 주님의 은혜 속에서 꿋꿋하게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https://ebook-product.kyobobook.co.kr/dig/epd/ebook/E000007610049
그리고 오늘 읽은 말씀은 예수님 당신을 위한 기도와 제자들을 위한 기도에 이어, 마지막으로 ‘주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기도내용입니다. 본문 20-21절입니다.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여기에서 또 다시 하나님께 비옵는다고, 기도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곧 주님의 제자들만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기도는 “그들이 전하는 말로 인해 주님을 믿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과연 주님을 믿는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이른바 예수님께서 하늘로 승천하신 이후에 성령님께서 강림하셨죠. 그 이후에 제자들이 성령에 이끌려 담대하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중에는 순교 당한 야고보도 있었고, 또 감옥에 갇혔다가 풀려난 베드로도 있었죠. 그 밖에 사도 바울 같은 사람들도 있었는데, 바로 그들이 전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주님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들을 내다보며, 지금 주님께서 하나님 아버지께 간구하는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주님을 믿고 의지하며 사는 우리들을 위한 간구의 기도이기도 합니다.
무슨 내용으로 기도를 드립니까? 주님을 믿게 될 모든 이들이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가 내 안에 있듯이”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해 달라는 것, 곧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것을 믿게 하라는 거죠
궁극적으로 이 기도가 지향하는 바, 목적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사도들이 전한 복음의 터 위에서 주님을 믿고 주님의 교회를 세울 모든 구원받은 자녀들이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 주님 안에서 ‘하나’가 되는 데 있다는 점입니다. ‘하나’가 되는 게 얼마나 중요했는지, 본문 22절에서도, 23절에서도, 계속 간구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하나가 되는 것을 예수님이 강조하고 또 강조했음을 사도 요한이 기록하고 있는 것이겠습니까? 주님의 교회를 이루면서도 실은 하나가 되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 많기 때문이죠. 이 땅의 가톨릭과 개신교의 분열의 역사가 그렇고, 개신교의 많은 교파가 그렇죠.
그것은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그 이후도 마찬가지였죠. 초대 예루살렘 교회만 보더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면 다 됐다는 측과, 예수님을 통해 구원받았어도 유대인들의 할례와 같은 의식법을 지켜야 한다는 측이 싸웠던 경우가 있었죠. 어디 그 뿐입니까? 초기 고린도교회만 보더라도 바울파 아볼로파와 베드로파로 나뉘게 된 일이 있었습니다. 심지어 바울이 선교여행을 떠날 때에도 그 젊은 요한 마가의 신학적인 충돌로 인해 요한 마가가 집으로 돌아와 버린 경우도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그런 점들을 예수님께서 먼 미래까지, 아닐 오늘날의 현실에까지 내다보면서, ‘서로 사랑하라’고, ‘서로 하나가 되라’고 당부하고 또 당부하셨다는 사실입니다.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200899457
그런데 그 일이 쉬운 일이 아니죠. 다른 사람을 존중하고 있는 그의 신학적인 소양을 존중하여 하나가 된다는 것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26절에 이렇게 결론적인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그들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 이른바 주님 안에 있을 때에만, 주님이 그 안에 있을 때에만 서로 사랑하며 하나가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주님이 내 안에 있다는 것, 내가 주님 안에 있다는 게 무엇입니까? 나는 예수로 죽고 예수로 산 생명이라는 것이죠. 예수님의 생명 없이는 영생을 살 수 없다는 것을 늘 자각하며 사는 것이죠. 그렇게 살 때 주님 안에서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죽는 삶이 없으면 자꾸 내 의와 자랑이 올라오기가 쉽고 하나가 되기가 그처럼 어렵기 때문이죠.
오늘도 내가 주님 안에 죽고 주님이 내 안에 사셔서, 내가 주님 안에 주님이 내 안에 거하는 삶, 내가 주님과 하나가 되고, 나와 함께 교회를 이루는 이들과도 하나가 될 수 있는 주님의 은혜를 부어달라고 기도하며 하루를 살 수 있기 바랍니다.
728x90
반응형
LIST
'새벽묵상DewSermon > 요한복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몬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요18:15-27) (0) | 2024.07.02 |
---|---|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나아가(요18:1-14) (0) | 2024.07.02 |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요17:1-19) (0) | 2024.07.02 |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16-33) (0) | 2024.06.26 |
보혜사가(요16:1-24) (1) | 2024.06.26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