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SMALL
오늘 읽은 요한복음 17장은 예수님의 고별설교 가운데 마지막 기도의 장면입니다. 요한복음 13장에서부터 오늘 본문에 이르기까지 예수님께서는 마가의 다락방에서 제자들을 위한 강화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제 내가 이 세상을 떠나가 아버지께로 갈 것이고, 너희들도 머잖아 나 있는 곳으로 인도할 처소를 예비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기에 이 땅에 살면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들도 서로 사랑하며 살라고 했습니다.
너희가 내 제자답게 살 때에 세상에 속한 자들 곧 공중권세 잡은 마귀의 영에 속한 사람이 너희를 미워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고, 심지어 너희를 박해하며 죽이려 드는 자들도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도 사랑의 삶을 살도록 당부했죠.
물론 주님의 제자답게 사랑하는 삶을 살기란 쉽지 않다고 했습니다. 제자들의 의지만으로, 제자들의 결단만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 말입니다. 왜죠? 인간의 의지나 결단은 늘 허물어지기 쉽고 유혹을 받기 쉽기 때문이죠.
그래서 포도나무이신 주님의 가지로 붙어 있어야 한다는 것,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거해야 한다는 것을 수차례 강조하셨죠. 포도나무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수액도. 영양분도 공급받을 수 없기 때문에 말입니다. 포도나무 가지는 포도나무에 붙어 있을 때에만 원하는 열매도 맺을 수 있기 때문이죠.
물론 그 연약한 제자들을 아신 주님께서는 보혜사 성령을 아버지께 보내달라고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보혜사 성령님이 오시면 제자들에게 유익이 될 것이라고 했죠. 왜냐하면 이 땅에 예수님께서는 육신의 몸을 입고 입기에 제한적이지만 성령님은 무소부재하신 분이기에 어느 상황에 처하든지 하나님의 자녀들과 함께 할 수 있기 때문이죠. 그와 같은 보혜사 성령님이 오시면 제자들을, 당신의 자녀들을, 친히 진리와 생명의 길로 인도할 것이고, 고아처럼 그들을 버려두지 않고 끝까지 함께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보혜사 성령님이 제자들과 함께 하면, 당신의 자녀들인 우리와 함께 하면, 어떤 유혹과 핍박 속에서도 새 힘을 주시고 은총으로 감싸주기 때문입니다.
https://ebook-product.kyobobook.co.kr/dig/epd/ebook/E000007610049
이상과 같은 말씀이 요한복음 13장에서부터 어제 읽은 16장까지 계속된 말씀이셨습니다. 그것이 곧 마가의 다락방에서 제자강화의 시간을 가지면서 말씀하신 내용들이었습니다.
오늘 읽은 말씀은 이제 18장에 넘어가기 전의 말씀입니다. 18장에 넘어가면 겟세마네 동산에서 체포당하시고, 다음날 새벽과 아침까지 이곳 저곳에 끌려 다니며 심문을 받으시고, 급기야 오전 9시에 골고다 언덕 위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오후 3시에 죽으시는 장면으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은 제자강화에 이어, 마지막으로 예수님 당신을 위한 기도와 제자들을 위한 간절한 기도를 하나님 아버지께 드리는 장면이 기록돼 있습니다.
예수님 당신을 위한 기도가 1-5절에 나와 있습니다. 과연 무슨 기도를 드렸습니까? 1절에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말미암아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하는 기도였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을 통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그것이 곧 2절에서 기도하는 것처럼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는” 길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그 영생이란 3절에서 기도하는 것처럼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고백하죠. 여기에서 ‘안다는 것’은 지식이나 정보차원에서 아는 걸 말하는 게 아닙니다. 성경을 읽고 성경의 정보나 배경에 대해 아는 것을 뛰어넘는 것이죠. 이른바 깊은 사귐이 있는 인격적인 앎을 말하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는지, 왜 이 땅에서 공생애 사역을 하셨는지,왜 이 땅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셔야 했는지, 그리고 그 분이 다시 부활하셔야 했는지, 부활승천하신 이후에 왜 다시 오신다고 했는지, 그 모든 과정들을 하나씩 하나씩 알되, 인격적인 사귐, 곧 체험을 통해 아는 것을 말하는 것이죠.
부부가 결혼을 했지만 서로 알지 못하면 실은 남남보다 못하는 관계 아닙니까? 서로가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원하는지, 알 때에만 배려하고 맞춰가며 살 수 있는 것이죠. 우리 주님을 믿고 의탁하며 산다는 것도 그와 똑같다는 것이죠. 그것이 실은 주님 안에 거하는 것이요, 그것이 주님께서 내 안에 거하는 것이요, 그것이 곧 영생이라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예수 믿고 죽는 즉시 가는 저 영원한 천국을 의미하지만, 이 땅에서 그 분의 말씀을 따라 사는 사귐의 삶 자체가 곧 영생과 맞닿아 있는 것이죠.
https://ebook-product.kyobobook.co.kr/dig/epd/ebook/E000005116349
주님께서 바로 그런 기도를 하나님 아버지께 드렸던 것입니다. 자신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것, 그리고 그 길을 통해 모두가 구원받을 수 있는 영생을 얻는 것 말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6-19절까지는 제자들을 위한 기도를 드리는 장면입니다. 그 핵심 내용이 무엇입니까? 본문 13-15절에 있습니다.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그들로 내 기쁨을 그들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으로 인함이니이다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무슨 기도입니까? 우리 주님은 남겨질 제자들의 입장에서 기도한 게 아니었습니다. 남겨질 제자들을 위해서라면 다가올 환난과 박해를 이겨내도록 힘과 능력을 구해야 했을 것입니다. 위기의 상황에 하늘을 날거나 물 위를 걸을 수 있는 능력, 복음 전파를 위해 죽은 이도 살리며, 병자를 고치고, 인간이 할 수 없는 신적 능력을 달라고 기도해야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의 기도 내용은 다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기도를 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정작 제자들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모르셔서 이런 기도를 하신 게 아닙니다. 앞으로 얼마나 큰 영적인 싸움이 진행될 것인지 인지하지 못한 것도 아닙니다. 주님께서 하나님의 관점에서 기도하신 이유는 이 땅에서 살고 죽는 것보다 더 큰 의미를 부여하기 위함이십니다. 내가 조금이라도 더 살아서 어떤 일을 이루느냐보다 훨씬 더 중요한 문제를 위해 기도하신 것입니다. 내가 어떤 집에서 살고, 어떤 직장에서 어느 위치만큼 올라가며, 이 세상에서 어떤 인정을 받고 사느냐보다 더욱더 가치 있는 사명의 삶을 위해서 기도하신 것입니다.
그만큼 우리 주님은 제자들이 복음의 삶을 살아갈 때, 하나님과 친밀함을 유지하며 살기를 바라신 것입니다. 그래야 제자들이 악에 빠지지 않고 진리의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삶의 목표에 관심이 있거나 성과를 눈여겨보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눈여겨보시는 것은 하나님 나라를 위한 삶의 과정과 의미가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한 영혼에 대한 사명을 대하는 생각과 관심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주님의 대제사장적인 기도라는 사실입니다.
https://ebook-product.kyobobook.co.kr/dig/epd/ebook/E000002960924
그렇기에 오늘 이 새벽에 기도하실 때 이 땅의 관점으로 살지 않게 하시고, 하나님 나라의 관점으로 살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주시옵소서. 이 땅의 업적과 결과보다도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과정과 한 영혼을 귀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관점으로 살도록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말입니다. 그를 위해 오늘도 주님 안에 주님이 내 안에 거할 수 있도록 은혜로 붙잡아 달라고 기도하면서 하루를 살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728x90
반응형
LIST
'새벽묵상DewSermon > 요한복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나아가(요18:1-14) (0) | 2024.07.02 |
---|---|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요17:20-26) (0) | 2024.07.02 |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16-33) (0) | 2024.06.26 |
보혜사가(요16:1-24) (1) | 2024.06.26 |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요15:18-27) (0) | 2024.06.26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