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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7장에서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예수님 당신과 제자들 그리고 앞으로 주님을 믿어 구원받게 될 이 땅의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그 기도를 마친 예수님께서 이제 마가의 다락방을 나서서 예루살렘 동편에 위치한 기드론 시내를 건너 가셨습니다. 그래서 동산으로, 겟세마네 동산으로 올라가기 위함이셨죠. 본문 1절 말씀이 그 장면을 보여주십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건너편으로 나가시니 그 곳에 동산이 있는데 제자들과 함께 들어가시니라”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나아가신 동산은 겟세마네 동산이었습니다. 그곳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가끔 모이는 곳”으로 2절에서 소개하고 있지만, 마태복음 26장 36절과 마가복음14장 32절과 누가복음 21장 40절에서는 “기도하러 그곳에 가신 것”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무슨 기도를 드리고자 그곳에 가셨습니까? 오늘 읽은 요한복음에는 겟세마네의 기도 내용이 나와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마태와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는 십자가 고난의 잔을 놓고 기도하시는 장면이 생생하게 나와 있습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26:39, 막14:36, 눅22:42)
그렇다면 왜 요한복음에만 그렇게 진액을 짜는 기도, 땀방울이 핏방울과 같이 변한 그 기도의 모습과 내용이 나오지 않는 것입니까? 왜 사도 요한은 오늘 본문의 장면을 기록하면서 마태와 마가와 누가가 공히 기록하고 있는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를 의도적으로 빼버렸던 것일까요?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께서 그 십자가 문제를 놓고 그렇게 처절하게 기도하는 것이 너무나도 인간적인 모습, 인간적인 나약한 모습으로 비쳐질 거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여태껏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을 통해 7가지 표적을 기록했고, 또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심을 나타내는 ‘에고 에이미’라는 표현도 7가지나 기록한 것도 그 때문이었습니다. 그만큼 요한복음의 전체적인 맥락은 예수님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요 곧 하나님이심을 강조하는 내용들로 기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때문에 다른 복음서처럼 아담으로부터 태어난 그 혈통에 관한 족보도,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로 태어난 것도, 목수의 일을 하신 그 내용도, 그 밖에 키도 자라고 지혜도 자랐다는 그런 내용도, 전혀 기록하지 않은 것이었죠. 오히려 요한복음 1장에서부터 예수님이 생명의 빛임을 강조하고 있고, 그래서 제자들을 부르셨고, 2장에서부터 곧장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로 사역하신 기적들을 보여주는 내용을 기록했다는 점입니다. 그와 같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역사하신 장면들을 요한복음 12장에 예루살렘에 어린 나귀를 타고 왕으로 입성하시는 그때까지 계속 보여주고 있는 것이죠. 이유는 하나였습니다. 그 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사도 요한이 강조하기 위함이요, 곧 그분이 구원자이심을 만 천하에 알게 하기 위함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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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오늘 2절에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셨는데, 어떤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사도 요한이 기록하고 있는지 눈여겨보시기 바랍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이 너무나도 당당하게 나서시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입니다. 본문 3절에 “유다가 군대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아랫사람들을 데리고 등과 횃불과 무기를 가지고 그리로 오는지라.” 가롯 유다는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늘 그곳에 가끔씩 모인다는 것을 알았기에 미리 군사들을 동원해 준비했던 것이죠. 그래서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의 아랫 사람들과 군인을 동원해서 등불과 횃불과 무기를 가지고 예수님께 오는 상황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십니까? 본문 4절에 “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나아가 이르시되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예수님은 그들이 그렇게 당신을 잡으러 올 줄을, 당신이 ‘당할 일을 다 아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에서도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신적인 능력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죠. 여기에서 ‘당하다’는 단어와 ‘나아가셨다’는 단어가 실은 헬라어 원형은 ‘에르코마이’로 같습니다. 바꿔 말하면 예수님은 당신이 ‘당할’ 일과 또 ‘나아가야 할’ 일을 다 아셨기에 그들에게 맞서 나아가셨다는 뜻입니다. 똑같은 단어를 한 문장에서 두 번씩이나 반복해서 사용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나아갈 길을 아셨기에 스스로 한 걸음 앞으로 나선 것입니다.
그렇듯 예수님은 수동적으로 잡혀 가신 것이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그 위험에 대해 정면으로 마주하기 위해 나가셨다는 뜻입니다. 그만큼 신성을 지닌 그 능력을 가지고 당당하게 맞서 나가셨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4절 하반절에서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하고 물으셨고, 5절에서 “나사렛 예수라”하니까, 예수님이 “내가 그니라”하고 또다시 당당하게 자신을 밝히고 있는 모습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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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그 전에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 전에도 예수님을 체포하려고 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피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수전절에 예루살렘을 방문하셔서 ‘자신이 하나님과 하나’라는 설교를 사람들에게 하셨는데, 그때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신성모독 했다’는 이유로 잡으려 들었죠. 그러나 그때 피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0장 39절에 “그들이 다시 예수를 잡고자 하였으나 그 손에서 벗어나 나가시니라”
그리고 또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면서 많은 표적을 행하셨는데, 그때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 로마로부터 자치권을 빼앗길 걸 우려해서 예수님을 죽이려고 모의해 사람들까지 보내 체포하도록 했죠. 그때 예수님께서 보인 행동에 대해 요한복음 11장 54절에 이렇게 증언해 줍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유대인 가운데 드러나게 다니지 아니하시고 거기를 떠나 빈 들 가까운 곳인 에브라임이라는 동네에 가서 제자들과 함께 거기 머무르시니라” 왜 예수님께서는 그 시절에는 자신을 체포하려고 온 사람들을 피하셨습니까? 인간적으로 두려웠기 때문입니까? 아니죠. 아직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아니었기 때문이죠. 하지만 오늘 본문의 때는 하나님이 정하신 때이기에 기꺼이, 당당하게, 그 모든 상황을 아시면서도 그들에게 맞서 나아가셨던 것이죠. 그것이 곧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요, 그 길이 이 땅에 영생을 주는 길이기 때문에 말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그렇게 당당하게 앞서 나간 예수님은 제자들만큼은 그냥 하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본문 8-9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에게 내가 그니라 하였으니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이 가는 것은 용납하라 하시니 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너희들이 목적하는 것은 나라는 것이죠. 나만 체포해 잡아가면 됐지 굳이 제자들까지 데려갈 필요가 있겠느냐는 것이죠. 왜죠? 그만큼 제자들을 잃지 않으려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보여주신 것이죠. 이것은 마가의 다락방에서 제자강론을 시작하시던 그 말씀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13:1) 하신 그 말씀을 이루시는 모습이죠.
그런데 그때 베드로가 칼을 가지고 말고의 귀를 친 사건이 나오죠. 이때도 예수님은 신적인 권위를 다시 한 번 보여주십니다. “예수께서 베드로더러 이르시되 칼을 칼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예수님은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일이니, 내가 마셔야 할 일이라면서 베드로에게 칼을 집어넣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그 “군대와 천부장과 유대인의 아랫사람들이 예수를 잡아 결박하여” 이제 대제사장에게 끌고 가서 심문을 하는 장면으로 넘어가죠.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죠. 그들이 결박하여 끌고 가는 것 같지만, 예수님께서 결박당하여 끌려가셨다는 것을 말입니다. 왜죠?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 그 때를 맞추기 위함이요, 구약의 예언된 말씀을 성취하기 위함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야 죄로 얼룩진 우리에게도 영생의 은혜가 주어질 수 있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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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에 오늘 우리도 예수님처럼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이 있다면, 그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이라면, 주님께서 원하시는 때에 순종할 수 있는 은혜를 부어달라고 기도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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