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당한 욥에게 세 명의 친구가 찾아왔죠. 7일을 지나서 첫 번째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욥에게 이야기를 했고 욥은 그에 대해 반론을 펼쳤죠. 이제 두 번째 사람인 수아 사람 빌닷이 욥을 향해 자기 논리를 펼쳤고 욥도 그에 대해 반론을 펼쳤습니다.
오늘도 어제에 이어 욥의 변론이 계속되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왜 욥이 이런 변론을 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빌닷이 ‘공의의 하나님’을 이야기한 이유죠. 빌닷은 욥기서 8장 3절을 통해 그렇게 욥에게 항변했습니다. “하나님이 어찌 정의를 굽게 하시겠으며 전능하신 이가 어찌 공의를 굽게 하시겠는가”
빌닷은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에 아무런 이유 없이 의로운 사람에게 고난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만큼 욥이 지은 죄가 있기 때문에 그 벌을 받는다는 논리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죄에서 돌이키도록 고난의 채찍을 드실 때가 있죠. 그러나 빌닷의 말처럼 하나님이 공의의 하나님이시기만 하다면 하나님 앞에 온전히 설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운 분이시기도 하지만 끊임없이 자비를 베푸시고 긍휼히 여겨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죠.
오늘도 우리의 코끝에 호흡을 유지할 수 있는 가장 큰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흠 없이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까? 아니죠. 벌레 같은 죄인인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시는 하나님의 긍휼하심 때문이죠. 바로 그와 같은 사실을 첫 번째 친구요 가장 연장자인 엘리바스도, 두 번째 친구요 토론자로 나선 빌닷도, 깨닫지 못했던 자들이죠.
그만큼 욥의 친구들은 욥이 의로운 사람인가를 논하고 있지만 욥은 자신의 ‘의로움’이나 ‘불의함’이 문제의 본질이 아니라는 걸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욥은 자신이 겪고 있는 고난도 고통스러웠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친구들의 편견과 왜곡된 시선이 더욱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욥은 친구들의 편견에 대해 변론을 펼침과 동시에 하나님 앞에 자신의 고통까지 토로하는 상황입니다.
본문 1∼2절을 통해 욥은 그렇게 고백을 하죠. “내 영혼이 살기에 곤비하니 내 불평을 토로하고 내 마음이 괴로운 대로 말하리라 내가 하나님께 아뢰오리니 나를 정죄하지 마시옵고 무슨 까닭으로 나와 더불어 변론하시는지 내게 알게 하옵소서.”
욥에게 닥쳐온 고난은 욥의 영혼마저 피폐하게 할 정도로 극심한 고통을 가져왔습니다. 이쯤 되면 사람들은 대개 하나님을 저주하거나 하나님을 향해 욕을 퍼붓기 마련이죠. 제아무리 욥이라 해도 고통이 극에 달하면 하나님을 저주하고 돌아설 것이라는 걸 사탄이 노리고 있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욥은 이유를 알 수 없는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신뢰하고 있습니다. 욥은 자신이 고난당하는 것을 하나님이 모르실 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통의 원인을 하나님께 돌리며 하나님을 욕하지도 않죠. 그만큼 욥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욥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고통을 통해 말씀하시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여쭈고자 한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을 향해 지녀야 하는 태도가 바로 이것이죠. 만약 우리의 현실이 고통스럽다고 해서 그 현실 속에 우리를 두신 하나님을 원망한다면 그것은 올바른 믿음이 아닐 것입니다. 욥의 기도는 하나님을 향한 원망에서 출발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하심 곧 신뢰에서 출발하고 있습니다. 물론 오늘 본문에서도 그렇지만 이후에도 욥이 하나님을 향해 던지는 질문들이 때로는 날카로운 날이 서 있는 질문과도 같은 점이 있죠. 하지만 욥은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고통 중에 기도하는 욥의 태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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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2절입니다. “생명과 은혜를 내게 주시고 나를 보살피심으로 내 영을 지키셨나이다.” ‘생명’과 ‘은혜’, 이것이 바로 이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생명’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하이’(חַי)는 창세기 2장 7절의 ‘생기’ 즉 ‘생명의 호흡’에서 ‘생명’의 뜻으로 사용된 단어와 동일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생명’을 인간에게 불어넣으셨고, 흙으로 만들어진 인간은 그때야 비로소 ‘생명’ 곧 ‘살 수 있는 존재’가 되었죠.
그리고 ‘은혜’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헤세드’(חֶסֶד)입니다. 하나님의 ‘자비’, ‘사랑’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으로 창조된 피조 세계는 하나님의 은혜로 유지되고 보존되는 것이죠. 하나님께서는 마르지 않는 은혜로 온 우주를 붙들고 계시고, 그 은혜로 우리를 쉼 없이 품고 계시기에 오늘도 우리는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 3절을 통해 욥이 하나님께 그렇게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주께서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학대하시며 멸시하시고 악인의 꾀에 빛을 비추시기를 선히 여기시나이까.”
이 구절을 의역하면 이런 표현이 됩니다. “하나님, 하나님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학대하고 멸시하십니까? 그렇게 하시고도 기쁘십니까?” 이 말씀은 욥이 하나님을 비난하는 게 아니라 ‘생명과 은혜’가 하나님의 본질적인 속성임을 확신하고 있기에 하나님은 결코 당신의 피조물을 스스로 파괴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걸 자기 고백적인 질문을 통해 확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이 만약 ‘생명과 은혜’의 하나님이 아니라면 차라리 자신에게 생명을 주지 말았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하는 것이죠. 본문 18절이 그런 말씀입니다. “주께서 나를 태에서 나오게 하셨음은 어찌함이니이까 그렇지 아니하셨더라면 내가 기운이 끊어져 아무 눈에도 보이지 아니하였을 것이라.”
그런데 이 말씀에서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할 부분이 있죠. 욥이 자신의 생명을 하찮게 여기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3장에서도 욥은 자신이 태어난 날을 저주하고 있고, 자기 탯줄도 끊겼더라면, 또 현재 살아가는 삶에서 죽어버렸으면 하고 세 가지 사실을 고백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음만 못하다는 것이지 자기 생명 자체를 가볍게 여기고 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것은 본문 20∼21절도 마찬가지죠. “내 날은 적지 아니하니이까 그런즉 그치시고 나를 버려두사 잠시나마 평안하게 하시되 내가 돌아오지 못할 땅 곧 어둡고 죽음의 그늘진 땅으로 가기 전에 그리하옵소서.”
인생에 찾아오는 극심한 고통 속에서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 많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우리나라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10년 가까이 자살률 1위를 고수하고 있죠. 2020년 통계에 따르면 인구 10만 명당 자살률은 36.1명으로 OECD 국가에서 우리나라가 자살율 1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자살하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이 세상에 살 만한 가치가 없다거나, 이 세상에 살아야 할 소망이 없다고 여기기 때문이겠죠?
그러나 욥은 하나님이 지으신 생명의 가치를 가볍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이 세상에 살아야 할 소망이 없다고 생각지도 않았습니다. 욥은 짧은 인생에 불과한 자신이 ‘어둡고 죽음의 그늘진 땅으로 가기 전에’ 고통 속에서 건져달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욥은 비참한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스스로 포기하는 방법을 택하지 않은 것이죠.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생명’의 원천이신 하나님을 신뢰했고, 오늘도 자신의 생명을 붙드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소망을 두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이 처해 있는 고통의 현실보다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의 은혜가 더욱 크다는 사실을 여전히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오늘 본문을 통해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는 음성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의 코끝에 호흡이 있게 하시는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라는 사실이죠. 우리가 맞닥뜨리고 있는 현실이 아무리 무겁고 고통스럽다 해도, 죽음보다 못한 현실이 우리를 짓누르고 있다 해도,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기억하라는 것이죠. 생명을 주시기 위해 고난을 주셨다면, 그 생명을 위해 복된 길도 준비하고 계신 분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죠. 그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하루를 살아가는 날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사랑하시는 주님. 저희의 생명이 창조주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되었음을 알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도 흙으로 아담을 빚으실 때의 그 애틋한 사랑과 긍휼하심으로 저희의 생명을 붙들고 계심을 감사드립니다. 저희에게 생명을 주신 분이 하나님 아버지이시기에 오늘도 저희가 살아야 하는 이유와 소망이 하나님 아버지께 있음을 고백합니다. 저희의 생명을 붙드시는 그 은혜 가운데 오늘도 살게 해 주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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