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었을 때, 그러니까 20대 중반의 나이에, 성경에 있는 각 장에서 가장 중요하다 싶은 구절들을 한두 구절씩 외웠습니다. 그리고 밤새워 기도할 때면 그 구절들을 외우듯이 기도했죠. 신학교 시절에도 그렇게 밤에 강당에 나가 기도했는데, 그때 후배 신학생 지금은 구례에서 목회하고 있는 한열 목사님이 제 기도가 끝나더니만, ‘형님은 나중에 말씀 목회를 해야 쓰겠소’하고 이야기를 한 적이 있죠. 이유인즉 말씀이 계속 말씀 되게 풀리듯이 기도하는 소리를 듣고 그렇게 말해 준 이야기였죠.
그 시절에 외웠던 성경 구절 중 하나가 오늘 본문의 욥기서 8장 7절입니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이 말씀은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가 좋아하는 구절이죠. 사업을 시작하는 분들도 액자 표구에 이 구절 말씀을 새겨서 가게나 상점이나 사업장에 걸어 놓기도 하죠. 저도 그때 이 구절 말씀을 외우고 있었고 그것을 제 목회를 위한 말씀으로 삼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을 깊이 살펴볼 때 이 구절은 성령님의 진정한 감동에서 흘러나온 말씀이 아니라 인간의 말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게 됩니다. 본문 1절에 ‘수아 사람 빌닷’이 대답했다고 나오죠. 욥과 대화를 나눈 첫 번째 사람인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욥의 대화가 끝났고 이제 두 번째 사람이 등장한 셈이죠.
‘수아’사람 빌닷이 누구일까요? ‘수아’(שׁוּחַ)는 아브라함의 후처 그두라의 소생(창25:2)인데, ‘빌닷’(בִּלְדַּד)이란 이름은 ‘혼란스러운 사랑’(confusing love)을 뜻합니다. 70인 역(LXX)은 빌닷이 수아 족속의 폭군으로, 형제지간인 미디안 족속과 함께 거주했을 것으로 보고 있죠. 그만큼 빌닷은 아브라함과 혈족이었지만 아라비아를 떠돌던 족속의 후예답게 ‘사막의 지혜’를 추종한 자였습니다.
그가 한 말이 본문 2-3절에 나와 있습니다. “네가 어느 때까지 이런 말을 하겠으며 어느 때까지 네 입의 말이 거센 바람과 같겠는가 하나님이 어찌 정의를 굽게 하시겠으며 전능하신 이가 어찌 공의를 굽게 하시겠는가”
영문도 모른 채 모든 것을 잃고 극심한 상실감에 빠져 있는 욥을 향한 빌닷의 첫마디 말부터 왠지 막무가내죠. 욥을 향한 동정심은 조금도 허락되지 않는 모습이죠. 아마도 데만 사람 엘리바스 곧 첫 번째 토론자로 나선 엘리바스에게 욥이 자기 의로움을 내세웠기 때문에 두 번째 토론자로 나선 빌닷이 그렇게 욥을 공박하고 나서지 않았나 생각할 수 있습니다. ‘네가 그렇게 너의 의로움을 내세우는 게 오히려 절대자이신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무례함일 뿐이다’하고 말이죠.
그래서 본문 4∼7절을 쭉 읽어나가면 그런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다. ‘네 자녀들이 다 사라진 것도 너의 죄악 때문다’, ‘그래서 그 하나님을 찾고 간구하면 하나님께서 다시금 긍휼을 베풀어 주실 것이다’, ‘그렇게 다시 시작하는 것이 쉽지 않겠지만 나중에는 심히 창대하게 해 주실 것이다’하고 말이죠.
어떻습니까? 이와 같은 빌닷의 주장은 조목조목 뜯어보면 틀린 말은 거의 없습니다. 그가 말한 대로 하나님은 절대 공의로우신 분이시고, 그분 앞에 자기 죄를 고백하면 용서해주시는 분이시고, 그런 관계회복이 처음에는 쉽지 않지만 점차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창대케 되는 은총을 덧입게 된다는 것이죠.
결코 틀린 주장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은 결국엔 인과응보로 실현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종국에 악인이 반드시 징계를 받고 의인은 반드시 복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죠.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바요 우리가 공의로우신 하나님을 믿고 영원하신 하나님을 의지하는 바이죠
그것은 본문 11∼12절을 통해서도 아주 명확하게 밝혀주고 있는 내용입니다. “왕골이 진펄 아닌 데서 크게 자라겠으며 갈대가 물 없는 데서 크게 자라겠느냐 이런 것은 새 순이 돋아 아직 뜯을 때가 되기 전에 다른 풀보다 일찍이 마르느니라” 왕골은 파피루스라는 식물의 일종입니다. 왕골이 진펄 곧 땅이 부드럽고 질퍽한 갯벌에서 자라듯이 인간이라는 존재는 하나님이라는 진펄 속에 심겨 있지 않으면 안 된다는 주장이죠. 더욱이 갈대가 자라기 위해서는 물이 필요하듯 우리의 인생도 하나님이라는 생명의 물이 없으면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기독교에서 내세우는 중요한 진리 중 하나가 인간이 의롭게 사는 것이죠. 그런데 그 의라는 것은 인간 스스로는 불가능하고 오직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속에서만 가능한 것이죠. 그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고난을 당하셨죠. 그래서 어긋난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켜 주셨죠. 그만큼 예수님께서 바로 우리의 의가 되어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인간은 모두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고 심화시킬 수 있는 것이죠. 그런 관계를 통해 고통도 죽음도 극복하며 나아갈 수 있는 것이죠.
지금 빌닷이 욥에게 말하는 내용이 바로 기독교적인 교리의 핵심과도 같은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시고 심판하시는 분이신데, 그분의 은혜와 사랑 곧 그분의 의로움 안에 거해야만 진정한 생명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빌닷은 전혀 문제가 없는 것일까요? 고통당하는 욥을 향해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이야기하고 있고, 그만큼 하나님과 바른 관계회복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고, 그런 자들이 나중에 창대케 된다고 주장하는데, 과연 그런 주장을 펼치는 빌닷에게는 문제가 전혀 없는 것입니까?
있죠. 그에게 있는 문제점은 하나님의 진리에 대해 탁월한 이해를 갖고 있긴 하지만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사람에 대한 이해 곧 인간 이해가 없다는 점이죠. 무슨 말입니까?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 독생자를 인간에게 내어 주신 이유를 공감하려고 하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코 공의로우신 분이지만 인간을 사랑하기 위해서 공의를 앞세운 분이 아니라 당신의 긍휼을 앞세우신 분이라는 점이죠. 당신의 긍휼을 앞세우지 않았다면 어찌 당신의 독생자까지 십자가에 내어주셨겠습니까? 당신의 공의로움만 앞세웠다면 어느 인간이 구원받을 수 있겠습니까?
빌닷은 그런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대해 전혀 공감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욥이 고통을 당하고 있다면, 고통당하는 욥을 위해 당신의 독생자를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하심에 대해 말해야 했죠. 그렇게 빌닷이 욥을 품는 게 하나님의 긍휼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빌닷은 욥을 이해하려거나 공감하려고 한 게 아니죠. 그는 하나님의 긍휼과 인애가 없이 오로지 공의의 관점만 들이대며 욥을 정죄한 것입니다. 그러니 욥을 향해 ‘네가 회개하고 돌아서는 그 시작들이 미약하지만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게 될 것이다’하고 백날 이야기한들 고통 중에 있는 욥에게는 그 말이 하나님의 은혜로 다가오지 않는 것이죠.
크리스천인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인간에 대한 지식이 언제나 함께 가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결핍되면 무신론적 인본주의에 빠지게 되고, 인간에 대한 지식이 결핍하면 과격한 근본주의자로 전락하기 때문이죠. 하나님의 대한 올바른 이해와 함께 인간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함께 가야 하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그만큼 욥을 바라보는 빌닷의 이해가 인간 이해로 나타나야 하는 것이죠.
그것은 오늘을 사는 우리 자신을 향한 말씀과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2장 37∼40절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죠.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예수님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곧 네가 고통당하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임을 천명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을 사는 우리 자신들도 누군가 고통에 처해 있다면 말씀으로 평가하고 정죄하기보다 먼저 긍휼의 마음으로 품는 자들이 돼야 하는 것이죠. 그것을 주님께서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긍휼의 마음이 저와 여러분들에게 충만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주님. 십자가에 독생자를 내어 주시기까지 저희를 사랑하신 주님. 저희가 하나님에 대한 이해와 사람에 대한 이해를 함께 지니며 살게 해 주시옵소서. 주님을 아는 참된 지식 안에서 이웃을 이해하고 공감력을 키우게 하시옵소서. 무엇보다 고통 가운데 있는 분들을 향해 주님의 마음으로 위로하고 격려하는 참된 사람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새벽묵상DewSermon > 욥' 카테고리의 다른 글
태에서 바로 무덤에 옮겨졌으리이다(욥10:1-22) (0) | 2022.01.12 |
---|---|
내가 온전할지라도 나를 정죄하시리라(욥9:1-35) (0) | 2022.01.11 |
품꾼의 날과 같지 아니하겠느냐(욥7:1-21) (0) | 2022.01.08 |
두려운 일을 본즉 겁내는구나(욥6:1-30) (0) | 2022.01.08 |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욥5:1-27) (0) | 2022.01.06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