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묵상한 말씀은 그것이었죠. 우리가 고난 가운데 있을 때 고난 중에 침묵하시는 하나님으로 인해 답답하고 힘들 때가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침묵을 통해 일하지 않는 분이 아니라고 했죠. 그 침묵을 통해 더욱 선한 것을 준비하시고, 그런 과정을 통해 우리를 정금같이 빚고 계신다고 했습니다. 그만큼 우리에게 다가오는 고난은 우리의 믿음을 정직한 믿음으로 변화시켜주시는 과정이죠. 고난은 우리에게 정금과 같은 불순물들을 제거하는 제련소와 같은 과정것입니다.
오늘 읽은 6장은 욥의 세 친구 중 가장 연장자인 엘리바스의 첫 번째 변론에 대한 욥의 반박 내용입니다. 욥은 먼저 그런 이야기를 꺼냅니다. 친구들이 듣기에 경솔하게 들린 ‘탄식’을 말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말이죠. 욥은 자신에게 임한 재앙의 무게를 달아보면 바다의 모래보다 무거울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 친구들이 듣기에 경솔하게 들리는 탄식마저도 자신은 견딜 수 없는 고통에서 비롯된 것임을 밝히는 것이죠. 욥이 겪고 있는 고난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과녁 삼아 쏜 독화살에 맞은 것과 같은 것이라고 말하죠. 그 정도로 이해할 수 없고 납득할 수 없고, 감당하기 힘든 고통이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탄식하는 이유를 5절에 그렇게 호소하죠. “들나귀가 풀이 있으면 어찌 울겠으며 소가 꼴이 있으면 어찌 울겠느냐”
나귀와 소가 우는 것도 타당한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먹이가 부족하든지 어디가 아파서 그렇든지 말입니다. 그런 동물들의 탄식에도 그만한 이유가 있듯이, 자신의 아픔과 고통도 다 이유가 있다는 외침이죠. 그것은 엘리바스의 주장처럼 죄 때문에 재앙을 당하는 게 아니라는 주장입니다. 차라리 그러면 더 낫을 수 있겠죠. 그러면 자신이 당하는 고통을 이해할 수 있으니 말입니다. 그렇지만 욥은 그런 경우가 아니기 때문에 억울하기도 하고 더욱 괴로운 것이죠. 그런데도 엘리바스는 기계적인 ‘인과응보론'에 근거하여 욥의 고난을 정죄하고 비난하는 것이죠. 그러니 욥도 그런 이유라도 알면 좋겠다고 항변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엘리바스의 충고로 인해 고통스러워하는 욥의 반응은 우리 주변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습들이죠.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사람은 너무나도 힘들어서 몇 마디 못하고 있는데, 그 말을 듣고 있는 상대방은 그 사람의 고통을 피상적으로만 받아들이고 판단하고 정죄하는 경우 말입니다.
고통당하는 사람은 11절의 욥과 같죠. “내가 무슨 기력이 있기에 기다리겠느냐 내 마지막이 어떠하겠기에 그저 참겠느냐” 도저히 자기 자신은 소망이 없다는 뜻이죠. 그저 절망 가운데서 마지막을 내다볼 뿐이라고 탄식하는 마음입니다.
그런데도 엘리바스처럼 하나님의 징계를 달게 받으라고만 이야기한다면 무슨 말이 통하겠습니까? 그만큼 욥을 위로하러 온 세 명의 친구들, 그중에 맨 먼저 욥을 정죄하고 나선 엘리바스는 욥을 위로하러 온 게 아니라 판단하러 온 꼴이 된 것입니다. 소가 울고 들나귀가 울 때 이유가 있듯이, 욥이 당하는 고통도 분명코 뭔가 이유가 있기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들춰내고 아픔을 긁어내기보다 함께 고민하고 함께 아파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도 그 친구들이나 엘리바스는 욥의 아픔과 고통을 어루만지고 함께 아파하기보다 그 원인을 추적하는데만 급급한 모습이라는 점입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엘리바스를 비롯한 두 명의 친구는 욥의 고난과 아픔을 헤아리는 게 우선순위가 아니라 정죄하고 비난하는 게 우선순위가 된 꼴이죠.
욥은 14절을 통해 그렇게 고백을 하죠. “낙심한 자가 비록 전능자를 경외하기를 저버릴지라도 그의 친구로부터 동정을 받느니라.”
무슨 말씀입니까? 비록 엘리바스의 견해가 맞다고 해도, 설령 욥이 인과응보식의 논리로 고난을 당하고 있다 해도, 지금 욥의 친구들이 찾아와 욥에게 해야 할 말은 정죄와 비난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 위로해주지 못하느냐, 하는 말이죠. 그만큼 그의 친구들의 말, 그중에 데만 사람 엘리바스의 말 자체가 욥의 심장을 후벼 파는 꼴과 같다는 뜻이죠.
그렇다면 엘리바스와 그 친구들이 왜 그렇게 욥을 헐뜯고 비난하는 격으로 말하는 것입니까? 그들이 기계적인 인과응보식으로 정죄의 논리를 욥에게 펼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본문 21절에서 그렇게 밝혀주고 있죠. “이제 너희는 아무 것도 아니로구나 너희가 두려운 일을 본즉 겁내는구나.”
무슨 말씀입니까? 욥의 친구들이 찾아왔을 때 처음에는 위로하기 위해서 온 것이었죠. 그래서 7일간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곁에서 지켜보고 있었죠. 그런데 막상 욥이 겪는 고통을 보니까 너무나도 참혹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죠. 그때 그들은 생각하게 된 것이죠. 그 정도로 욥이 참혹한 고통을 당한다는 것은 분명히 하나님 앞에 재앙을 받는다는 것이라고 말이죠. 그런데 혹시 자신들이 위로한다고 하면서 잘못 말했다가는 자기들도 욥처럼 하나님의 재앙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마음이 든 것이죠. 그래서 자기들은 욥과는 다르다는 것을 나타내고자 앞다투어 욥을 정죄하고 책망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만큼 그들은 하나님의 두려움에 사로잡혀 욥이 당하는 고통을 당하지 않기 위해 욥을 정죄하고 나선 점이라는 것이죠. 이른바 욥이 당하는 고통의 불똥이 자신들에게 떨어 질까봐 겁이 나서 욥을 정죄하고 비난하는 꼴이란 점입니다.
그래서 욥은 24절을 통해 고백하죠. “나의 허물된 것을 깨닫게 하라 내가 잠잠하리라.”
무슨 뜻입니까? 그 친구들이 자신을 정죄하고 비난하는데, 진실된 허물을 일깨워주면 자신이 잠잠하겠다는 것입니다. 내가 불의한 것이 있고 하나님께 죄를 범한 게 있다면, 그래서 내가 당하는 고난이라면 기꺼이 맞아 들이겠다는 것이죠. 그러면 너희들이 내게 던지는 정죄와 비난도 기꺼이 감수하겠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그 친구들의 말이 매우 무익하고 공허한 말에 지나지 않음을 탄식하고 있는 것이죠. 자신은 아무리 생각해도 하나님께 죄를 범하거나 불의한 일이 없기 때문에 말입니다. 그런데도 동정은커녕 전형적인 ‘인과응보론’에 근거해 자신을 비난하고 있으니 친구들의 그 말에 정말 괴로워하는 것이죠. 그것은 마치 자기 이익을 위해서라면 고아라도 제비를 뽑아 팔아넘기는 것과 같다고 27절에서 이야기하죠. 그러면서 욥은 다시 한번 자신의 의로움을 강변하면서 친구들을 향해 정죄하는 일을 중단하도록 촉구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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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욥의 탄식은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하지 않습니까? 욥의 친구들은 욥의 고통을 전혀 이해하려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진심어린 이해심이나 공감력이 결여된 충고만 내 뱉고 있는 것이죠. 그러니 욥의 고통은 가중되는 것이고요.
만약 욥의 고난에 관해 친구들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예수님의 고난은 어떻습니까? 예수님도 죄 때문에 고난당하는 격이라고 주장해야만 옳은 것 아닙니까? 하지만 예수님께서 당한 십자가 고난은 죄 때문이 아니었죠. 인류를 위한 구원 곧 저와 여러분들을 위한 고난을 겪으신 것이었죠.
그래서 우리가 사는 세상은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주장으로 인해 ‘더 중요한 관계'를 깨트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심지어 신앙인들조차도 자기 판단 자기 생각 자신의 성경적 관점을 이야기하며 차가운 신앙의 칼을 들이대는 경우가 많죠. 그로 인해 고통당하는 누군가에게 위로와 격려가 되기보다 오히려 그 고통을 더욱 후벼 파는 것밖에 되지 않죠.
열왕기하 4장에 그런 말씀이 나오지 않습니까? 엘리사 선지자가 수넴 마을을 지나가는데, 그곳의 한 여인이 엘리사 선지자를 극진히 대접하죠. 그리고 옥상에 벽을 둘러 작은 다락방도 만들고 그 방에 침대와 탁자와 의자와 등잔까지 제공하죠. 그런 그녀에게 엘리사 선지자가 내년에 아들이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정말로 아이를 낳게 되죠. 그 아이가 자라는데 어느 날 갑자기 머리가 아프다고 하면서 죽죠. 그러자 그녀는 안식일을 지키고 있는 엘리사를 향해 수넴에서 갈멜산까지 24km 거리도 아랑곳없이 나귀를 타고 가죠. 그때 엘리사를 만났을 때 어떻게 합니까? 엘리사는 사환 게하시에게 먼저 가서 지팡이 하나를 아이 위에 올려놓도록 하죠. 그리고 엘리사가 곧장 뒤따라가 행한 행동이 무엇입니까? “엘리사가 여호와께 기도하고 아이 위에 올라 엎드려 자기 입을 그의 입에, 자기 눈을 그의 눈에, 자기 손을 그의 손에 대고 그의 몸에 엎드리니 아이의 살이 차차 따뜻하더라.”(왕상4:34) 엘리사는 ‘차디찬 신앙의 지팡이'만 들이댄 게 아니라 죽은 아들의 시체 위에 자기 몸을 일치시키는 애통과 긍휼을 보여준 것이었죠. 이것이 그 어떤 정죄나 비난보다도 큰 위로와 공감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도 이런 공감과 위로의 사람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사랑하시는 주님.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만이 우리의 ‘의’요 우리의 ‘옮음’의 기초임을 믿습니다. 우리 자신에게서 나오는 그 모든 ‘의’와 ‘옳음’은 오히려 차디찬 신앙의 칼일 뿐이요, 예수 그리스도 사랑으로 품는 그 긍휼만이 진정한 위로와 소망이 된다는 사실을 잊지 않게 하시옵소서. 오늘 고통 속에 있는 누군가를 향해 그런 위로자 그런 격려자로 살게 하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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