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은 아브라함과 비슷한 족장시대의 사람이었습니다. 욥기서는 시편 잠언 전도서와 같은 시가서로 구분이 되죠. 물론 욥기는 성경 중에서 쉽게 해석하기 어려운 말씀 중에 하나입니다. 그런데도 욥기서를 바라보면서 생각하게 되는 것은 한결같죠? 어떻게 의로운 욥이 고난을 받을 수 있는가 하는 점이죠. 그러나 그 고난의 터널을 잘 인내하고 통과한 욥에게 하나님께서는 갑절의 복을 주신다는 것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고난이 당시에는 힘들과 고통스럽지만 지나놓고 보면 유익이 된다는 것도 알게 되죠.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시119:71)하고 말씀합니다.
오늘 본문도 계속해서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욥을 향해 자기주장을 펼치는 말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전능자의 징계를 업신여기지 말라는 주문이죠.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고, 그 의로우신 분에게 네가 잘못을 했기 때문에, 지금 네가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격입니다. 아니 뗀 굴뚝에 연기가 나겠느냐? 까닭 없이 네가 고통을 당하겠느냐? 다 하나님 앞에 죄를 범했기 때문에 지금 징계를 받고 있으니, 하나님의 징계를 업신여기지 말라는 뜻입니다.
욥은 정말로 징계를 받는 것 같은 상황입니다. 그 많던 재산을 다 잃고, 10명의 자식들도 다 잃고, 본의 아니게 자기 몸에 병에 걸려 비참한 모습을 하고 있고, 자기 부인으로부터 모욕적인 이야기를 듣는 처참한 상황에 직면해 있죠.
그것을 본문 19절에서 밝혀주는 것처럼, 일곱 가지 환란을 당한 모습이라 할 수 있겠죠. 첫째는 소와 나귀와 종들이 약탈당했고, 둘째는 양과 종들을 다 잃었고, 셋째는 낙타와 종들까지 다 잃었고, 넷째는 자녀들이 죽었고, 다섯째는 그의 건강마저 잃었고, 여섯째는 그의 아내마저 적대감을 품고 있고, 그리고 일곱 번째는 그의 친구들이 위로하기 위해 찾아온 것 같지만 실은 욥을 비판하고 있다는 점이 그렇죠. 그러니 욥은 죽을 맛이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욥을 평가하셨습니까? 1장 8절에서 그렇게 말씀하셨죠.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 하나님께서 욥의 믿음을 극찬해주셨습니다. 그만큼 욥은 하나님의 인정을 받은 신실한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말할 수 없이 처참한 고난을 겪고 있는 상황이죠. 그 고난은 욥의 죄악 때문에 받은 징계가 아니라 욥의 입장에서는 까닭 없이 당하는 일이죠. 사단이 욥의 믿음을 시험코자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단의 시험을 허락하신 일로 인해 당하는 고난이죠.
그런데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또 다른 친구들은 그런 욥의 상황을 전혀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턱대고 하나님의 징계를 달게 받으라고 호통을 치는 격이죠. 하나님의 숨은 의도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함부로 남의 상황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그가 어떻게 말합니까? 2절에 “분노가 미련한 자를 죽이고 시기가 어리석은 자를 멸하느니라” 4절에 “그의 자식들은 구원에서 멀고 성문에서 억눌리나 구하는 자가 없으며”
이게 무슨 말입니까? 네가 까닭 없이 고난을 당하는 게 아니라는 뜻입니다. 너의 분노, 너의 악행, 너의 어리석음이 결국은 너의 자식들까지 죽이게 되었다는 인과응보 논리죠.
그래서 8절에 뭐라고 말합니까? “나라면 하나님을 찾겠고 내 일을 하나님께 의탁하리라.” 더욱이 9절에서는 그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헤아릴 수 없이 큰 일을 행하시며 기이한 일을 셀 수 없이 행하시니”
한 마디로 말해 네가 하나님을 찾지 않아서, 네가 하나님께 네 인생을 의탁하지 않아서, 하나님의 응답하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욥을 위로하는 것 같지만 실은 예리하게 공략하는 것이죠. 고통당하는 욥의 심기를 더욱 곤혹스럽게 하는 그의 주장입니다.
그래서 17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전능자의 징계를 업신여기지 말지니라.”
무슨 말씀입니까? ‘욥아, 네가 지금 당하는 게 하나님의 징계야’, ‘그러니 하나님의 징계를 결코 가볍게 여기지 말아야 한다’는 주문이죠. 그러면서 위로하는 듯 하는 말을 18절에 하죠. “하나님은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 그의 손으로 고치시나니.”
아주 그럴듯한 말 같지 않습니까? 듣고 보면 지극히 옳은 말이죠. 하나님의 능력은 충분히 그렇게 하실 수 있기 때문에 말입니다. 그런데 엘리바스가 궁극적으로 이렇게 말을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네가 하나님 앞에 징계를 달게 받으면, 그 징계를 통해 네가 거듭나면, 하나님께서 다시금 싸매시고 회복시켜 주실 것이다,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주권보다 욥의 행위를 더 요구하는 것이죠.
어떻습니까? 이 이야기를 들으면, 누가 떠오르십니까? 고난 당하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위로하려는 나 자신의 모습을 비춰주지 않습니까? 그게 아니라면 내가 고통당할 때 나를 찾아와 위로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떠오르지 않습니까? 그때 우리가 엘리바스처럼 인과응보식으로 말하는 자인가, 아니면 묵묵히 함께 아파하는 모습인가, 그것이 중요한 점이죠. 엘리바스는 욥이 당하는 고난에 대해 전혀 알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자기 신앙의 상식으로 욥을 평가하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의 징계를 달게 받아야 한다고, 그래야만 하나님께서는 싸매주실 것이라고 권면하는 것이죠. 지극히 맞는 말이지만 욥에게 전혀 위로나 도움이 되지 않는 말이죠.
그러나 욥은 어떻겠습니까? 아무리 엘리바스가 그렇게 이야기한다 해도, 욥은 어떻게 대구할 수 없는 상황 아닙니까? 욥이라고 어찌 하나님 앞에 자신의 고통에 대해 간구하지 않았겠습니까? ‘도대체 제가 무엇을 잘못했길래 제 재산을 전부 앗아가시는 것입니까?’, ‘도대체 제 자식들이 무엇을 잘못했길래 다 거두신 것입니까?’, ‘제발 제가 깨달을 수 있도록 말씀하시고 응답해 주세요’ 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욥기서 38장에 다다르기까지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침묵하셨습니다. 세 명의 친구들, 또 다른 한 명의 지혜자 곧 엘리후까지 나서서 욥의 상황을 논리적으로 비판하고 정죄죠. 그 역시 의로우신 하나님의 징계를 달게 받아야 한다고 말이죠. 하지만 욥은 그때도 자기 의로움을 항변할 수밖에 없었죠. 그런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여전히 침묵하셨습니다. 그러니 욥은 더더욱 괴로울 수밖에 없는 심정 아니었겠습니까?
이것을 우리가 깊이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도 신앙생활 가운데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서 살아가다가, 어느 순간 하나님께서 말씀하지 않으시는 것을 경험할 때가 있다는 점이죠. 분명히 하나님께서 계신데도 내 영혼이 답답하고, 환경이 막히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는데 결과가 어렵게 되는 상황에 직면할 때가 있다는 점 말입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죠. 하나님께서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시기 위해 하나님과 교제하던 아브라함이 창세기 16장 16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은 시점이 86세였죠. 그리고 17장 1절로 넘어가면 그의 나이 99세가 됩니다. 비록 성경은 한 장 차이지만 그 한 장 사이에 하나님의 침묵하신 기간 13년이 숨어 있다는 사실이죠. 그 13년의 침묵기간 후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내년에 아들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도 마찬가지죠. 하나님과 그렇게 친밀하던 예수님께서도 십자가 고난의 잔 앞에 하나님께 간구하지 않았습니까?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마26:39) 그러나 하나님은 그때 침묵하셨죠. 더욱이 가상칠언 곧 십자가상의 일곱 마디 말씀 중에도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마27:46)하고 절규하셨지만 하나님은 그때도 침묵하셨죠. 그런데 하나님의 그 침묵을 통해 예수님은 궁극적인 십자가의 완성을 이루셨죠. 그로 인해 우리에게까지 죄사함의 은혜와 구원의 은총을 베풀어주시는 구세주로 우뚝 서게 되셨습니다.
그렇기에 때때로 하나님께서 침묵하실 때 우리는 답답하고 힘들 수 있죠. 하지만 그런 침묵의 시간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아름답고 선한 길을 준비하고 계신다는 것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길 축복합니다.
*묵상과 기도
사랑하시는 주님.
우리가 살아가면서 크고 작은 어려움과 고난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우리의 상황에 대해 주님께 여쭤보아도 주님은 침묵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답답하고 힘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침묵은 우리를 순전하게 빚으시는 과정임을 깨닫게 됩니다.
더 크고 위대한 일을 이루시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 있음을 다시금 깨닫습니다.
오늘도 그런 주님의 은총에 저희의 인생을 내어맡기며 살게 하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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