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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묵상DewSermon/욥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대답하여(욥4:1-21)

by 똑똑이채널 2022. 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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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교회에 가나 예언기도의 은사를 받았다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분들 중에는 개인 가정집을 기도처로 꾸며 놓은 분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신주단지를 모시듯 기도의 신전을 세워놓고 자신에게 찾아오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 주고 예언을 해 줍니다. 그런 분들은 자신이 받은 예언이나 기도 외에 다른 사람의 말은 들으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담임목사님의 말도 듣지 않고 자신이 받은 은사와 능력만을 최고로 여기죠. 종종 담임목사님과 갈등을 야기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런 분들도 문제지만 더 문제는 무엇이겠습니까? 그런 분들을 찾아서 기도를 받고자 하는 성도들이죠. 성도들이 그런 분에게 기도를 받고자 하는 마음이 무엇입니까? 그런 분들이 마치 무당처럼 하나님의 깊은 뜻도 잘 알아낸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죠.

그런 부분은 실은 성경에도 등장합니다. 사울이 하나님의 뜻과 의도를 망각한 채 ‘자아’라는 틀 안에 갇혀 허우적댈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었죠. 그때 그가 보인 행동이 사무엘상 28장 6-7절에 기록돼 있죠. “사울이 여호와께 묻자오되 여호와께서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그에게 대답하지 아니하시므로 사울이 그의 신하들에게 이르되 나를 위하여 신접한 여인을 찾으라 내가 그리로 가서 그에게 물으리라 하니 그의 신하들이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엔돌에 신접한 여인이 있나이다”

사울이 행한 것은 엔돌의 신접한 여인을 찾아간 것입니다. 그녀는 신령한 여인이 아니라 무당이었죠. 왜 그토록 사울이 분별력을 잃어버렸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받들기보다 자기 욕심을 너무 앞세운 까닭이었죠. 하나님을 믿는 자녀들은 때로 하나님께서 침묵하실 때도 하나님의 응답하심으로 믿고 나아가야 되는데, 조급증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엔돌의 신접한 여인이나 예언기도를 해 주는 분들의 대답은 한결같지 않겠습니까? 인과응보 격으로 말해주는 것 말입니다. 선을 행했기 때문에 복을 받는 것이고 악을 행했기 때문에 화를 당하는 것이라고 말이죠. 그게 틀린 건 아니죠.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둔다”는 갈라디아서 6장 7절의 말씀도 있기 때문에 말입니다. 그래서 “아니 뗀 굴뚝에 연기 나겠느냐”하고 말하는 식이죠.

하지만 욥기서를 통해 깨닫게 된 첫 번째 주님의 메시지가 무엇이었습니까? 의롭게 살아가는 신앙인에게도 얼마든지 고난이 찾아올 수 있다는 것이었죠. 욥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였죠. 심지어 잔치를 벌일 때 자식들이 하나님의 이름에 누가 되지 않았는지 살피면서 잔치가 끝나면 속죄제를 드릴 정도로 흠잡을 데 없는 의인 중의 의인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욥에게 고난이 찾아왔습니다. 그 많던 재산 다 날아가고 7명의 아들과 3명의 딸들도 죽었죠. 그 후에는 자기 몸에 악창이 들끓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런 의인, 하나님 앞에 온전하고 정직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한 것을 추구하지 않는 욥에게 고난이 찾아오게 된 것입니까? 심은 대로 거둔 것입니까? 아니 뗀 굴뚝에 연기가 나온 것입니까? 그런 관점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은 그런 관점으로만 주관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인간이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수많은 경우를 주관하시는 분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만큼 신앙인에게 찾아오는 고난과 고통도, 심지어 우리 자신에게 찾아오는 고난과 고통도 그럴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깨달을 필요가 있다는 점이죠.

 

오늘 본문도 그런 관점으로 욥에게 발언하는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욥을 위로코자 왔던 세 친구들 가운데 첫 번째 사람입니다.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그죠. 데만은 에돔 북부의 한 성읍으로서, 엘리바스가 에돔 족속의 후예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에돔은 에서의 후예고 에서는 야곱과 한 형제지간이죠.

그런 에돔 족속인 엘리바스는 함께 욥을 찾아 온 다른 두 명의 친구들 가운데 가장 연장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가 맨 먼저 나섰기 때문이죠. 그런데 그 데만과 관련하여 예레미야 49장 7절에서는 그곳에 지혜자들이 모여 사는 도시로 밝혀주고 있습니다. 에돔에 대한 말씀이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데만에 다시는 지혜가 없게 되었느냐 명철한 자에게 책략이 끊어졌느냐 그들의 지혜가 없어졌느냐

그곳 데만이 지혜자들이 사는 곳인데, 그곳 출신의 엘리바스가 나서서 오늘 본문의 욥과 함께 첫 번째 변론을 합니다.

그의 주장은 한 마디로 그것이죠. 선한 사람은 불멸하고 악한 사람은 반드시 멸망한다는 것입니다. 본문 7-9절입니다. 생각하여 보라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 내가 보건대 악을 밭 갈고 독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나니 다 하나님의 입 기운에 멸망하고 그의 콧김에 사라지느니라.”

엘리바스는 꽤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사람입니다. 선인은 반드시 복을 받아야 하고 악인은 반드시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논리를 갖고 있는 사람이죠. 이 진리는 인류의 오랜 관찰과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깨달음입니다. 그만큼 데만 사람들도, 데만의 지혜자들도 그런 이치에는 도가 튼 사람들이죠. 그래서 하나님께서도 그런 분임을 욥에게 역설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과연 무슨 뜻이겠습니까? ‘욥아, 네가 재산 다 잃게 된 것, 네가 자식들 다 잃게 된 것, 네 몸에 악창이 들끓게 된 것, 이것은 네가 악한 삶을 살았기 때문이지 않느냐?’, ‘네가 만약 선한 삶을 살았다면 어찌 하나님께서 네 것들을 다 사라지게 할 수 있겠느냐?’ 하고 주장하는 것과 같은 격이죠.

그만큼 엘리바스는 하나님은 인간 세상의 도덕성에 따라 판단하시는 분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악은 지구 끝까지라도 찾아가서 심판하시는 분이시고, 선은 어떤 방해요소가 있어도 복을 주시는 하나님이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온 인류는 단 두 종류의 사람으로만 구성돼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 복을 받을 사람과 심판 받을 사람으로 말이죠. 그 외에는 없다고 여긴 것입니다.

이것이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엘리바스의 주장이 위험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기 자신의 생각을 절대 진리처럼 강요하는 것이죠. 자신의 판단이 절대적으로 옳다는 논리입니다. 마치 예언기도를 하는 분이나 목회자들이 자기 생각을 하나님의 생각처럼 주입시키려는 경향이 그것입니다.

그렇지만 욥이 당한 고난의 관점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데만의 지혜자들, 그 중에서도 엘리바스의 관점이나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의 인과응보식 관점은 모두 옳은 게 아니라는 것 말입니다. 욥이 당한 고난은 ‘까닭 없이 찾아온 일’이었기 때문이죠. 이른바 인간의 관점으로 이해할 수 없는 영적인 세력들이 주도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의롭게 산 욥에게도 얼마든지 고난이 찾아올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하는 것이죠. 그것은 그 어떤 인간의 논리와 비판으로도 설명될 수 없는 일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주도하신 일이요 하나님만이 해결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는 주님의 음성이 무엇입니까? 누군가 괴로운 고통과 고난을 맞이했을 때 그를 향한 비판은 삼가야 한다는 사실이죠. 내가 까닭없이 고난을 당했는데 누군가 찾아와 ‘아니 뗀 굴뚝에 연기가 나겠어’, ‘좋지 않은 것을 심었기 때문이지’ 한다면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욥의 첫 번째 친구가 그렇게 비판하고 비난하고 있으니 욥이 너무나 괴로웠겠죠?

그처럼 우리 인생 속에는 사람의 판단으로 알 수 없는 일들이 부지기 수입니다. 결코 인과응보식으로 판단할 수 없는 일들이 다반사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하나님만이 해결하고 깨닫게 하시는 일들이 많습니다. 그런 부분을 생각한다면 누군가 고난과 고통에 처할 때 묵묵히 기도하는 게 최선책임을 알 수 있죠.

우리가 그런 고통의 상황에 직면했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는 그때도 주님의 지팡이와 막대로 나를 안위해 주시는 주님을 바라보는 길뿐이죠. 그때 주님의 섭리를 깨닫게 하실 것이요, 때가 되면 욥처럼 그 이유도 알게 해 주실 것입니다. 그런 은혜가 충만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전자책] 하나님의 시간표

이 책은 지난 몇 년간 설교 말씀을 통해 나눈 예화다. br예화는 설교에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다. br말씀의 이론을 실제화할 수 있는 간증이기 때문이다. br그만큼 예화는 설교에서 중요한 몫을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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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시는 주님. 저희의 인생을 돌보시고 이끄시는 목자되신 하나님 아버지. 이유도 알 수 없고, 결과도 예측할 수 없는 인생의 물음표들이 우리에게 다가올 때가 많습니다. 선하고 의롭게 사는데도 알 수 없는 고난이 겹쳐 올 때도 있습니다. 그때 신앙인들조차도 인과응보식으로 해석하려 하지만 그 너머에 하나님만이 풀 수 있는 일들이 있음을 깨닫게 해 주시옵소서. 저희들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가는 길에 있을 때도 오직 주님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안위해주시는 주님만 의지하게 하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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