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 천상의 어전회의를 통해 사탄에 물어봤죠. ‘내 종 욥을 유의해보았느냐?’, ‘욥처럼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가 있더냐?’하고 말이죠. 그러자 사단은 ‘까닭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게 아닙니다.’하고 항소했죠. 그러면서 ‘욥의 재산을 빼앗으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을 것입니다’하고 말했죠. 그때 하나님께서는 욥의 소유물을 통해 그의 신앙심을 흔들어보라고 했죠. 그때 사단은 욥의 가축과 종들과 자식들까지 쳤죠. 그러자 욥이 어떻게 했습니까? ‘주신 자도 여호와시고 거두신 자도 여호와십니다.’하면서 결코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했죠.
그만큼 사단이 욥의 신앙심을 흔들어댔지만 욥은 결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물론 욥은 이때 사단이 흔들어대는 것도 몰랐고, 그 모든 소유물을 앗아간 것도 전혀 몰랐죠. 그만큼 중요한 게 무엇이었습니까? 욥이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 속에 있었던 것이죠. 우리도 하나님과 깊은 관계 속에 거할 때 그 어떤 세력이 우리의 신앙심을 흔들어댈지라도 결코 흔들리지 않는 신앙심을 견지할 수 있다는 사실입입니다. 마치 깊은 호수에 돌맹이를 던져도 아무런 영향이 없듯이 말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사탄이 그렇게 욥을 테스트해도 소용이 없자 오늘 본문에는 어떤 전략을 갖고 나옵니까? 본문 5절입니다.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뼈와 살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
그의 육신을 쳐 보자는 것입니다. 그러면 분명코 하나님을 욕할 것이라고 하죠.
과연 이때 욥은 어떻게 합니까? 자신이 그동안 소유한 가축과 사랑하는 자식들을 한꺼번에 잃은 고통을 겪었씁니다. 그것만을도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 아닙니가? 그런데 그 고통이 채 가시기도 전에 육신적 고통일 가하겠다는 사단의 전략이죠. 한꺼번에 모든 고통이 밀려드는 형국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탄에게 말하죠. 6절입니다. “내가 그를 네 손에 만기노라. 다만 그의 생명은 해하지 말리니라.”
몸은 치지만 그의 목숨만은 건드리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때 사탄이 어떻게 합니까? 7절 말씀입니다. “사탄이 이에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서 욥을 쳐서 그의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종기가 나게 한지라.”
욥에게 악창이 들끓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죠. 그런데 그 고통이 얼마나 극심한지 8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재 가운데 앉아서 질그릇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더니.”
살갗이 벗겨지는 피부암이 발생한 것이죠. 그 때문에 지그릇 조각 곧 기와 조각으로 빡빡 긁고 있는 상황입니다. 마치 신약시대 문둥병자가 사회생활을 하지 못한 채 격리된 모습과 같은 격이죠.
그런데 욥의 아내가 어떻게 합니까? 그런 처참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욥을 비난하고 나서죠. 그렇게 할 바엔 차라리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말이죠.
이때 욥이 어떻게 대합니까? 본문 10절입니다. “그가 이르되 그대의 말이 한 어리석은 여자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하지 아니하니라.”
이 대답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이것은 어제 대답한 것과 똑같은 고백이죠. “주신 이도 여호와시오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받으실지니이다.”(1:21)하는 것 말입니다. 짐승과 소유물들, 심지어 자식들까지 모두 압사당한 상황에서도 신앙심을 잃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자기 몸에 악창이 들끓어 질그릇 조각으로 긁고 있는 상황이죠. 그 속에서 아내가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말하는 상황이죠. 그런데 그때도 욥은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의지하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이 본문 11절입니다. “그 때에 욥의 친구 세 사람이 이 모든 재앙이 그에게 내렸다 함을 듣고 각각 자기 지역에서부터 이르렀으니 곧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수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소발이라 그들이 욥을 위문하고 위로하려 하여 서로 약속하고 오더니.”
욥의 세 친구가 욥을 위로하려고 찾아오는 모습이죠. 여기에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나오는데, ‘데만’이라는 곳이 에돔에 있는 ‘데만’ 또는 아라비아에 있는 데마일 것으로 추측을 하죠. 그리고 엘리바스(Eliphaz)라는 이름이 창세기 36장 4절과 11절에 에돔족의 이름으로 나온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엘리바스는 에돔 족의 후예로서 욥의 세 친구들 가운데 가장 연장자이지 않냐,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죠. 그의 이름이 맨 처음 언급돼 있고, 다른 친구들보다 가장 길게 말하고 있고, 또 하나님께서도 나중에 그 세 명의 친구들을 거론하면서 이야기할 때 이 엘리바스를 대표자로 언급(욥42:7)하는 것들을 봤을 때, 아마도 세 친구들 가운데 가장 연장자이지 않나 생각할 수 있는 것이죠.
그리고 나오는 사람이 ‘수아’사람 ‘빌닷’이죠. 빌닷은 ‘수아’의 혈족관계이지 않나 생각들을 합니다. 왜냐하면 창세기 25장 2절에 아브라함이 후처로 그두라를 들이는데, 그로부터 태어난 막내 아들이 바로 ‘수아’라는 이름이기 때문이죠.
그리고 세 번째 친구, 곧 ‘나아마’ 사람 ‘소발’이 등장합니다. 이 소발이라는 사람은 유대 지역에 살고 있던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 15장 41절에 이스라엘의 자손들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분배할 때 유다 지파의 후손들이 그 땅에 정착했기 때문이죠. 아마도 그 유다 지역의 나아마 사람이 소발이 아닐까 생각들을 하죠. 그런가 하면 다른 학자들은 창세기 36장 11절을 들면서 소바는 에서의 후예일 것으로 생각도 합니다.
이들이 다 출신지가 다르다 해도, 욥이 살고 있는 그곳과 그리 멀리 떨어진 출신지는 아닐 것이며 설령 먼 거리에 살고 있어도 그들 세 사람이 욥과 친구의 우정을 쌓고 있었고, 서로 간에 아픔을 당했을 경우 위로하러 찾아온 벗들이죠. 내가 아프거나 고통에 처했을 때 위로차 찾아오는 친구가 있다면 얼마나 복된 사람이겠습니까?
본문 12-13절에 보면 그들 세 친구가 어떻게 대하는 태도가 나오죠. “눈을 들어 멀리 보매 그가 욥인 줄 알기 어렵게 되었으므로 그들이 일제히 소리 질러 울며 각각 자기의 겉옷을 찢고 하늘을 향하여 티끌을 날려 자기 머리에 뿌리고 밤낮 칠 일 동안 그와 함께 땅에 앉았으나 욥의 고통이 심함을 보므로 그에게 한마디도 말하는 자가 없었더라.”
그들 세 명의 친구들은 욥이 욥인 줄 모를 정도로 변해 있었다는 것이죠. 그만큼 몰골이 말이 아닌 것이죠. 그래서 일제히 소리 질러 울고, 각각 자기 겉옷을 찢었죠. 겉옷을 찢었다는 것은 마음의 애통하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하늘을 향해 티끌을 날려 머리를 뿌렸다, 욥의 상태가 비참하게 내려간 것을 아파하는 모습입니다. 더욱이 7일 동안 함께 앉아 있으면서 한 마디도 말하는 자가 없다고 밝혀줍니다. 누군가 고통에 처했을 때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 것, 이것이 그 당대의 관습이기도 했을까요? 너무나도 혹독한 시련에 처해 있을 때 그 어떤 말보다 묵묵히 함께 하는 것만으로도 큰 위로가 되겠죠. 그것도 7일간 잠잠히 기다린 것이죠.
오늘 이와 같은 말씀을 통해 성령님께서 깨닫게 하시는 음성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사탄의 세력이 위대한 것 같아도 지극히 하나님의 통제권 속에 있는 제한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죠. 그런 세력들이 흔들어대도 결코 흔들리지 않는 신앙심을 지키는 게 중요한 것이죠. 고난과 고통이 닥쳐올 때 그것을 이겨낼 수 있는 것은 골고가 언덕을 오르신 예수 그리스도를 묵상하는 것이죠. 왜냐하면 히브리서 2장 18절에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 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 아울러 누군가 고통에 처할 때 그를 찾아가 위로해 줄 친구가 있다면 복 있는 자요, 그 고통 속에 그 어떤 말보다 묵묵히 함께 해 주는 것으로도 큰 위로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친구는 우리 구주 예수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길 바랍니다.
*사랑하시는 주님. 인생을 살면서 크고 작은 고통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는 게 당연한 일 아니겠냐고 받아들이는 신앙심을 견지하게 해 주시옵소서. 그때 속에서 골고다 언덕에 오르신 주님을 바라보게 하시옵소서. 누군가 고통에 처할 때 위로하는 것보다 더 큰 중보자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진정한 친구는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음을 잊지 않게 하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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