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부터 이제 욥기서를 읽어나갈 차례입니다. 이 욥기서의 배경은 어느 시대일까요? 욥기서는 족장시대, 곧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같은 족장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175세, 이삭이 180세, 야곱이 147세를 살았는데, 욥은 140년을 살았다고 욥기서 42장 16절에 기록해주고 있죠. 그만큼 욥도 족장시대의 인물로 긴 수명의 삶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더욱이 욥기서 42장 11절, 욥이 모든 고난과 고통의 터널을 지나 하나님께서 갑절의 복을 내려주시는데, 그 때 사용된 화폐 단위를 ‘게쉬타’라고 칭하는데, 실은 그것이 족장시대에 쓰인 화폐 단위였다는 점이죠.
그렇다면 욥기서를 누가 기록했겠는가? 실은 정확하게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몇 사람들을 추측하기도 합니다. 족장시대의 욥이 다른 사람들과 대화한 이야기를 통해 자기 자신이 겪은 바를 기록했을 것을 내다보는 것이죠. 그래서 욥이 썼거나 욥과 토론을 벌인 세 명의 친구들보다 더 지혜로운 엘리후가 쓰지 않았을까 추측을 하죠. 또 다른 학자들은 욥기서를 모세가 기록했다고 추측을 합니다. 이유인 즉 시리아 역본 성경에 신명기 즉 모세오경 다음에 욥기서가 등장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욥기서가 시로 구성돼 있으니 잠언과 전도서와 아가서를 기록한 솔로몬이 쓰지 않았을까, 추측을 합니다. 또 다른 학자들은 예루살렘의 히브리어와 함께 아람어에도 능통한 에스라 같은 사람이 쓰지 않았을까 추측을 합니다.
그렇다면 이 욥기서는 어떻게 구성돼 있을까요? 우선 1-2장은 서론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여기에는 욥의 특징과 그가 겪고 있는 고난에 대해서 밝혀주고 있습니다. 본론 부분은 3:1-42:6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3장에는 욥의 개인적인 고난 즉 태어나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과 태어날 때 차라리 죽었으면 하는 바람 그리고 지금 죽었으면 하는 바람 등이 기록돼 있고, 4-14장까지는 욥과 세 명의 친구들에 대한 첫 번째 발언들, 15-21장까지는 욥과 세 명의 친구들 간에 두 번째 발언들, 22-27장까지는 욥과 세 명의 친구들 간에 세 번째 발언들이 이어지고 있고, 28-31장까지는 막간이고, 32-37장까지는 엘리후의 네 가지 발언이 나오고, 38:1-42:6절까지는 욥과 하나님에 대한 발언이 이어집니다. 그것이 본론에 나오는 말씀이라면, 결론 부분은 42:7-17절까지인데, 욥의 친구들에 관한 부분과 욥의 행복에 대해서 알려주면서 끝을 맺습니다.
그렇다면 욥기서를 통해 전해주시는 메시지가 무엇일까요? 욥이 당하는 고통 속에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발견하는 것, 누가 봐도 그것이 메시지라고 생각할 수 있죠. 의로운 사람에게도 얼마든지 하나님께서 고통을 허락하실 수 있다는 점 말입니다.
그런데 또 다른 점도 있습니다. 욥에게 고통을 가져다 준 게 사단인데, 욥은 그 존재와 활동에 대해 전혀 인식하지 못했다는 점이죠. 왜 욥은 사단의 존재에 대해서 몰랐을까요? 그가 무지해서 그런 걸까요? 아닙니다. 욥기서에 등장하는 욥과 사단의 관계를 그렇게 설정해 준 이유가 있습니다. 욥이 모든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붙잡고 나아갈 때, 더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매달릴 때 하나님께서 사단의 존재와 활동을 몰라도 그 모든 것들을 물리쳐주신다는 점입니다. 그렇기에 아무리 사단이 능력이 있고 대단한 활동력을 발휘한다 해도 우리가 해야 할 바는 하나님의 장중 안에 더욱더 붙들리는 것, 그것을 일깨워주고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 중요한 메시지가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을 향해 언제 어디서나 어떤 상황 속에서도 신실하게 섬길 수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욥이 부하고 성공하고 존경받던 그 시절에 하나님을 올곧게 섬겼는데, 그가 재산과 자식 다 잃고 완전히 추락한 그 상태에서, 친구들마저 멸시하고 조롱하던 그 상황에서도, 욥은 변함없이 하나님을 섬겼다는 점이죠. 그렇기에 하나님께서 부와 물질과 명예를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게 아니라, 아무런 것이 없는 상황에서도, 뭔가 보상 받지 않았을지라도, 다 잃고 사라져갈지라도, 그런 상황속에서도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길 수 있는가, 그것을 우리에게 깨우쳐주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하나 더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 어떤 인간도 공의롭지 못하다고 불평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욥기서 마지막 부분에 욥과 대화하시는 하나님께서 상세하게 깨우쳐 주시고 있습니다. 그래서 욥이 아무리 의롭고, 친구들이 욥의 불의함을 꾸짖을 때 욥은 의롭다고 항변하는데, 사람은 다들 자기 관점으로 상대방을 평가하고 또 자기 자신은 자기 자신의 관점으로 자신의 의로움을 항변한다 해도, 모두들 상대적이기 마련이요, 절대적인 공의로운 기준은 오직 하나님에게 달려 있다는 것, 이것을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오늘 1장 1절에 욥이 어떤 사람인지 밝혀주고 있습니다. “우스 땅에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우스’(Uz)는 보통 티그리스 유프라테스와 사해바다 사이에 낀 지역을 일컫습니다. 그 땅에, 욥이 살고 있는 셈이죠. ‘욥’(אִיּוֹב)이란 이름은 ‘미워하다’ ‘혐오하다’는 뜻입니다. 어쩌면 그것은 본래 이름보다는 그가 재산과 자식을 잃고 발바닥에서부터 정수리까지 종기가 나서 질그릇 조각으로 긁고 있는 상태를 칭해 부른 별명이지 않나 싶습니다.
그런데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가? 온전한 사람, 정직한 사람, 하나님을 경외한 사람, 그리고 악에서 떠난 사람이었죠. ‘온전하다’는 말은 ‘완벽을 추구하다’는 뜻이고, 정직하다는 말은 ‘올곧다’는 뜻이고, 하나님을 ‘경외하다’는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다’는 뜻이고, ‘악에서 떠난 자’란 ‘악한 행동을 거절하고 멀리하는 자’란 뜻입니다. 한 마디로 욥은 ‘흠잡을 데 없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그에게 얼마만큼의 소유가 있었는가? 7명의 아들과 3명의 딸이 있었고, 양이 7천마리, 낙타가 3천마리, 소가 5백겨리 곧 천마리, 당나귀가 500마리, 그리고 그 많은 짐승 떼를 돌볼 종들도 엄청났죠. 3절 마지막 절에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훌륭한 자라”하고 평가하고 있죠. 그만큼 하나님도 잘 섬기고, 정직하고 올곧고, 악한 행동을 따르지 않고, 또 자식도 많고 소유물도 엄청났으니, 다들 그렇게 존경하고 의롭다고 평가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죠.
그런데 그것으로 끝인가? 아니죠. 평소 그가 하나님 앞에 어떤 삶을 사는지, 5절에서 보여주고 있죠. 잔치가 끝나면 자식들을 불러다가 번제를 드린다고 밝혀주죠. 혹시라도 잔치를 통해 부지중에 하나님의 이름에 망령되이 일컫는 일은 하지 않았는지, 하나님의 이름에 누가 되는 것은 하지 않았는지, 그런 죄까지 생각하며 제사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5절 끝부분에서 “항상 이러하였더라.”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퍼펙트한 사람, 완벽한 의를 추구하는 사람임을 알수 있죠.
이상이 욥에 대한 특징입니다. 누가 봐도 의인 중에 의인이죠. 그런데 욥기서 42장 5-6절을 보면, 욥이 고통의 터널을 통과한 후에 하나님과 대화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때 욥은 스스로의 의로움을 하나님께 항변하죠.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것마저 어리석은 생각이라고 그를 깨우쳐 줍니다. 그게 과연 무슨 의미일까요? 나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완벽을 추구하고, 의롭게 살고, 악한 행동을 좇지 않는, 어떻게 보편 시편 1편 1절의 삶을 철저하게 살아가지만, 그것마저도 하나님 앞에 자랑할 게 못 된다는 점입니다. 바꿔 말해 남들보다 죄를 덜 짓는 것 같고, 더 열심히 예배생활하고 기도생활을 하고, 좀 더 나누고 베풀고 선교하는 것 같아도, 그래서 남들에게 칭찬을 받아도, 그것이 상대적인 의가 될지 몰라도 하나님의 절대적인 기준에 비추면 은혜라는 사실 말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렇게 고백했죠. “나의 나 된 것은 주님의 은혜라”(고전15:8) 그만큼 당연하다고 생각한 모든 것들이 실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도 그런 은혜 속에 사는 자들인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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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시는 주님. 족장시대에 활동했던 욥, 140년을 살았고, 7명의 아들과 3명의 딸들을 두고서 엄청난 부귀를 누렸던 욥, 그러나 온전하고 정직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악한 행동을 멀리했던 욥이었습니다. 누가 봐도 의인이라 칭할만 하고, 자기 자신도 완벽을 추구하는 삶을 살았던 욥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훗날에 하나님 앞에 자기 자신의 의로움을 비춰봤을 때 아무런 것도 아님을, 주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아무 것도 아님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저희들이 내세울만한 열심과 자랑거리들이 있습니까? 그것들조차도 주님의 은혜임을 고백하길 원합니다. 우리의 열심도, 우리의 기도도, 우리의 신앙심도, 우리의 온전함도, 모두 주님의 은혜임을 고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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