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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묵상DewSermon/욥

품꾼의 날과 같지 아니하겠느냐(욥7:1-21)

by 똑똑이채널 2022. 1.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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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곧 에돔 족속의 현자에 속한 엘리바스가 자기 친구들과 함께 욥을 위로하러 왔다가, 고난 당한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면서 오히려 욥을 비판하고 정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유 없이 고난 당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한 사람도 없다는 지극히 기계적인 인과응보식의 논리였죠. 그러니 하나님의 징계를 달게 받아야 하고,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도 아프게 하시다가도 싸매시는 분이고, 또 상하게 하시다가도 그의 손으로 고쳐주시는 분이다, 라고 욥에게 이야기했죠.

하지만 고통당하고 있는 욥에게 데만 사람 곧 지혜자 엘리바스의 이야기는 결코 위로와 격려가 되지 못했습니다. 그의 주장, 그의 논리, 그의 지혜가 틀린 게 아니라 일반적인 시각에서 맞는 말이지만, 지금 극심한 고통에 처한 욥에게는 그런 주장이 귀에 들어올 리 만무합니다.

왜냐하면 욥이 어떤 잘못이나 죄악으로 인해 징계나 고통을 받는 게 아니라, 까닭없이 고통을 겪고 있기 때문이죠. 이른바 까닭 없이도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는지, 사단이 그 모든 재앙을 몰고 왔고 하나님께서도 그것을 허락하셨기 때문에, 욥은 지금 원인도 모른 채 고통의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죠.

그런데도 지혜자로 자처한 엘리바스, 다른 친구들보다 연장자 격에 해당하는 엘리바스, 그 중에서도 연륜이 깊다는 엘리바스는 욥의 모든 상황을 인과응보식으로 판단하고 있는 것이죠. 욥이 하나님 앞에 죄악을 범했기 때문에 고통을 당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말한다고 해도 욥에게 위로가 되는 게 절대 아닌 것이죠.

 

그래서 욥이 변론하는 이야기가 무엇이었습니까? 너희들이 나를 위로하러 왔다면, 내가 아무리 하나님 앞에 잘못을 저질렀다 해도 나를 비판하고 정죄할 게 아니라, 우선 위로하고 동정해줘야 하는 게 옳지 않느냐, 그것이 긍휼어린 마음을 품은 친구들이 해야 할 모습이지 않느냐, 하고 항변했죠. 더 나아가 너희들이 나를 그렇게 비판하는 이유는 혹시라도 엉뚱하게 이야기했다가는 하나님의 재앙이 너희들에게 임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그렇게 나를 매도하고 있는 것 아니냐, 하고 이야기했죠. 그러니 진정으로 나의 허물을 깨우쳐 준다면, 내게 납득이 되게 이야기한다면, 내가 경청하고 잠잠할 테니, 제발 그렇게 이야기 하려거든 차라리 입을 다물고 있으라고 말한 것이죠.

이를 통해 우리는 진정한 위로자, 진정한 격려자가 누구인지 생각해 봤죠. 고통당하는 이를 위해 날카롭고 예리한 칼을 들이대는 자가 아니라, 함께 아파하고 함께 괴로워하는 마음과 자세를 갖는 게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했죠. 그래서 엘리사가 죽은 수넴 여인의 아이에게 냉랭한 신앙의 지팡이만 들이대게 한 게 아니라 자기 몸을 그 아이 위에 포갤 수 있는 마음과 자세, 곧 긍휼과 자비의 마음을 품는 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임을 생각해 봤습니다. 그런 마음과 자세를 지닌 우리를 도구삼아 성령님께서 직접 위로자요 격려자로 일하시기 때문에 그렇다고 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어제에 이어 계속해서 욥이 자기 주장을 펴는 이야기입니다. 친구들의 비난 곧 데만 사람 엘리바스의 비난에, 욥은 자신이 당하고 있는 현재의 고난에 대해 조금도 숨기지 않고 자신의 상태에 대해 정직하게 토로하며 고통의 심각성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 고난에 대해 욥은 종이나 품꾼이 하루 정해진 노동량을 묵묵히 감당해야만 하는 것과 같은 격이라고 말하죠.

본문 1-3절입니다. 이 땅에 사는 인생에게 힘든 노동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그의 날이 품꾼의 날과 같지 아니하겠느냐. 종은 저녁 그들을 몹시 바라고 품꾼은 그의 삯을 기다리나니 이와 같이 내가 여러 달째 고통을 받으니 고달픈 밤이 내게 작정되었구나.”

고대 히브리 사회는 품꾼의 노동 시간이 엄격하게 규정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날이 밝거나 해가 뜰 때 일을 시작하여 해가 질 무렵에 일을 마쳤습니다. 그러기에 품꾼에게 있어 해가 저무는 것은 단순히 일의 종결 시간을 뜻하는 것 외에 고역으로부터 해방되어 안식이 시작되는 것임을 알리는 것이기도 했죠.

욥은 고난의 때가 속히 끝나기를 바라는 자기 심경을, 노동 시간이 속히 끝나기를 간절히 바라는 품꾼의 심경에 비유한 것이죠. 또 욥의 몸에 퍼진 피부병은 밤에 더욱 기승을 부리기 때문에 욥이 밤만 되면 불면증으로 시달려야 했던 것이죠. 그 기간이 여러 달째 계속되고 있고, 그래서 고통은 줄지 않고 있고, 희망 없는 깊은 절망만, 무가치한 시간만 축내고 있는 것과 같다는 고백입니다.

 

제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입시험에 낙방하고, 알 수 없는 불면증에 시달려야 했던 몇 개월의 삶이 있었습니다. 밤에 잠이 오지 않아,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낮에는 해롱해롱 충혈된 눈으로 힘없고 기운 없이 지내다가, 밤이 되면 또 불면증에 시달려야 했던 3∼4개월의 삶이 있었죠.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 기간을 견디고 이겨냈을까 싶습니다. 그때는 하루하루 사는 게 정말로 고통이었고 괴로움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그냥 미쳐버리고 싶은 날들이었죠.

그때 그 불면증을 어떻게 이겨냈을까 생각은 해 보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특별한 처방전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약을 먹었던 것도 아니었으니 말이죠. 그게 수개월 진행되다가 어느 날부터 서서히 해방되는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지나놓고 보니, 끝날 것 같지 않은 그 불면증의 나날이었지만 어느 날 갑자기 해방된 것이었죠. 모두가 주님의 은혜라고 고백하는 것 외에 달리 설명할 길이 없었습니다.

 

지금 욥이 그런 고통을 토로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아니 불면증보다 훨씬 더 깊은 고통이죠. 악창으로 인해 피고름이 나는 상황이고, 밤에는 잠도 못 이루는 고달픈 밤 들을 맞이하고 있는 격이죠. 그것도 몇 달째 계속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 고통이 얼마나 극심했던지, 15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러므로 내 마음이 뼈를 깎는 고통을 겪느니 차리라 숨이 막히는 것과 죽는 것을 택하리이다.”

한마디로 말해 죽음만이 이 극심한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출구라는 이야기죠. 오죽했으면 침을 삼키는 것조차도 너무너무 괴롭다고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그것이 19절에 나옵니다. 주께서 내게서 눈을 돌이키지 아니하시며 내가 침을 삼킬 동안도 나를 놓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리이까”.

침을 삼킬 아주 짧은 시간조차 고통을 겪고 있는데, 왜 그런 무거운 짐을 내게 주시는 것입니까, 하면서 탄식하는 것이죠. 그러면서 20절에 하나님을 향해 그렇게 묻고 있죠. 사람을 감찰하시는 이여 내가 범죄하였던들 주께 무슨 해가 되오리이까 어찌하여 나를 당신의 과녁으로 삼으셔서 내게 무거운 짐이 되게 하셨나이까.”

그렇게 욥이 낮에는 악창으로 기와 조각으로 빡빡 긁고 있고, 밤에는 뜬눈으로 지새우며 탄식하는데, 그렇게 하나님 앞에 간구하며 기도해도, 하나님은 뭐라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니죠. 당신이 정한 기간 안에는 절대로 응답하지 않는 하나님이시죠. 욥이 그 극심한 고통 속에서, 차리라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는 그 고통 속에서, 하나님 앞에 절규하고 탄식해도 하나님은 여전히 침묵하고 계십니다. 어쩌면 그 침묵하시는 하나님의 침묵하심에 욥은 더 고통스러웠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죽음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탄식하는 그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은 욥을 떠나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이죠. 하나님께서는 끝까지 욥을 지키시고 책임져주신 분이기 때문에 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분이 욥에게 친히 목자가 되시기 때문이죠. 방향을 알지 못하는 한 마리의 양, 먹을 것을 구하지 못하는 한 마리의 양, 자기 자신의 목숨을 지키지 못하는 한 마리의 양, 그런 양과 같은 존재가 실은 욥이죠. 그런 욥에게 하나님은 목자로서 서 계신 것입니다. 그렇기에 목자가 침묵하는 것 같아도 실은 양을 위해 침묵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충분히 감지할 수 있는 것이죠. 우리는 하루 하루 풀을 뜯어 먹는 양이요 그 양을 지키는 품꾼과 같을지라도 주님은 그 온 하루 동안에 동행하시는 목자라는 사실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무엇을 깨닫게 됩니까? 내 삶이 하루하루 품꾼과 같고 답답한 하루하루가 지속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침묵 속에서도 일하시는 주님이란 사실이죠. 목자 되신 주님의 침묵은 단순한 침묵이 아니라 우리에게 새길을 열어주기 위한 침묵임을 바라볼 수 있는 저와 여러분들 되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시간표

이 책은 지난 몇 년간 설교 말씀을 통해 나눈 예화다. 예화는 설교에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다. 말씀의 이론을 실제화할 수 있는 간증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예화는 설교에서 중요한 몫을 차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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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시는 주님.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인생의 위기가 올 때 하나님이 계시는가, 과연 나의 어려움을 해결해 주실 수 있는가, 그런 것에 초점을 둘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가 아플 때나 괴로울 때나 힘들 때도 우리 곁에 함께 하시는 목자이심을 믿습니다. 오늘도 목자이신 주님 앞에 한 마리의 순전한 양처럼 정금과 같은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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