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에게 고통과 괴로움은 이중 삼중으로 얽혀 있습니다. 재산과 자식들 다 잃었고, 자기 몸에 악창이 들끓고 있고, 자기 아내마저 반대편에 서서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비난하고 있고, 그리고 그의 세 친구가 찾아와 위로하고 격려하는가 싶었지만 실은 정죄하고 비판하는 모습이었죠. 그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거론하고, 공의로우신 하나님을 이야기하지만, 그래서 욥에게 죄악을 말하고 그 징계를 달게 받으라고 이야기하지만 그런 이야기들은 욥의 가슴만 더욱 후벼 팔 뿐이었죠. 그런 이야기들, 그런 충고들은, 기계적인 인과응보식의 논리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정말로 하나님을 바르게 이해하고 있다면, 그래서 하나님이 지으신 사람에 대한 이해를 같이 하고 있다면, 욥을 향해 결코 그렇게 공박하려고 들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기도 하지만 하나님은 긍휼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죠. 하나님은 인간의 죄에 대해 결코 용납지 않지만 동시에 그런 인간을 위해 당신의 독생자까지 아낌없이 내어주신 긍휼의 하나님이시죠. 그런 긍휼과 사랑의 하나님을 그들이 생각했다면 욥을 향해 함부로 정죄하고 비판하기보다 오히려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으로 욥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게 도리였죠.
그런 친구들의 정죄와 비판 앞에 욥의 고통은 더욱더 가중되겠죠. 그래서 욥이 뭐라고 고백을 합니까?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더라면, 태에서 차라리 무덤으로 옮겨졌더라면 좋았겠다고, 날것 그대로의 고백을 하나님께 드렸죠. 그것은 욥기서 3장에서도 그렇게 고백했고, 또 첫 번째 친구인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행한 논쟁에서도, 그리고 두 번째 친구인 수아 사람 빌닷과 나눈 논쟁에서도 고백한 바였습니다.
욥은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하나님의 징계를 달게 받으라고 말할 때 그렇게 이야기했죠. “내가 생명을 싫어하고 영원히 살기를 원하지 아니하오니 나를 놓으소서 내 날은 헛 것이니이다”(욥7:8)하고 말이죠. 또 수아 사람 빌닷이 욥을 공박할 때 욥은 그렇게 대답했습니다. “주께서 나를 태에서 나오게 하셨음은 어찌함이니까 그렇지 아니하셨더라면 내가 기운이 끊어져 아무 눈에도 보이지 아니하였을 것이라”(욥10:18)
그렇듯 욥은 차리라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차리라 태에서부터 무덤에 내려갔더라면, 차라리 지금 이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죽었다면, 좋았겠다고 고백할 정도였죠. 그런데 이 고백을 잘못 오해하면 마치 자기 자신을 저주하고, 그래서 자살하고 싶고, 더 나아가 자신을 지으시고 창조하신 하나님, 이 세상에 자신을 두신 하나님의 뜻마저 원망하고 저주하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는 점입니다. 욥은 결코 자살을 원하거나 자기 자신을 저주하거나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저주하는 게 결코 아니란 사실이죠. 욥은 자기 생명을 하찮게 여긴 사람이 결코 아닙니다. 그 고통이 너무나도 극심하기 때문에 차라리 태어나지 않음만 못하다는 것이지, 자기 생명 자체를 가볍게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욥이 괴로워했던 것은 그런 고통 중에 하나님께 부르짖고 아뢰어도 침묵하신 하나님 때문에 답답한 것이지, 결코 자기 생을 저주하거나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저주하고 원망한 게 아니었다는 사실이죠.
이것은 우리가 욥과 같은 고난에 직면했을 때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아무리 나에게 고난과 고통이 극심하다고 할지라도 나의 생을 비관해서 자살하려 하거나, 나를 지으신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하는 어리석은 행위는 삼가야 하는 것이죠. 내 고통이 너무 극심하고, 주변 사람들까지 나를 비난하고 정죄할지라도, 그 속에서 하나님께 부르짖는데 침묵하실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분명코 새로운 길을 내시고 계신다는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죠. 욥의 중심에 그것이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욥의 세 번째 친구 곧 ‘나아마’ 사람 ‘소발’이 욥을 공박합니다. ‘나아마’ 지역이 어디인지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소발’이라는 사람에 대해 여호수아 15장 41절을 보면 유다 지파에 속한 사람이 아닐까 추정하기도 합니다. 또한 창세기 36장 11절을 보면 에서의 후예일 것으로 추정하기도 하죠. 어쨌든 소발은 이스라엘 족속과 그리 멀지 않는 혈족 관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소발이 하는 이야기가 무엇입니까? 소발은 말이 많은 사람이 어찌 의롭게 여김을 받겠느냐 하면서, 자신을 깨끗하다고 하는 욥에게 회개를 촉구하죠. 특별히 오늘 본문 중에 소발이 욥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말하는 부분은 이 말씀의 백미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본문 5∼9절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내시며 너를 향하여 입을 여시고, 지혜의 오묘함으로 네게 보이시기를 원하노니 이는 그의 지식이 광대하심이라. 하나님께서 너로 하여금 너의 죄를 잊게 하여 주셨음을 알라. 네가 하나님의 오묘함을 어찌 능히 측량하며, 전능자를 어찌 능히 완전히 알겠느냐. 하늘보다 높으시니 네가 무엇을 하겠으며, 스올보다 깊으시니 네가 어찌 알겠느냐. 그의 크심은 땅보다 길고 바다보다 넓으니라.”
소발이 욥에게 이야기하는데 그가 하나님을 어떤 하나님으로 밝히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오묘하신 하나님’이라고 말하고 있죠. 그의 말처럼 하나님은 실로 ‘오묘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오묘하신 하나님은 그 지식이 광대하시고, 오묘하신 하나님은 그 누구도 측량할 수 없는 분이시고, 오묘하신 하나님은 누구도 완전히 알 수 없는 분이시죠. 오묘하신 하나님은 하늘보다도 높고 스올보다 깊으시며, 오묘하신 하나님은 땅보다 길고 바다보다 넓으신 분이십니다.
이는 이사야 55장 8∼9절을 통해 밝혀주는 말씀과 같습니다.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더욱이 예레미야 29장 11절은 이렇게 말씀하죠.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무엇을 일깨워주는 말씀입니까? 지금 상황이 절망 같고 현실이 암울한 것 같지만, 그러나 내 백성 곧 하나님의 자녀를 향한 하나님의 생각은 재앙이 아니라 평안을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미래와 희망을 주기 위함이라는 것이죠. 그것이 하나님의 높으신 생각이요, 그것이 인간을 향한 오묘하신 하나님의 섭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오묘하시기에 피조물인 인간은 하나님의 뜻을 판단할 권한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한 사람의 생을 어떻게 인도하시는지 그 방법도 알 길이 없죠. 자신의 짧은 인생 경험과 티끌 같은 지식으로 이웃의 상황을 판단하고 규정하는 것 자체가 오묘하신 하나님의 뜻을 믿지 못하는 것과 다르지 않죠.
요셉의 모습이 그렇죠. 17살의 나이에 요셉은 노예로 살다가 억울한 누명을 쓰고 옥살이를 하게 되죠. 그것을 누가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그런데 감옥에 갇힌 현실만 보면 모두가 요셉을 죄인으로 정죄하고 비난할 수밖에 없죠. 하지만 오묘하신 하나님은 사람이 생각할 수 없는 방법으로 요셉의 생을 붙들고 계셨습니다. 결국 요셉의 13년 종살이와 옥살이 끝에 그의 인생을 애굽의 총리로 회복시켜 주셨죠.
욥의 고난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오묘하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고난이기에 그 누구도 오묘하신 하나님의 깊으신 뜻을 알 수가 없는 것이죠. 그것은 본문의 소발도 마찬가지입니다. 소발이 자기 입으로 오묘하신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면서도, 욥의 고난과 절규에 대해 자기 생각 자기 판단으로 규정하지 않습니까? 소발은 욥의 고난과 절규를 하나님의 신비한 영역에 맡겨드리지 못한 것이죠. 오직 자기 경험과 자기 지식을 그 광대하고 넓으신 하나님보다 앞세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랬기에 소발의 고백은 믿음의 고백이나 믿음의 삶과 연결될 수 없는 것이죠.
오늘 우리도 하나님에 대한 위대한 고백들을 하며 살아가죠. 하나님은 광대하신 하나님, 신실하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내 인생의 목자이신 하나님이라고 말입니다. 그런 거대한 고백을 쏟아내긴 하지만 그 말들이 한낱 소리에 그치지 않는지 돌아보게 되는 것이죠. 그만큼 나의 신앙적인 지식과 경험으로 그 깊으신 하나님의 뜻을 함부로 판단하고, 내 이웃들까지 그렇게 판단하는 소발과 같은 사람은 아닌지 말입니다. 우리는 그런 소발과는 달리 정말로 오묘하신 하나님의 신비한 영역들을 온전히 믿음으로 내어맡기며 살아가는 하루의 삶이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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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시는 주님. 오늘도 오묘하신 하나님께서 온 우주를 움직이셔서 저희에게 새날을 주신 줄 믿습니다. 저희의 짧은 경험과 티끌 같은 지식으로 하나님을 판단하고 규정한 죄악을 용서해주시옵소서. 그 깊으신 하나님의 뜻뿐만 아니라 어려움에 빠져 있는 사람들까지도 판단하고 정죄했다면 더욱더 용서해주시옵소서. 앞으로는 오묘하신 하나님의 신비한 영역들을 더욱더 존중하며 살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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