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어계시는 하나님’(Deus Absconditus), 사람의 이성과 오감으로 전능자 하나님을 온전히 알 수 없다는 개념이었습니다. 숨어계시는 하나님은 신비이며, 예측 불가능성이죠. 인과응보를 넘어서시는 하나님이시죠. 그 하나님을 욥은 고난 속에서 찾아내게 됩니다. 그리하여 자신의 억울함을, 자신이 당하는 고난의 부당함을, 전능자이신 하나님 앞에 말씀드리죠. 그를 통해 정직한 믿음, 순전한 믿음을 발견하게 되고, 끝내는 숨어계시는 하나님을 깨닫게 되죠. 고난의 터널을 지나 숨어계신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는 그 하나님께서 욥에게 찾아와 말씀해주시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는 욥의 세 친구들 가운데 세 번째 사람 곧 ‘나아마’ 사람 ‘소발’이 한 이야기에 욥이 항변한 내용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첫 번째 친구인 데만 사람 엘리바스는 물론이고, 두 번째 사람인 수아 사람 빌닷도 그렇고, 세 번째 사람인 나아마 사람 소발도 다 한결같았죠. 이유 없이 고난당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한 사람도 없다는 논리입니다. 다들 인과응보식의 견해를 피력했고, 그러니 욥이 고통당하는 것은 하나님의 징계라는 차원이었죠. 그래도 욥은 예외라는 게 있지 않겠느냐고, 자기처럼 거짓 없는 믿음의 삶을 살았고, 온전히 하나님을 경외한 사람을, 똑같이 매도해서는 안 되지 않냐고, 항변했죠. 무조건 세상 사람들처럼 자신을 똑같이 정죄하려고 들지 말고, 왜 이런 고통이 내게 임했는지, 너희들은 더 깊은 차원으로 나를 대해야 하지 않겠느냐 하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야기하는 첫마디도 그것입니다. 본문 1-2절입니다. “나의 눈이 이것을 다 보았고 나의 귀가 이것을 듣고 깨달았느니라 너희 아는 것을 나도 아노니 너희만 못하지 않으니라.”
너희가 보는 방식들이, 너희가 하는 이야기의 내용들이 인과응보식 관점인데, 그것은 나도 알고 있는 바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전혀 새로울 게 없는 것이고, 고통당하는 내게 위로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죠. 그만큼 잘못하면 벌을 받는다는 종교적인 틀 안에 너희들이 갇혀 있다는 뜻입니다.
본문 4-5절입니다. “너희는 거짓말을 지어내는 자요 다 쓸모없는 의원이니라 너희가 참으로 잠잠하면 그것이 너희의 지혜일 것이니라”
욥은 자신이 당하고 있는 고통의 이유를 알 길이 없어서 너무나도 힘들어하고 막막해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그를 찾아와 위로해 주겠다는 그의 친구들은 정작 욥의 아픔에 동참하는 법을 모르고 있는 거죠. 그래서 그들을 향해 쓸모없는 의원이라고, 차라리 잠잠하게 있는 게 지혜로운 처사라고 말하는 거죠.
사실 많은 사람이 말로 위로한다는 고정 관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제한된 지식과 경험에도 불구하고 욥의 친구들처럼 자꾸 말로 표현하려고 하죠. 하지만 ‘때에 적절하지 못한 말’은 오히려 상대방의 가슴을 후벼 파는 말이 되고, 상대의 아픔을 더욱 가중시키는 꼴 밖에 되지 않죠. 그저 ‘침묵하며 함께 아파하며, 묵묵히 곁을 지켜주는 것’, 그것이 때로는 최상의 위로책이 될 수 있는 것이죠.
그처럼 친구들의 불필요한 말로 인해 더 큰 상처를 입게 된 욥은 이제 자신의 고통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을 나눌 대상을 찾게 됩니다. 왜냐하면 친구들과 함께하는 것이 더 이상 무의미한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이죠. 그래서 본문 3절입니다. “참으로 나는 전능자에게 말씀하려 하며 하나님과 변론하려 하노라”
친구들의 말보다는 ‘숨어계시는 하나님’을 찾으며 토로하겠다는 것입니다. 물론 욥의 마음 한구석에는 자기를 찾아와 위로해 주려는 친구들로부터 위안을 얻고 용기를 얻고자 하는 인간적인 기대가 있었겠죠. 하지만 그런 기대는 산산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처한 상황과 형편을 알아줄 수 있는 사람이나 친구는 아무도 없다는 걸 깨달은 것이죠. 그런 사실을 발견하게 된 순간, 욥의 시선이 숨어계시는 하나님, 그 전능하신 하나님께 향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 자신들도 살아가면서 다양한 문제들을 만나게 됩니다. 경제적인 문제라든지, 육체적인 문제라든지, 정신적인 문제라든지 말이죠. 그럴 때면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어려움에 봉착하게 되죠. 하지만 그들과 그리스도인인 우리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여러 가지 문제에 봉착했을 때 스스로 무언가를 해결하려고 애를 쓴다는 점이죠.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먼저 하나님께 도움을 간구한다는 차이죠. 더 나아가 세상 사람들은 도저히 풀 수 없는 방법 앞에 넋두리하고 한탄하며 술과 마약을 통해 위안을 얻고자 하죠.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더 미궁에 빠지는 게 세상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 자녀들은 그 문제 앞에 하나님 앞에 눈물을 흘리며 도움을 간구하죠. 그때 위로부터 평안과 위로를 얻게 된다는 것이죠.
욥이 친구들로부터 해결책을 받지 못해 전능하신 하나님께 간구하겠다는 것도 그런 차원이지 않겠습니까? 자기 자신의 부족함과 결핍을 채워주실 분은 오직 하나님밖에 없음을 알고 있기 때문에 말입니다. 자기 친구들이 아무리 많은 말로 문제의 원인을 밝혀낸다 해도 그것은 자기 고통만 가중시킬 뿐이요,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께 아뢰는 것이 진정한 위로와 격려를 받는다는 것 말입니다.
어떻게 보면 욥이 겪고 있는 고난은 그런 맥락에서 볼 때 영적인 유익을 가져다주는 통로였을 것입니다. 비록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의 삶을 살아왔지만, 하나님을 친밀하게 대면하는 자리가 부족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사단이 욥을 친다고 할 때 하나님께서 그것을 허락하셨는지 모르죠. 사단은 욥의 단면만 보고서, 다시 말해 욥이 까닭 없이 하나님을 섬기는 게 아니라 그에게 부귀영화를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라고 고소를 했습니다. 그래서 그를 치면 하나님을 저주할 것이라고 단정했죠.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부귀영화를 빼앗아도 하나님을 경외할 것이라고 말했죠.
그러나 그런 단면 이외에 하나님께서는 욥과 더욱더 깊은 대화, 욥이 하나님께 친밀하게 다가올 수 있는 기회를 만드시고자 그런 고난의 길을 허락했을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사단도 그렇고, 실은 우리들도 그렇고, 대부분의 인간이 다 그렇지 않습니까? 인간의 한 단면만 보려고 하는 모습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다방면으로 인간을 헤아리는 분이심을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이죠.
그렇게 하나님께 더욱더 친밀하게 다가서겠다는 욥이 하나님께 두 가지 것을 간구합니다. 본문 20-21절입니다. “오직 내게 이 두 가지 일을 행하지 마옵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얼굴을 피하여 숨지 아니하오리니 곧 주의 손을 내게 대지 마시오며 주의 위엄으로 나를 두렵게 하지 마실 것이니이다”
첫 번째는 하나님의 손을 자신에게서 거두어 달라는 것입니다. 자신을 억누르는 고통의 멍에를 벗겨 달라는 간구죠. 두 번째는 자신을너희는 거짓말을 지어내는 자요 다 쓸모없는 의원게 하는 공포감을 제거해 달라는 간구입니다. 너무 고통이 심하니까 그 고통 속에 죽을 수도 있다는 그런 두려움과 공포감을 없애 달라고 하는 기도죠. 그야말로 순전한 기도 아닙니까?
그렇게 하나님께 친밀하게 다가서는 욥은 26절을 통해 그렇게 고백을 합니다. “주께서 나를 대적하사 괴로운 일들을 기록하시며 내가 젊었을 때에 지은 죄를 내가 받게 하시오며”
욥은 의롭고 순전하고 정직하고 악에서 떠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죠. 그런데 지금 고통을 당하는 게 혹시라도 젊은 시절에 지은 죄 때문이 아닌지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실은 모든 사람들의 반응이기도 하죠.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이런 모습이 있기 마련입니다. 내가 아무리 의롭게 살아도 혹시라도 어떤 실수나 죄로 인해 고통을 당하는 게 아닌지 하고 말이죠. 그래서 그런 것까지 더 깊이 뉘우치고, 다시금 돌아보는 계기가 된다면, 그 역시 친밀하신 하나님 앞에 더욱더 의롭고 깨끗하게 서는 계기가 될 수 있는 것이죠.
물론 하나님께서는 지난날에 죄를 고백한 것까지 들춰내시는 분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이런 내용을 기록한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이런 아픔과 어려움을 통해 하나님과 친밀해질 수 있는 영적인 발판을 삼도록 하는 것이죠. 욥이 이 과정을 통해 하나님 앞에 더 정직하고, 더욱 친밀하게 다가선다면 그것 자체로 하나님께서는 흡족해 하실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도 그런 과정이 생길 때 하나님과 더욱 친밀해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사랑하시는 주님. 오늘 우리가 겪고 있는 어려움과 아픔의 상황은 이전에 저희가 지은 죄에 대한 징벌이 아니라 하나님을 더 깊이 알도록 하는 영적 발판을 세워주시는 길인 줄 믿습니다. 현재의 고난은 오히려 우리의 협소한 지식이 확장되고 믿음이 진일보하는 영적인 학습장이 되는 줄 믿습니다. 그렇기에 어떤 절망 속에서도 소망을 잃지 않고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며 친밀해지는 저희로 삼아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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