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장이 무너진다”는 말이 있죠. 억장은 억장지성(億丈之城)의 준말입니다. 억의 수만큼 높이 쌓은 성을 의미하는데, 그렇게 애써 쌓은 성이 무너졌으니 그 슬픔이 얼마나 크겠는가, 하는 뜻입니다. 부모의 입장에서 억장이 무너진다는 표현은 사랑하는 자식에게 불행이 닥쳤을 때 사용하죠.
욥이라는 인물에 대해 욥기 1장 1절은 그렇게 평가해 주고 있었습니다.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하고 말이죠. 그 말은 일반 사람들의 평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기에도 온전하고, 정직하고, 악과 무관한, 그야말로 퍼펙트하게 하나님을 경외한 인물이었다는 뜻이죠. 하나님의 평이 그럴 진 데 일반 사람들은 얼마나 욥을 존경했겠습니까?
그처럼 하나님으로부터 무한 신뢰를 받을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의 귀감이 되고, 모든 사람에게 존경받는 욥에게 어느 날 환난 풍파가 몰아쳤죠. 재산 다 잃고, 10명의 자식이 비명횡사했으니 그야말로 “억장이 무너진다”는 표현이 맞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욥은 그런 상황인데도 하나님을 향해 원망하기보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으니 거두시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라면서 하나님을 신뢰하죠. 이유 없이도, 까닭 없이도,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을 경외할 줄 알아야 한다는 믿음의 본을 보여준 욥이었습니다.
그러자 욥을 시험해도 좋다는 하나님의 허락을 받은 사탄이 어떻게 합니까? 그에게 질병을 가져다주죠. 몸에 악창이 들끓는 고통, 이른바 피부암이라고 하는 질병이 그에게 발현된 것이죠. 그때 기와 조각으로 자기 몸을 박박 긁고 문지르고 있는 욥이었죠. 그때 욥을 향해 그 아내가 뭐라고 말합니까? ‘이 미련한 남편아 하나님을 욕하고 죽어버리라’하고 등을 돌려버렸죠.
그런 상황을 접할 무렵에 세 명의 친구들이 욥에게 다가왔죠. 욥이 겪고 있는 인생의 혹한기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그런 욥을 위로하고자 찾아온 친구들이었죠. 그런데 7일간 지켜보던 그 친구들이 그때부터 입을 열기 시작했죠. 데만 사람 엘리바스, 수아 사람 소발, 그리고 나아마 사람 소발이 차례대로 욥을 공박했죠. 그들은 욥이 너무나도 억장이 무너져, 자기 생일을 저주하고, 자신이 태어난 처지를 비관하자, 그때부터 욥을 공박하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욥의 그릇된 태도를 바로 잡아주고픈 그들의 마음이었습니다. 물론 그들은 욥의 그릇된 태도를 바로잡아 주고자 했지만 욥에게는 더 큰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들의 주장은 한결같았습니다. ‘아니 뗀 굴뚝에 연기 나겠느냐’하는 식이었습니다. ‘심은 대로 거둔다’는 그런 견해였죠. 하나님은 선인에게 상급을 주시고 악인에게 심판하시는 분이라는 것이었죠. 한마디로 말해 인과응보식의 잣대를 욥에게 들이댄 것이었죠.
세 명의 친구들이 욥을 향해 그렇게 공박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렇게 욥을 공박하면 욥이 수그러들고 하나님 앞에 잘못을 고할 줄 알았죠. 하지만 상황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욥은 그들이 말하는 모든 논리를 모르는 바가 아니라면서, 오히려 그렇게 말하는 그 친구들의 관점이 자기 자신을 더욱더 고통 속으로 몰아넣는 격이라고 비판했죠.
이상이 욥기서 1-14장까지 나온 내용입니다. 욥의 의로움을 소개하고 사탄이 욥을 시험하겠다고 하나님께 아뢰어 허락을 받아 시험을 했고, 그 속에서 욥은 흔들리지 않았죠. 그리고 3장에 이르러 자신의 처지를 욥이 비관하는 것 같고, 4장부터 세 명의 친구들이 찾아와 14장에 이르기까지 차례로 논박하고 반박하는 대화였죠.
그 속에서 우리가 몇 가지 정립한 게 있었습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도 때로는 의로운 사람에게 고통을 허락하신다는 것이었죠.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고통을 통해 하나님과 더욱 친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죠.
또 하나는 그것이었습니다. 사단이 아무리 능력이 있는 것 같고 대단한 존재인 것처럼 보여도 실은 하나님의 피조물일 뿐이라는 것이었죠. 사탄의 영향력은 언제나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허락 속에서 활동한다는 점이었죠. 그렇기에 우리에게 사탄의 세력이 닥쳐올 때 그런 상황에도 두려움 없이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점이었죠.
세 번째로는 욥이 재산과 소유물 다 잃고 자식들 잃고 몸에 악창이 들끓는 상황속에서도 취한 자세를 본받는 것이죠. 주신 자도 여호와시고 거두신 자도 여호와 하나님이시니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경배하는 삶의 모습 말입니다.
넷째로는 고통당하는 욥에게 찾아온 친구들의 태도를 통해 깨닫게 되는 부분이었죠. 누군가 고통을 당하고 어려움에 처할 때 가장 좋은 위로와 격려는 함께 아파하고 함께 우는 자세였죠. 그를 향해 정죄하고 비난하기보다 묵묵히 함께 아파하는 것 말입니다.
오늘 본문은 세 명의 친구들과 욥이 나눈 두 번째 대화가 시작되는 말씀입니다. 4-14장까지 세 명의 친구들이 욥과 대화하는 내용이 끝났고, 이제 두 번째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두 번째 시작된 세 친구와 욥의 대화 내용이 15-21장까지 이어집니다.
오늘 본문 10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중에는 머리가 흰 사람도 있고 연로한 사람도 있고 네 아버지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도 있느니라.”
세 친구 중에 가장 나이가 많은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나서서 한 말입니다. 한 마디로 욥은 자기에게 자식과 같다는 뜻입니다. 왜 그런 말을 하겠습니까? 자신이 바른 소리를 욥에게 해도 들으려고 하지 않는 태도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이겠죠. 한 마디로 말하면 그것이죠. ‘네가 스스로 지혜롭고 의롭다고 하지만 네가 하는 말들을 종합해볼 때 너는 결코 의롭지 않다’하는 뜻이죠.
그것을 25절에서도 말하죠. “이는 그의 손을 들어 하나님을 대적하며 교만하여 전능자에게 힘을 과시하였음이니라”
또 26절에서는 그렇게 말합니다. “그는 목을 세우고 방패를 들고 하나님께 달려드니.”
무슨 뜻입니까?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보기에 욥이 그렇게 하나님께 달려드는 태도와 같다는 뜻이죠. 고난을 당하고 있으면 자중해야 되는데, 그래서 친구들이 지적을 해 주면 달게 받아야 되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죠. 그래서 두 번째로 나서서 조목조목 따져 묻는 것이죠.
그렇다면 두 번째 대화의 첫 장을 연 엘리바스의 견해는 타당한 것입니까? 엘리바스의 두 번째 견해 역시 첫 번째와 똑같습니다. ‘악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론’을 욥에게 말하는 것이죠. 성경에서도 죄의 삯은 사망이라 말씀했습니다. 또한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거대로 거둔다”(갈6:7)고 했습니다.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약1:14)이라고 말씀하죠. 그런 관점에서 보면 엘리바스의 견해가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이 아무리 성경의 말씀에 입각해서 욥을 공박한다 해도, 욥이 왜 그런 고통에 처했는지 알고 있는 우리로서는, 그의 심판론에 100% 동의할 수가 없죠. 중요한 것은 엘리바스가 내세운 하나님의 심판론만 강조하면, 악인에 대한 형벌만 강조하다 보면 자칫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사랑에 대해서 놓칠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일깨워주시는 성령님의 음성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도 두 가지 균형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 하나님의 심판과 긍휼이라는 두 가지 입장에 늘 지니며 살아야 한다는 점이죠. 그만큼 하나님을 향한 시선과 함께 인간을 향항 시선을 동시에 지니고 살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어느 한쪽을 놓치면 한쪽 극단에 처하게 되죠. 많은 이단이 등장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한쪽 극단에 치우치기 때문이죠.
오늘도 하나님의 공의와 함께 하나님의 긍휼을 잊지 않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사랑하시는 주님. 연약한 저희를 내치지 않으시고 사랑으로 품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주님을 머리로만 아는 신학적인 삶이 아니라, 가슴으로 느끼고 품는 참된 실천적인 신앙인의 삶을 살게 해 주시옵소서. 주어진 상황과 현상만 보기보다 그 너머에 역사하시고 품으시는 주님을 사랑을 바라보며 살게 하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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