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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묵상DewSermon/욥

나의 증인이 하늘에 계시고(욥16:1-22)

by 권또또 2022. 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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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의 친구들은 고난을 당한 욥을 위로하겠다고 찾아왔습니다. 하지만 다들 자기 의에 사로잡혀 있었죠. 그래서 욥을 위로하지 못하고 오히려 더 큰 상처만 줬죠. 어제 말씀도 그랬습니다. 세 친구들과의 첫 번째 대화가 끝이 나고, 두 번째 대화의 장을 연 엘리바스였습니다. 그는 세 친구 중에 가장 나이 많은 연장자였고 가장 지혜롭다는 사람이었죠. 그런 그가 두 번째 대화를 시작하는 마당에서도 욥을 향해 정죄했죠. 이 모든 고난은 욥의 죄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에 대한 욥의 답변이 오늘 본문에 나와 있는 말씀입니다. 욥은 이렇게 대답을 해 나갑니다. 우선 본문 1-2절입니다. 욥이 대답하여 이르되 이런 말은 내가 많이 들었나니 너희는 다 재난을 주는 위로자들이로구나

여기에서 말하는 ‘이런 말’은 무슨 말이겠습니까? 의인이 상을 받고 악인이 벌을 받는다는 식의 말입니다. 기계론적인 인과응보식의 말이죠.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는 말입니다. 그런 말을 욥이 많이 들었다는 것이죠.

물론 그 말은 진리입니다. 갈라디아서 6장 7절에 그렇게 말씀하죠.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하나님께서 창조질서를 유지하는 원리 가운데 하나가 바로 선과 악에 대한 공의로움입니다. 악한 자는 벌하고, 선한 자는 상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더 나아가 어제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은 평등의 하나님이 아니라고 했죠. 사도 바울의 상급과 우리의 상급이 같을 수 없는 게 그것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은 심은 대로, 일한 대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 헌신한 대로 상급을 주시는 분이시죠. 목사라고 해서, 장로라고 해서, 상급을 많이 주는 게 아니라, 권사라고 해서, 집사라고 해서 상급을 적게 주시는 분이 결코 아니란 말씀이죠.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 심은 대로, 상급을 주시는 공의로운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그 원칙이 안 지켜진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는 점입니다. 바로 욥의 경우가 그렇죠. 지금 환난을 겪고 있는 수많은 의인이 처한 상황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환난을 당하는 그때는 그 원칙이 안 지켜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그 원칙은 공의로운 하나님의 창조질서 안에서 지켜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우리 인간이 보기에 하나님의 시간표를 알지 못한다는 데 있죠. 하나님께서 정하신 방법과 때에 인간이 행한 대로 보응하시는 분인데도, 인간은 당장 자기 시간표대로 하나님께서 움직여주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시간표대로 움직여주지 않을 때 그때 하나님께 화를 내기도 하고 실망에 빠지기도 하는 것이죠.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인간의 시간표대로 움직이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간표대로 움직이시는 분이란 사실입니다.

 

본문 2절을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이런 말은 내가 많이 들었나니 너희는 다 재난을 주는 위로자들이로구나

지금 욥은 그의 친구들을 향해 ‘재난을 주는 위로자’라는 말하고 있습니다.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위로한다고 온 친구들이 위로받아야 할 욥에게 위로는 안 되고 오히려 고통만 가중시킨다는 것이죠.

우리도 이런 경험을 한 적이 있지 않습니까? 누군가를 위로하기 위해 병원을 찾아갔는데, 분위기 파악은 못 하고 병상에 누워있는 환자를 더욱 힘들게 하는 경우 말이죠. 왜 그렇게 하는 것입니까? 자기 의에 사로잡혀 병상의 환자에게 함부로 말하기 때문이죠.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생각하지 못하고, 자기 판단만 늘어놓기 때문에 그렇죠.

욥의 친구들은 자신들이 어려움에 처하지 않은 이유가 자기들이 잘나서 그런 줄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괜찮은 것이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인데, 그 사실을 그들은 모르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자신들이 심판자가 되어 어려움에 처한 욥을 정죄하고 비판하는 것입니다.

 

이때 욥이 어떻게 합니까? 욥은 친구들에게 자기 생각을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독백을 하듯이 그런 고백을 합니다. 본문 6-7절입니다. 내가 말하여도 내 근심이 풀리지 아니하고 잠잠하여도 내 아픔이 줄어들지 않으리라 이제 주께서 나를 피로하게 하시고 나의 온 집안을 패망하게 하셨나이다

인간의 그 어떤 말도 위로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욥이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더 이상 친구들과 이야기하기보다는 하나님과 독대하는 게 낫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욥의 고백은 지극히 인간적인 한계를 지닌 고백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금 자신이 처한 재앙과 질병으로 자기 몸이 망가진 것은 자신이 악인이 되었다는 증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욥은 자신이 죄를 짓지 않았지만 자신에게 임한 고난으로 인해 그 모양이 마치 죄인이 받는 징계와 같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명코 욥에게 죄로 인해 고난을 당한다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욥은 사람들이 자신을 그렇게 바라보고 평가하기 때문에, 자기도 그런 하나님의 심판을 의식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정년 퇴임한 가장이 아내나 가족들이 어쩌다 퉁명스럽게 대하면, 자신이 돈을 벌지 못해서 그렇게 대하는 게 아닌가, 하면서 우울해하는 것과 같은 격입니다. 반에서 항상 선두를 다투다가 어쩌다 중간층으로 밀려난 아이가 있을 경우에, 친구들이 웃기라도 하면 그것이 마치 자기 자신을 향해 비웃는 것 같아 기분 나쁘게 여기는 것과 같은 격입니다. 욥은 분명코 하나님 앞에 죄를 지은 게 없고, 의로운 삶을 살았는데, 세 명의 친구들이 욥을 싸잡아 비난하기 때문에, 마치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해서 그런가, 하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고백합니까? 본문 9절입니다. 그는 진노하사 나를 찢고 적대시 하시며 나를 향하여 이를 갈고 원수가 되어 날카로운 눈초리로 나를 보시고

하나님은 한 번도 욥을 그렇게 보시지 않았지만, 욥은 친구들의 시선을 의식한 채 하나님도 자기 자신을 그렇게 보고 계신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실 심신이 건강하지 않으면 스스로 위축되고 의기소침하게 되죠. 몸 상태가 안 좋으면 누가 웃어도 자신을 비웃는 것 같고, 야단을 맞아도 자신만 더 크게 야단치는 것 같은 열등감에 빠지게 됩니다. 그만큼 우리는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할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믿음의 자녀들은 사람들의 의식을 너무 신중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의 평가보다 하늘 아버지의 평가에 달려 있기 때문이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인 우리를 비웃거나 업신여기거나 무시하지 않는 분입니다. 만일 그랬다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주시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존귀한 자들입니다.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 바로 그 증거죠. 그렇기에 우리는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사람들의 시선이 하나님의 시선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평가에 신경쓰고,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 길을 추구하는 시선을 견지해야 합니다.

 

본문 19절입니다. 지금 나의 증인이 하늘에 계시고 나의 중보자가 높은 데 계시니라

욥은 고난으로 인해 위축되고 의기소침했지만 이내 마음을 고쳐먹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증인은 하늘에 계시며, 자신을 돕는 자는 높은 데 계신다고 고백한 것이죠.

 

오늘 이와 같은 말씀을 통해 깨닫게 되는 바가 무엇입니까? 지금 내가 처한 고난을 이해할 수 없고, 그 어떤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는 상황에 처했을 때, 그때도 우리는 하나님의 시간표를 바라보며 기다려야 한다는 점입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선한 사람들에게 반드시 당신의 때에 당신의 방법으로 은총을 베푸시는 분이기 때문이죠. 지금도 우리 주님은 양의 문이 되셔서 양인 우리가 나아갈 길을 친히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오늘도 그 하나님의 시간표에 우리의 시선을 고정하며 사는 하루가 되시길 축복합니다.

 

 

야긴과 보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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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시는 주님. 때때로 이해할 수 없는 인생의 고난을 맞이할 때가 있습니다. 그 어떤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의 눈초리 때문에 위축되고 열등감에 빠져들고, 예민해 질 때가 있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곧 하나님의 심판인 것처럼 느껴 절망의 늪에 허우적거릴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 그 환난속에서도 주님을 바라보게 해 주시옵소서. 죄 없으신 하나님의 어린양이 인간들로부터 받은 모욕과 조롱에도 아랑곳없이 십자가의 길을 걸어갔던 그 발자취를 우리도 본받게 해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내 시간표가 아니라 하나님의 시간표를 바라보며 하나님을 더 의지하며 살게 하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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