얘기치 않는 고난을 당한 욥과 그 앞에 선 욥의 세 친구들이 지리한 논쟁을 계속하고 있는 상황이죠. 4~14장까지는 그 세 명의 친구들과 첫 번째 논쟁한 모습이 담겨 있었고, 15~21장까지는 두 번째 논쟁이 담겨 있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 이어 두 번째로 등장한 소아 사람 빌닷이 내품는 말입니다. 이미 욥기서 8장에서 빌닷은 욥에게 첫 번째 논쟁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빌닷은 죄로 인한 심판을 받는 것이라고 욥에게 권고했죠. ‘욥아, 하나님은 정의와 사랑의 하나님이시잖니, 그러니 회개하고 용서를 받아야 한다.’하고 말이죠.
그때 욥이 어떻게 대응했습니까? 욥은 그 빌닷의 견해에 대해 9장과 10장을 통해 그렇게 대답했죠. ‘너는 그렇게 생각하느냐, 나는 너무나도 억울하다. 나는 잘못 한 게 없는데 말이다. 죄 없는 이를 이렇게 벌하시는 하나님이 어떻게 공의의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느냐, 너는 그것을 옳다고 할 수 있겠느냐.’하고 이의를 제기했죠. 더욱이 12장 7~8절을 통해서 욥은 세 명의 친구들을 싸잡아 대응하기도 했습니다. ‘너희는 짐승, 새, 바다의 고기보다 어리석구나’하면서, ‘차라리 그 피조물에게 물어보는 게 더 낫겠다’는 식으로 세 명의 친구들에게 대답했죠.
왜 그렇게 욥이 울분을 토하면서, 그 친구들에게 대답한 것이겠습니까? 그들이 지혜 문학의 대가요, 종교 지식층의 대가라고는 하지만, 지혜롭게 욥에게 다가와 위로하고 격려하지 못한 채 오히려 욥을 박박 긁어대고 있는 꼴이었기 때문이죠. 욥도 그래서 그 친구들을 그렇게 힐난하고 책망하고 나선 것이었죠.
이런 상황이기 때문에 오늘 본문에 나오는 빌닷이 두 번째로 욥을 향해 신랄하게 빈정대는 이야기를 합니다. 오늘 읽은 말씀을 표준새번역 성경을 바탕으로 해서 의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본문 2절입니다. “욥아 너 언제쯤 그 입을 다물테냐? 제발 좀 네 말을 멈추고 잠잠해라, 그래야 내가 한 수 가르쳐 줄 거 아니니.”
3절입니다. “우리가 짐승보다 못하다고. 짐승들에게나 공중의 새, 바다의 고기들에게나 물어보라고, 그렇게 우리를 업씬여기는 너는 도대체 뭐가 잘났다고 그렇게 고집불통이니?”
4절입니다. “분노를 참지 못해서 네 몸을 자학하는 이 가련한 인생아! 그런다고 땅이 달라지겠는냐, 바위가 변화되겠느냐? 제발 말귀 좀 알아 먹으렴.”
5절입니다. “악한 자의 가정 이야기를 한 번 들어볼래. 악한 자의 가정에는 어둠이 가득해진단다. 암담해지지, 욥아 네 상황이 그렇지 않느냐?”
7~11절입니다. “악한 자의 가정은 그렇게 스스로 파멸을 가져온단다. 덫에 걸리고 올무에 걸리는 것이야. 욥아, 왜 네가 올무에 걸렸는지 알겠지? 그의 발뒤꿈치는 덫에 걸리고, 올가미가 그를 단단히 죌 거야. 땅에 묻힌 밧줄이 그를 기다리고 길목에 숨겨진 덫이 너를 노릴 거야.”
12~13절입니다. “악한 자의 가정 안에는 굶주림과 질병이 엄습하는데 죽을 병이 그 가정을 괴롭힐 것이야. 욥아, 죽을 병이 네 팔다리를 파먹을 거야. 왜 그런지 알겠니?”
14~15절입니다. “악한 자의 가정 안에는 늘 불안과 공포가 가득하단다. 그런 자는 살던 집에서 쫓겨나서, 죽음의 세계를 통치하는 왕에게 끌려갈 거야. 그의 집에는 무엇 하나 남는 게 없단다.”
16~18절입니다. “악한 자의 가정에는 식물도 잘 자라지 않고, 가지가 잘릴 것이고, 이 땅에서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것이고, 그의 이름조차 부르는 이가 없을 거야. 어디 그 뿐이겠느냐. 그런 악한 자를 밝은 데서 어두운 곳으로 몰아넣어 사람 사는 세계에서 쫓아내고 말거야.”
19절입니다. “악한 자의 가정에는 자식들이 다 먼저 죽는단다. 후손이 아무도 살아 남지 못하는 파멸을 당하고 말지. 욥아, 네 자식들이 왜 그리 일찍 갔는지 아니? 네가 악해서 그래”
20절입니다. “악한 자의 가정의 몰락을 동쪽 저 끝에서, 서쪽 저 끝에서. 아니 세상 모든 사람이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하도록 참혹할 것이란다.”
21절입니다. “악한 자, 불의한 자의 가정이 이런 꼴을 당하게 되는 것이란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가정이 이렇게 참혹하게 되는 것이란다. 그러니깐 욥아, 네가 악하고 불의하고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해서 이 꼴을 당하고 있는 것이라고. 욥아, 제발 정신 좀 차리거라. 제발!”
어떻습니까? 우리 개역개정판 성경의 말씀과 무슨 차이가 느껴지십니까? 표준새번역성경대로 읽어나가면 빌닷이 지금 욥을 향해 빈정거리면서 하는 말에 감정이 섞여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지금 빌닷은 다 죽어가는 욥을 향해 확인 사살하듯이, 무시무시한 논조와 어조로 욥을 몰아세우고 있는 꼴입니다. 그야말로 단순한 논쟁이 어느덧 감정싸움으로 번지고 있는 꼴입니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친구들 편에서는 단순히 고난당하는 욥을 위로하고자 건넸던 말로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욥의 입장에서는 그들의 말이 당장 힘들고 고통스럽고 속이 상하기 때문에, 그들을 향해 다소 거칠게 표현했던 것이죠. 그런데 그런 논쟁이 이제는 옳고 그름의 감정싸움으로 치닫게 된 꼴입니다.
과연 이런 모습을 볼 때, 우리가 이들의 중재자라면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하겠습니까? 욥과 세 명의 친구들이 달려들어 감정싸움을 벌이기 시작하는데, 이때 제3자의 입장이라면 어떤 생각을 해야 하겠습니까? 욥의 친구들에게는 우선 그렇게 말해야 하겠죠. 욥의 아픔을 품어주면서 함께 아파하며 함께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자세로 나아가면 어떻겠냐 하고 말이죠. 그들이 말하는 대로 인과응보의 논리로, ‘의인은 형통, 악인은 벌’이라는 기계적인 적용보다는, 이 세상의 일들은 다 그렇게 적용할 수 없는 일들도 많지 않겠냐고 말입니다. 그러니 욥이 당하는 고통을 정죄하고 비난하기보다 감싸면서 하나님 앞에 엎드리며 함께 나아가는 자세를 취하자고 조언할 필요가 있겠죠.
그렇다면 욥에게는 어떻게 조언하는 게 낫겠습니까? 지금 욥에게 벌어진 상황을 잘 모르지만, 욥도 그 친구들과 맞짱을 뜨고 그들을 힐난하기보다, 그저 ‘내 탓입니다.’하면 어떻겠냐고 말해 주면 좋지 않겠습니까? 그 세 명의 친구들이 하는 말이 틀린 것만은 아니기 때문에, ‘내가 죄인입니다.’하고 수긍하면 그냥 모든 게 잠잠해지지 않겠냐고 말이죠. 그러니 ‘제 잘못입니다’하고 하나님 앞에 친구들과 함께 엎드리는 자세를 갖추면 좋지 않겠냐고, 욥에게 조언해 줄 수 있겠죠.
시편 150편 안에는 다양한 장르의 시가 담겨 있습니다. 신뢰시, 찬양시, 탄식시, 지혜의 시, 순례의 시 등 여러 시편이 들어 있죠. 그 중에 탄식시가 50편 이상을 차지합니다. 인생이 그만큼 탄식과 설움으로, 아픔과 울분으로 가득 차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런 탄식시에는 특별한 양식 구조가 있습니다. 이른바 ‘부름’ - ‘원망’(탄식) - ‘도움 요청’ - (그러나) ‘신뢰 고백’과 ‘찬양’의 순서입니다. 그런 탄식시들은 섬뜩할 정도로 ‘원망’과 ‘탄식’을 수 없이 내뱉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렇게 탄식을 쏟아낸 다음에 꼭 시인이 고백하는 게 있습니다. 바로 ‘그러나’, ‘그러나’를 고백하고, ‘그러나 주님만을 신뢰합니다’, ‘그러나 주님 밖에 없습니다’, ‘다 이해가 안 되도, 다 해결 안 되도, 그러나 주님만 의지하겠습니다’하고 엎드린다는 점입니다.
욥과 같은 상황이 우리에게 안 일어나리란 법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욥의 친구들과 같은 그 잘난 모습이 왜 우리들에게 없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욥과 같은 당사자라면, 우리가 욥의 친구들과 같은 당사자들이라면, 서로 잘났느니 못 났느니, 누가 옳으니 틀렸느니, 서로가 힐난하고 비난하고 감정싸움으로 치달을 게 아니죠. 오히려 서로가 그렇게 말하고 고백하는 게 훨씬 낫지 않을까요? ‘그러나, 우리 엎드리십시다.’ ‘다 이해가 안 되도, 다 해결이 안 되도 주님만 의지하며 나갑시다.’하고 말입니다.
저와 여러분들도 그런 은혜의 모습으로 나아갈 수 있는 하루의 삶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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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시는 주님. 예수님께서도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마27:46)하며 탄식하셨습니다. 그 탄식이 시편 22편의 탄식시임을 깨닫게 됩니다. 저희들도 때로 예수님처럼 욥처럼 눈물로 밖에 설명되지 않는 현실을 마주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 안에는 욥의 친구들과 같은 그릇된 잘남도 있습니다. 그렇기에 서로가 잘잘못을 따져 묻고 괴롭게 하기보다,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주님만 의지하며 나아가는 그런 삶의 자세를 취하게 하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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