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알고 있는 진리는 일부는 맞고 일부는 틀린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매사에 겸손해야만 하죠. 자신이 알고 있는 진리와 교리가 항상 옳다고 주장하게 되면 위로하는 자가 되기보다는 자기가 알고 있는 그 진리로 인해 타인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자가 되기가 쉽기 때문이죠. 바로 소발의 경우가 그랬습니다. 그는 인과응보 사상의 옹호자였죠. ‘선을 행하면 선한 결과가 나오고 악을 행하면 악의 결과가 나온다’고 믿던 자였죠.
물론 그의 주장은 지극히 타당한 말입니다. 주님을 믿는 우리도 최후 심판의 날에 주님께서 양과 염소를 구분할 것을 믿는 자들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소발의 견해는 한 사회를 구성하는 공동체 사람들이 추구해야 할 정의이기도 합니다. 그런 견해야말로 사회를 보다 온전하게 이끌어갈 수 있기 때문이죠.
그러나 소발의 주장은 결과적으로 현재 고난 받고 있는 욥을 악인으로 몰고 가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말았습니다. 의인인 욥이 벌을 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한 악인으로 정죄하고 몰아세운 격이었기 때문이죠. 의인이 과도하게 고난받는 경우도 있고, 악인이 형통한 경우도 있는데, 소발은 그런 인생의 모습을 보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그만큼 자기 견해가 아무리 맞아도, 아무리 보편타당하다 할지라도, 고통당하는 사람에게 그 논리를 들이대는 것은 깊이 심사숙고해야 할 일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러한 소발의 주장에 대해 욥이 반론을 제기하는 말씀입니다. 욥이 관찰한 악인의 삶은 소발이 주장한 것과는 정반대입니다. 욥이 주장한 내용의 핵심이 13절에 나와 있습니다. “그들의 날을 행복하게 지내다가 잠깐 사이에 스올에 내려가느니라.”
무슨 뜻입니까? 악인은 일생을 행복하게 살다가 죽게 되는데, 그때도 고통 없이 편안하게 죽는다는 뜻입니다. 욥이 왜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이겠습니까? 욥이 보기에 이 세상의 부조리가 그렇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악한 자들은 무병장수하고 자손이 번성하고 생업이 확장되고 집에 웃음꽃이 끊이질 않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7~10절을 통해 밝혀줍니다. “어찌하여 악인이 생존하고 장수하며 세력이 강하냐 그들의 후손이 앞에서 그들과 함께 굳게 서고 자손이 그들의 목전에서 그러하구나 그들의 집이 평안하여 두려움이 없고 하나님의 매가 그들 위에 임하지 아니하며 그들의 수소는 새끼를 배고 그들의 암소는 낙태하는 일이 없이 새끼를 낳는구나.”
악한 자들이 장수하고, 세력이 강하고, 후손들이 굳게 서는 모습이 이 세상의 부조리한 경우라는 것입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악한 자들은 하나님께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도 않고 기도도 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성취와 행복이 자신의 손으로 이룬 것이라고 자랑까지 한다고 말합니다. 본문 14~16절이 그 말씀이죠. “그러할지라도 그들은 하나님께 말하기를 우리를 떠나소서 우리가 주의 도리 알기를 바라지 아니하나이다 전능자가 누구이기에 우리가 섬기며 우리가 그에게 기도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하는구나 그러나 그들의 행복이 그들의 손 안에 있지 아니하니 악인의 계획은 나에게서 멀구나.”
악한 자들은 혼자 힘으로도 행복한데 무엇 때문에 하나님을 찾겠느냐는 것입니다. 이처럼 악한 자들의 삶은 교만하기가 하늘을 찌를 기세인데, 악인들의 심판은 소발의 주장과 달리 공평하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욥이 보기에, 악인들은 도리어 잘 먹고 잘 살고 잘 놀고 잘 죽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악인들은 그만큼 화려한 무덤과 좋은 땅에 묻히고 조문객들이 넘쳐나는 복을 누린다고 32~33절에서도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 얼마나 부조리한 세상의 모습입니까? 그러나 이런 인생의 불공평함과 부조리함은 욥의 시대만 있었던 게 아니라 현대에도 여전히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죠. 하나님을 비웃으며 음란과 도박 사업으로 큰돈을 버는 사람들이 법망을 피해서 호의호식하며 살기도 합니다. 전쟁을 일으켜서 수없이 많은 양민의 목숨을 빼앗은 자들이 평온한 가운데 무덤으로 들어가기도 합니다. 게다가 그 악인은 영웅으로 둔갑하여 칭송을 받기도 하고, 평생 돈 한 푼 나누지도 않고 탐욕으로 산 사람의 자녀들이 그 불의한 돈으로 승승장구하는 모습도 보입니다.
반면에 좀 더 선한 길을 좇고 말씀에 이끌려 좀 더 정직하게 살려는 그리스도인 중에는 실패를 반복하거나 큰 병에 걸리거나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 얼마나 불공평하고 부조리한 모습이겠습니까?
이런 일을 당할 때 욥이 6절에서 탄식하듯이 그렇게 탄식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기억하기만 하여도 불안하고 두려움이 내 몸을 잡는구나.”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불공평하고 부조리한 세상에서 이유를 알 수 없는 고통과 고난에 직면했다면, 우리가 어떻게 욥의 인내를 배울 수 있겠습니까?
시편 73편을 통해 인내의 길을 배울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같은 시문학에 속하는 시편을 쓴 시인도, 욥과 유사한 상황에 빠져 있는 모습이기 때문이죠. 시인은 시편 73편 2~3절을 통해 이렇게 탄식합니다.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
시인은 자신이 고통스러운 처지에 있는데, 악인은 번영하고 형통할 뿐 아니라 고난이나 재앙도 없는 것을 보니, 질투가 나서 실족할 뻔했다며 탄식하고 있습니다. 만일 그 시인이 다윗이었다면 어떻게 했겠습니까? 다윗은 사울에게 쫓기면서 고통을 당하는데, 사울은 가는 곳마다 승승장구한다면 어떻겠습니까? 바로 그런 다윗의 탄식과 다를 바 없는 욥의 모습이죠. 다윗도 사울에게 선을 행했는데, 사울 왕이 기뻐하는 일에 헌신했는데, 오히려 사울 왕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어 탄식한 것 아닙니까? 욥도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의롭고 정직하여 악에서 떠나 하나님을 경외했는데, 지금 그런 고통에 처한 것이죠. 그러니 고통당하는 원인을 알 수 없어서 더 불안하다며 탄식하는 모습니다.
그런데 시편 73편의 시인은 불현듯 위대한 생각의 전환을 이룹니다. 시편 73편 16~17절에서 이렇게 밝혀줍니다. 표준새번역 성경의 번역본입니다. “내가 이 얽힌 문제를 풀어 보려고 깊이 생각해 보았으나, 그것은 내가 풀기에는 너무나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서야, 악한 자들의 종말이 어떻게 되리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시인은 성소에 들어가서야 비로소 그 불공평함과 부조리함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성소란 하나님이 임재가 있는 곳 아닙니까? 그 성소에 들어갔다는 것은 그분의 임재 안으로 들어갔다는 뜻입니다. 그 분의 면전 앞으로 나아가 기도를 드렸다는 뜻이죠. 그때 비로소 하나님의 깊으신 뜻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에게 성소는 어디를 가리키는 곳입니까? 먼저는 영원한 제사장이자 영원한 희생 제물이 되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음을 기념하고 바라보는 곳이 성소입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은 가장 불의한 사법재판 때문에 사형선고를 받고 십자가를 짊어지셨습니다. 그렇기에 성소란 이 세상의 불공평과 부조리함의 중심을 온몸으로 뚫고 나아가신 성자 예수님의 십자가가 성소요, 그 모든 불공평함과 부조리함을 극복한 부활의 영 곧 성령의 영으로 교통하며 위로받을 수 있는 곳이 성소입니다.
그렇기에 저와 여러분들이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시험에 들었거나, 이해할 수 없는 고난으로 고통에 빠져있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 무엇보다도 십자가를 바라봐야 할 것이요, 성령님의 임재 속에서 위로와 격려를 받을 수 있는 기도의 성소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죠. 우리가 그분의 십자가를 바라볼 수 있는 성소, 그분과 교통할 수 있는 기도의 성소를 통해 모든 어그러진 것들을 바로잡게 하시는 깨달음을 얻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그런 십자가의 성소, 기도의 성소로 나아갈 수 있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 성소에서 전능자의 뜻을 깨닫고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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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시는 주님. 삶의 부조리함 때문에 믿음이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고통과 고난이 끝이 없고 인내가 바닥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자기 지혜와 자기 방식대로 악하게 사는데도 형통하게 사는 자들을 만나면 내 믿음이 헛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주님, 그럴수록 더욱더 십자가 위에서 불공평하게 죽으신 예수님의 십자가 성소를 바라보게 해 주시옵소서. 불공평함을 깨트리고 부활하셔서 부활의 영 곧 성령으로 위로하시는 기도의 성소로 나아가게 해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그 성소에서 주님의 깊으신 뜻을 깨닫게 하시고 새 힘을 공급받게 해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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