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열기)(예화)어떤 목사님이 부산에 다녀왔는데, 지나가는 길에 위치한 갤러리에 들렀습니다.
그러다가 한 쪽 벽면을 장식한 낙서판을 보았죠.
그 위에 적인 수많은 낙서판 중에 유독 그 분의 눈에 띈 내용이 있었습니다.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파고, 돈 많은 자가 우물을 사고. 돈 많은 자가 생수를 팔고, 목마른 자가 생수 사려고 일을 한다네.”
(깨달음) 어떻습니까?
오늘날의 세태를 그보다 더 간략하게 그보다 더 정확하게 표현한 낙서 아니겠습니까?
사람들은 기회만 닿으면 돈으로 무엇이든 소유하고 지배하려 하니 말입니다.
동네 우물마저 독점하려고 하고, 돈 많은 사람은 우물을 사려고 하고, 돈 많은 자는 생수를 팔고, 목마른 자는 생수를 사려고 하는 모습 말입니다.
그렇게 사는 모습은 우물을 소유와 지배의 대상으로 삼으려는 모습이죠.
거기에는 선한 청지기가 되려는 모습은 없습니다.
만약 그 우물에 대해 모두가 선한 청지기가 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우물 덕분에 여러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고 서로 이해하며 소통의 장이 넓어지지 않겠습니까?
그 우물 속에는 시간과 재능과 지식과 이념과 의지와 감정 등 우리의 모든 것이 담겨 있는 법이죠.
그 우물을 자신의 것으로 독점하려고 하면 아무리 많은 한국어로 주고 받아도 소통은 영영 멀어지는 법이죠.
(적용) 그래서 우리 각자도 우리에게 맡긴 우물의 청지기가 되는 게 중요하겠죠.
나의 시간이나 재능이나 지식과 이념과 의지와 감정 등 그 모든 것을 우물을 통한 청지기가 되는 것 말입니다.
그렇기에 내가 우물을 두고 누군가와 관계가 막혀버렸다면 그것은 불통의 삶이죠.
그런 삶으로는 성령의 사람이 될 수는 없는 것이겠죠.
하지만 그 우물을 통해 누군과와 관계가 넓어지고 깊어진다면 우리는 그 우물의 선한 청지기처럼 사는 자입니다.
우물 덕분에 사람들과의 소통이 더 넓어지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 우물 덕분에 사람들과의 관계가 더 깊어지고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선한 청지기요 성령 충만한 자의 삶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역배)지난 주에 살펴본 것처럼 이집트의 알렉산드리 출신의 성경학자 아볼로는 에베소에서 고린도로 떠났습니다.
그것은 고린도에서 에베소로 건너와 에베소의 유대인 회당에서 주님의 복음을 전해 들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부탁때문이었죠.
그들이 나서서 아볼로에게 자신들이 살고 있는 고린도로 와서 주님의 복음을 전하고 가르쳐 달라고 말이죠.
그런데 그 아볼로가 그렇게 나설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의 사랑과 주님의 섬김을 통해 그가 주님의 완전한 복음을 깨달았기 때문이죠.
사실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는 파피루스의 생산지로서 여러 장서들을 보유하고 있는 거대한 도서관이 있는 곳이죠.
그 도서관에 있는 구약성경의 책들도 많았고, 그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역 성경’도 있었죠.
그러니 유대인 출신의 대학자 아볼로는 그런 구약성경을 통째로 읽고 연구하던 성경학자였습니다.
더욱이 그는 그때까지 세례 요한의 세례에 대해 알고 있었고 예수님에 대해서도 알고 있던 학자였습니다.
하지만 그가 알고 있던 주님의 복음은 반쪽짜리 복음에 불과했죠.
왜냐하면 세례요한은 예수님이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인 줄 알고 있었지만, 정작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목격하지 못한 채 참수형 당했기 때문이죠.
더욱이 세례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외칠 때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아 뉘우치긴 했지만 실제로 회개의 삶을 산 이들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세례는 어떤 세례입니까?
그것은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죽고 주님과 함께 부활을 선포하는 세례죠.
그래서 주님의 제자가 되겠다는 사람들, 주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자들은 자신의 삶을 주님께 의탁하며 사는 자들이죠.
그런 자의 삶은 주님 안에서 모두 변화되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삭개오도 그 삶이 실제적으로 회개의 삶을 살았고, 니고데모도, 아리마대 요셉도,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 안에서 변화된 세례를 받은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반쪽짜리 복음만 알고 있던 그 아볼로가 온전한 복음을 알고 믿게 되었는데, 어디에서 비롯된 일이었습니까?
아볼로를 자신들의 집으로 초청하여 발도 닦고 음식도 정성스럽게 차려 먹을 수 있도록 한 브리스길라 부부의 섬김에 있었죠.
그 부부는 아볼로 대학자가 편하게 쉼을 얻고 또 넉넉하게 배를 채울 수 있도록 섬긴 이후에 그의 부족한 반쪽자리 복음을 채워주었습니다.
그 부부가 바울에게 들은 완전한 복음 곧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아볼로에게 전해주고 가르쳐준 것이었습니다.
그때 비로소 아볼로는 구약성경의 메시아를 넘어 신약시대의 예수님에 대해 완전히 이해를 했고, 그때 비로소 주님 안에서 다시금 태어난 아볼로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브리스길라 부부의 사랑과 섬김을 통해 주님의 복음을 깨우친 그였으니, 어찌 그도 사랑의 빚진 자가 되지 않았겠습니까?
그 까닭에 고린도에서 온 성도들이 아볼로가 강연한 주님의 복음을 듣고 자신들과 같이 고린도로 건너가 주님의 복음을 전하고 가르쳐달라고 했을 때 기꺼이 순종했던 것이죠.
사랑은 사랑을 낳고, 섬김은 섬김을 낳고, 순종은 또 다른 순종을 낳듯이 말이죠.
(깨달음)오늘 저와 여러분들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자식을 향한 부모의 사랑이 내리사랑이듯이 성도를 향한 사랑도 일터의 동료를 향한 사랑도 그렇게 흘러가게 하는 걸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죠.
사랑이 또 다른 사랑을 낳는 법이요 섬김이 또 다른 섬김을 낳듯이 말입니다.
브리스길라 부부가 아볼로를 섬길 때 아볼로는 그 섬김을 받은 자로서 고린도에 건너가 그곳의 제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고자 떠났던 것입니다.
(본문) 오늘 본문은 그 이후의 상황을 전해주는 말씀입니다.
아볼로가 고린도로 건너가 있는 동안 에베소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보여주는 말씀이죠.
그때 바울은 제3차 전도여행을 출발해 에베소에 오고 있는 상황입니다.
바울은 2차 전도여행 때도 그렇게 했듯이 제1차 전도여행 때 돌았던 곳들을 지금 3차 전도여행 때도 돌아보면서 에베소로 오고 있는 상황이죠.
오늘 본문 1절에서 “바울이 윗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났다는 말씀이 바로 그런 뜻입니다.
윗지방으로 다녔다는 것이 1차 전도여행때 들런 더베 루스드라 이고니온 그리고 비시디아 안디옥을 둘러보며 에베소로 왔다는 뜻이죠.
그런데 그곳에서 누구를 만났습니까?
“어떤 제자들”이죠.
그 제자들은 주님의 제자가 아니었습니다.
그 제자들은 바울의 복음을 전해들은 제자들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하고 물었을 때, 그들은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했다”고 대답하죠.
본문 2절 말씀이 그것입니다.
그때 바울이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하고 묻죠.
그러자 그들은 “요한의 세례니라”하고 대답을 하죠.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그 제자들은 주님의 제자들이 아니고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이전에 아볼로가 브리스길라 부부를 통해 완전한 복음을 듣고 깨닫기 전에 알고 있던 반쪽짜리 복음과 똑같은 격입니다.
그때 바울이 그들에게 뭐라고 말합니까?
본문 4-7절 말씀을 다시 한 번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바울이 이르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그들이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모두 열 두 사람쯤 되니라.”
(깨달음) 무엇을 깨닫게 해 주는 말씀 같습니까?
세례요한의 제자들을 만난 바울이 요한이 전한 회개의 세례를 일깨워준 것입니다.
그 세례는 완전한 복음의 세례가 아니라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세례 요한이 강조했던 예수님, 곧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받는 세례에 대해서 바울이 일깨워준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받는 세례란 주님과 함께 자신들의 죄악과 정욕을 십자가에 못 박는 세례요, 주님의 부활하심과 함께 다시는 사는 길을 택하는 세례라고 말입니다.
그만큼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들의 주관자로 모셔들이는 것이 참된 세례요, 그 후에는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아가겠다는 결단이죠.
그러자 그들 모두는 주님의 세례를 받겠다고, 다시 말해 주님의 제자가 되겠다고, 주님과 함께 죽고 주님과 함께 살겠다고 결단했죠.
그러자 바울은 그들에게 주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바로 그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할 때 성령이 임하더니 방언도 하고 예언도 했다고, 증언해주고 있죠.
(적용)무엇을 생각하게 해 주는 말씀 같습니까?
성령이 있음도 알지 못한 그들에게 주님의 복음을 잘 설명해주었을 때, 그들이 주님을 믿고 세례를 받아 주님의 제자로 살겠다고 다짐을 했죠.
그때 바울이 세례를 베풀며 안수할 때 성령님이 그들에게 임하신 것입니다.
그 증표로 그들이 방언을 하고 예언을 했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이때 이들이 한 방언의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단순히 인간의 언어로 알아듣지 못한 천상의 방언을 하는 것이겠습니까?
이때 이들이 한 예언은 점쟁이처럼 앞날을 예언하는 것이겠습니까?
(원성) 고린도전서 12장은 은사장이고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장이죠.
방언과 같은 외적 은사가 중요하긴 하지만 그 토대는 사랑에 둬야 한다는 것 말입니다.
왜죠?
그래야 방언을 받지 못한 성도를 소중히 여길 수 있고 자신이 받은 방언의 은사로 우월감을 갖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죠.
그래야 말씀을 가르치는 은사를 받은 사람도, 온전히 믿는 믿음의 은사를 받은 사람도, 병고치는 은사를 받은 사람도, 섬김의 은사를 받은 사람도 모든 은사를 하나님의 선물로 여기며 겸손하게 품을 수 있기 때문이죠.
그것은 예언도 마찬가지죠.
예언이란 뜻은 점쟁이처럼 앞날을 예언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로서 그 말씀으로 시대와 상황을 해석하여 주님의 뜻을 받아들이도록 격려하는 사람입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주님의 바라보도록 말씀으로 격려하는 사람이 성경에서 말씀하는 예언하는 자죠.
또 너무 교만하고 자고한 사람에게는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다”하고 책망하는 사람이 성경에서 말하는 예언하는 사람입니다.
미래에 대해 두려워하고 걱정하는 사람을 향해서는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저가 경영할 것이다”하고 권면하는 게 성경이 말하는 예언하는 사람입니다.
옛날에 홍혜선 전도사란 분이 2014년 12월 14일 주일새벽 4시 30분에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언한 것은 점쟁이식 가짜 예언이죠.
더 오래 전에 이장림목사란 분이 1992년 10월 28일날 밤 12시에 주님이 재림한다고 한 것도 마찬가지죠.
모두 다 거짓된 예언이었습니다.
그로 인해 한국교회가 얼마나 어지러웠고 또 얼마나 큰 상처를 받았고, 사회적으로 지탄의 대상이 되었습니까?
(깨달음) 그렇기에 본문에서 말하는 방언과 예언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오직 성경에 나온 주님의 말씀으로 성도를 위로하고 권면하는 게 방언의 참된 목적이라는 사실이죠.
오직 성경에 나온 주님의 말씀으로 시대와 상황을 해헉하여 적용케 하는 게 예언의 참된 목적이라는 사실입니다.
(적용)그렇다면 그 제자들에게 바울이 안수할 때 성령이 임하게 하신 것, 그들에게 방언과 예언이 임하게 하신 이유가 뭔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이제부터는 반쪽짜리 복음에서 벗어나 완전한 복음의 증인이 되어 주님의 제자답게 담대하게 살아가라는 주님의 섭리였던 것입니다.
신약성경에 없던 그 시절에 성령이 임하여 방언을 하고 예언을 하게 했다면 그들의 삶의 좌표를 오직 말씀에 두고 살라는 뜻이었습니다.
그 말씀의 토대 위에서 시대와 상황을 해석하고, 누군가 힘들어 하는 자를 위로하고 권면하는 삶이야말로 사랑의 삶이자 그에게 주어진 우물을 토대로 사람들과의 관계를 넓히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죠.
(주문) 그렇다면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는 은혜가 무엇입니까?
(은혜) 주님은 우리에게도 성령을 베푸시고 방언과 예언의 은사를 주셔서 우리에게 부여하신 우물을 통해 더 많은 사람과 관계의 장을 넓히길 원하시는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주음성)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 주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의 음성으로 그렇게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내가 너에게 준 우물이 무엇이더냐?”
“내가 너에게 준 은사과 재능이 무엇이더냐?”
“그것으로 너는 너를 뽐내는데 사용하고 있느냐 아니면 다른 사람을 섬기고 위로하고 권면하는데 사용하고 있느냐?”
“그것으로 더 많은 사람들을 섬기고 품는 삶을 살고 있느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네가 받은 방언이나 예언의 참뜻을 깨닫고 겸손하게 사랑하고 섬기며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
“누군가 방언을 받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 부여한 주님의 우물이 또 있지 않겠느냐?”
“누군가 예언의 은사를 받지 못했다면 그에게 부여한 주님의 또 다른 우물이 있지 않겠느냐?”
“주님께서 부어주신 은사는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신 선물이니 그 선물이 방언이든 예언이든 성도들을 섬기고 사랑하는데 사용하길 원한다.”
“홍혜선 전도사처럼 몇날 몇시에 전쟁이 일어난다고, 이장림목사처럼 몇 날 몇시에 주님의 재림이 임한다고 하는 거짓 예언에 절대로 속지 말아라.”
“오직 주님의 재림은 두 사람이 밭을 가는 현장에 두 사람이 매를 돌리는 현장에 임한다는 것을 알고 늘 깨어 근신하며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며 살도록 해라”
(찬양)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나는 이 길을 가리라
좁은 문 좁은 길 나의 십자가지고
나의 가는 이 길 끝에서 나는 주님을 보리라
영광의 내 주님 나를 맞아 주시리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나는 일어나 달려 가리라
주의 영광 온 땅 덮을 때 나는 일어나 노래하리
내 사모하는 주님 온 세상 구주시라
내 사모하는 주님 영광의 왕이시라
(예화)청교도 목회자였던 존 번연의 〈천로역정〉은 기독교 고전 중의 고전으로 널리 알려진 책이죠.
사실 그 책은 그가 국왕의 명을 어긴 죄로 베드포드 감옥에 갇혔을 때 쓴 책입니다.
존 번연이 감옥에 갇혀 있던 어느 날 간수장이가 번연에게 집에 다녀올 기회를 제공해 주었습니다.
뜻하지 않는 선처에 감사하다면서 번연은 아내와 자녀들을 보고자 집으로 향했죠.
그런데 한 참 길을 가는데 성령님께서 자꾸 감옥으로 다시 돌아갈 마음을 불어넣는 주셨죠.
“이상하다, 왜 그럴까? 왜 성령님께서 감옥으로 돌아가도록 내 마음을 이끄시는 것이지?”
그러면서 번연은 성령님의 뜻에 순종하여 다시금 감옥으로 들어갔죠.
그런데 바로 그 날은 영국의 국왕이 갑자기 감옥을 들여다보고 싶어 했던 그 날이었습니다.
그때 그 감옥의 간수장이가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전혀 예측하지 않은 그 날 그 시간에 영국 국왕이 자신이 지키는 그 감옥문에 나타났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성령님의 이끄심 속에 있던 번연은 자기 집으로 가지 않고 다시금 돌아왔습니다.
그로 인해 그 간수장이의 목도 달아나지 않을 수 있었죠.
그때 그 간수장이가 존 번연에게 그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이제는 당신이 성령님과 함께 하는 분임을 비로소 알게 되었어요.”
“앞으로는 내가 하라는 대로 하지 말고 성령님이 이끄시는 대로 자유롭게 하시길 바랍니다.”
(깨달음) 어떻습니까?
성령님께서 왜 존 번연의 마음에 감옥으로 돌아갈 마음을 불어넣어주셨던 것입니까?
존 번연 자신만을 생각했다면 기어코 자기 집으로 향했겠지만 번연은 그 간수장이를 더 생각하며 살았기 때문이죠.
그에게 피해가 안 가도록, 그가 주님의 사람이 되도록 그만큼 섬겼던 것이죠.
그만큼 존 번연은 감옥이라는 환경 속에서도 간수장과의 소통의 장을 더욱 넓혔던 성령의 사람이었습니다.
(내음성) 그러니 우리가 기도할 때 어떤 기도를 주님께서 기뻐받으시겠습니까?
“그래요. 주님. 지금도 주님은 사람과 소통의 장을 넓히길 원하시는 주님이시네요.”
“제게 방언을 주시는 이유도, 제게 예언의 은사를 주시는 이유도, 제게 말씀의 은사를 주시는 이유도 그것이었네요.”
“주님께서 제 곁에 붙여준 사람들을 더욱더 섬기고 사랑하며 관계의 장을 넓히길 원합니다.”
“제게 주신 특별한 달란트, 제게 부여해주신 저만의 우물을 함께 나누고 함께 소통하는 우물로 삼게 해 주세요.”
“브리스길라부부에게 섬김을 받은 아볼로도 고린도교회 성도들 섬기며 더 소통의 장을 넓혔어요”
“바울에게 안수를 받을 때 성령의 임재 속에서 방언과 예언을 한 그들도 더 많은 소통을 통해 주님의 제자답게 살았어요.”
“존 번연도 감옥이라는 환경 속에서 간수장이와 소통의 장을 넓혔사오니, 저도 그런 삶을 살 수 있도록 역사해주세요.”
“소통의 장을 넓히고 관계를 소중히 여기는 것이 방언과 예언의 은사를 주신 참된 목적이오니 저도 그렇게 살 수 있게 해 주세요.”
(찬양) 사랑합니다 나의 예수님 사랑합니다 아주 많이요
사랑합니다 나의 예수님 사랑합니다 그것 뿐예요
사랑한다 아들아 내가 너를 잘 아노라
사랑한다 내딸아 네게 축복 더 하노라
사랑합니다 나의 성령님 사랑합니다 아주 많이요
사랑합니다 나의 성령님 사랑합니다 그것 뿐예요
사랑한다 아들아 내가 너를 잘 아노라
사랑한다 내딸아 네게 축복 더 하노라
(설교닫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바울에게 안수받을 때 성령님이 임하셨습니다.
그 증표로 그들이 방언도 하고 예언도 했습니다.
그것은 방언과 예언을 특권으로 여기라는 뜻이 아니라 더욱더 주님의 사람들을 섬기고 사랑하는 관계 확장의 도구로 사용토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오늘 저와 여러분들에게 부여하신 달란트, 각자에게 부여하신 우물을 통해 다른 사람과 더 깊은 관계의 장을 열어나가길 축복합니다.
그때 주님께서 더 큰 우물의 문을 열어주시고 더 큰 축복의 문을 열어 주실 줄 믿습니다.
그와 같은 은혜가 충만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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