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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설교WednesdaySermon/사도행전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데려다가(행18:24-26)

by 똑똑이채널 2021. 12.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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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열기)(성화)누가복음 10장에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께 나아와 물었죠.

제가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하고 말이죠.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첫째라고 말씀해주셨죠.

그리고 그 첫째만큼 중요한 게 있으니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그 율법사는 예수님께 또 다시 물어봤죠.

누가 내 이웃입니까?”하고 말이죠.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 유명한 강도 만난 자의 이야기를 전해 주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죠.

그 강도들이 그 사람의 옷을 벗기고 때렸습니다.

이제 그가 거의 죽은 것을 알고 버리고 달아나버렸죠.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데려다가.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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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 길을 누가 지나갑니까?

제사장이 그 길을 지나가다가 강도 만난 사람을 보게 되었죠.

그런데 그는 제사를 집례해야 한다면서 곧장 가버렸습니다.

그 후에 레위인 곧 제사를 집례하는 제사장을 도와 함께 성전에서 직무를 감당해야 하는 그 레위인도 지나쳐버렸죠.

 

그 후에 누가 그 길을 지나갑니까?

사마리아 사람이 그를 보고 피투성이가 된 그에게 약을 발라주고 여관방에 데리고 가서 주인장에게 치료를 해 다라고 하죠.

그리고 혹시 돈이 더 들어가면 자신이 여행에서 돌아와 다 내겠다고 했죠.

 

(깨달음) 그 이야기 끝에 예수님께서 그 율법사에게 물어보셨죠.

네 생각에는 그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하고 말이죠.

그러자 그 율법사는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하고 대답했죠.

그때 예수님께서는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하셨죠.

 

무엇을 일깨워주는 것입니까?

율법을 많이 알고 영생의 도를 많이 알고 있어도 그와 같이 자비를 베풀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는 것이죠.

사랑과 섬김이 없는 율법은 그저 소리나는 구리와 꽹과리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적용) 우리 주님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그 사랑과 섬김을 베풀며 살기를 원하시는 것이죠.

그것을 통해 주님은 복음의 통로로 삼고 계시기 때문이죠.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역배) 바울은 고린도에서 16개월 넘는 사역을 마치고 수리아 안디옥교회 곧 최초의 목회지로 돌아오고자 했습니다.

그때 따라나선 부부가 있었죠.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였습니다.

아굴라는 남편 이름이고 브리스길라는 아내의 이름이죠.

유대 사회나 우리 사회도 남편의 이름을 먼저 앞세우는 게 관례죠.

그런데도 아내의 이름을 먼저 앞세웠다는 것은 아내의 믿음이 더 출중한 까닭이죠 .

그렇다고 남편인 아굴라가 뒷받침해주지 않았다면 바울과 함께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역을 감당할 길이 없었겠죠.

 

그렇게 바울은 브리스길라 부부와 함께 에베소의 외항 겐그레아에서 배를 타고 에베소를 거쳐 수리아 안디옥교회로 돌아오려고 했죠.

그때 잠시 들린 에베소에서 바울은 유대인 회당에 들어가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때 유대인들 중에 바울을 붙잡고 다음에도 또 계속 그 복음을 전해주길 요청하는 이들이 있었죠.

하지만 바울은 본래 에베소를 목적으로 온 게 아니었기 때문에 기회가 되면 다시 오겠다고 약속한 후에 에베소를 떠나 수리아 안디옥교회로 돌아왔죠.

 

물론 바울은 그때 자신을 대신해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로 하여금 에베소에 살면서 새신자들을 보살펴주도록 했습니다.

아니 바울이 부탁하기보다도 브리스길라 부부가 먼저 자원하여 바울을 대신해 에베소의 새신자들을 섬길 마음을 품었겠죠.

그때부터 바울이 제3차 전도여행을 떠나 에베소에 올 때까지 브리스길라 부부가 에베소의 새신자들을 돌본 셈이었습니다.

 

(역배2) 오늘 본문은 브리스길라 부부가 에베소에 머물고 있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본문 24절 말씀을 다시 한 번 읽어보시겠습니다.

알렉산드리아에서 난 아볼로라 하는 유대인이 에베소에 이르니 이 사람은 언변이 좋고 성경에 능통한 자라

 

(깨달음) 여기에 나오는 알렉산드리아는 어떤 곳을 말하는 것일까요?

알렉산드리아는 주전 332년 헬라 제국의 알렉산더 대왕이 건설한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를 가리키는 곳입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자신이 정복한 지역에 자신의 이름을 붙였는데 그런 알렉산드리아 도시가 30개 이상이나 됩니다.

그 중에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가 가장 큰 도시였죠.

오늘 본문 당시의 알렉산드리아는 로마와 에베소와 수리아 안디옥과 더불어 로마 제국의 4대 도시 중 하나였습니다.

 

이 당시 알렉산드리아는 파피루스를 생산하는 도시였죠.

예전에는 양의 가죽에다 글씨를 썼지만 갈대를 짖이겨 종이처럼 생산한 파피루스를 생산한 후에는 거기에다 글을 썼죠.

그만큼 파피루스가 발달한 알렉산드리아에는 장서를 50만권 이상 소장한 세계 최대의 도서관이 생길 정도였습니다.

 

그러니 어떻겠습니까?

그렇게나 많은 장서를 보유한 도서관이 알렉산드리아에 있었으니 디아스포라 유대인들도 그 도서관을 드나들며 학문을 연구했겠죠.

그래서 주전 3세기 중엽부터 주전 2세기까지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을 위해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칠십인역 성경이 발간된 곳이 알렉산드리아였죠.

그러니 누구나 할 것 없이 알렉산드리아 출신이라고 하면 다들 자부심을 갖고 우러러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아볼로라는 사람이 바로 그곳 알렉산드리아 출신임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는 언변에 뛰어났고 성경에 능통한 유대인이었죠.

그가 성경에 능통했다는 것은 신약성경이 없을 때였기 때문에 구약에 능통했다는 말씀입니다.

물론 구약성경의 한 권 한 권에 능통했다는 게 아니라 구약성경이 두루마리로 돼 있었기 때문에 통으로, 전반적으로 능통했겠죠.

 

(전개) 그렇게 구약성경에 능통한 그에 대해 본문 25-26a은 뭐라고 소개하고 있습니까?

그가 일찍이 주의 도를 배워 열심으로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 그가 회당에서 담대히 말하기 시작하거늘

 

(깨달음) 아볼로가 주님의 도 곧 예수 그리스도의 도를 일찍이 배웠다고 밝혀줍니다.

더욱이 예수님에 관해서 자세하게 말하고 또 가르치는데 요한의 세례 곧 세례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고 증언해주죠.

그런 그가 에베소에 와서 유대인 회당에 들어가 구약성경을 토대로 예수님에 관해서 담대하게 증언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왜 오늘 본문을 기록한 누가는 그 아볼로에 대해 왠지 부족함을 이야기하는 것일까요?

요한의 세례만 알 뿐이라고, 증언하는 게 그것이죠.

그것은 세례 요한이 참수형을 당하기 직전까지 세례 요한이 베푼 세례만 알고 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세례 요한은 일찍 참수형을 당했기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모르는 것이죠.

그러니 아볼로라는 유대인 학자도 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전혀 모르고 있는 것이죠.

더욱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베푸는 세례도 전혀 모르고 있는 곳이고요.

 

더 중요한 것은 세례 요한에 베푼 세례는 회개에 이르도록 하는 세례였지만, 실제로 회개의 삶을 산 이들을 볼 수 없죠.

그러나 예수님께서 외치고 예수님께서 베푼 세례를 통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회개의 삶을 살았습니다.

삭개도오 그렇고, 유대 관원 니고데모도 그렇고 아리마대 사람 부자 요셉도 그랬죠.

바로 그것이 진정한 세례요 진정한 복음의 능력,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 아니겠습니까?

 

본문의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유대인 학자 아볼로를 보고서 그렇게 평가한 것입니다.

그가 구약성경에 능통한 자이긴 했지만, 더욱이 세례 요한의 세례까지는 알고 있지만, 그것은 반쪽짜리 복음에 지나지 않다고 말이죠.

보다 온전한 구원의 복음, 십자가와 부활의 완전한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다고 말이죠.

 

(본문) 아볼로가 반쪽짜리 복음으로 유대인 회당에서 전하고 있을 때 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가 어떻게 했는지 26절 하반절에 나오죠.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듣고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정확하게 풀어 이르더라

 

(원해)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는 그때까지 에베소에 머물면서 그곳에 들어온 아볼로라는 유대인 학자를 알게 된 것이었죠.

그런데 아볼로가 유대인 회당에 들어가 구약성경을 토대로 복음을 전하지만 뭔가 반쪽짜리 복음임을 알게 된 것이었죠.

그때 그 부부는 아볼로를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정확하게 풀어 설명해주는 모습입니다.

 

여기에서 데려다가하는 헬라어 원어는 프로슬람바노’(προσλαμβνω)입니다.

이것은 손님을 자기 집에 맞아들일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브리스길라 부부가 아볼로를 데리고 간 것은 유대인 회당 한쪽 구석으로 데려간 게 아니라 자신들의 집으로 초청해서 모셨다는 뜻이죠.

그것은 곧 브리스길라 부부가 아볼로를 극진히 대접하고 섬겼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래야 아볼로도 마음이 불쾌하지 않고 정중하게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에 말입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 아볼로가 예수님의 세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참되게 받아들일 수 있었기 때문이죠.

 

(깨달음) 그렇다면 본문 말씀을 통해 깨닫게 되는 바가 무엇입니까?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의 극진한 사랑의 섬김을 통해 아볼로가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온전하게 들을 수 있었다는 것이죠.

아무리 아볼로가 대학자라 할지라도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의 섬김이 없었다면 여전히 반쪽짜리 복음만 알고 있었을테니 말입니다.

그만큼 아볼로가 온전한 구원의 복음을 깨닫게 된 것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부부의 섬김을 통해서 가능했다는 사실입니다.

 

(주문) 그렇다면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에게 베푸시고자 하시는 주님의 은혜가 무엇입니까?

(은혜) 주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누군가에게 복음의 통로가 되기를 원하시는데 그것은 섬김을 통해서 가능케 하신다는 거죠.

 

(주음성) 그렇기에 오늘 본문을 통해서 성령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그렇게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너도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처럼 주님을 위한 복음의 통로가 되는 걸 주님께서 기뻐하지 않겠느냐?”

반쪽짜리 복음만 알고 있던 아굴라가 온전한 복음,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알게 된 것은 브리스길라 부부의 섬김에 있지 않았더냐?”

그들이 아굴라를 자기 집으로 초청하여 음식을 대접하면서 그에게 참된 복음을 전해주지 않았더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네가 누군가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한다면 먼저 네 자신의 것을 나누고 섬길 때에 복음이 스며들지 않겠느냐?”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입으로만 복음을 전했다면 아굴라가 온전히 받아들였겠느냐?”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입으로만 섬긴 게 아니라 참된 사랑으로 대접하고 받들었기에 아굴라가 온전한 복음에 녹아내린 것 아니겠느냐?”

주님은 지금도 그런 자들을 통해 복음의 역사를 감당하게 하지 않겠느냐?”

 

(찬양) 주님 말씀하시면 내가 나아가리다

주님 뜻이 아니면 내가 멈춰서리다

나의 가고 서는것 주님 뜻에 있으니

~ 주님 나를 이끄소서

 

뜻하신 그곳에 나 있기 원합니다

이끄시는 대로 순종하면 살리니

연약한 내영혼 통하여 일하소서

주님나라와 그뜻을 위하여~

~ 주님 나를 이끄소서

 

(예화) 유정옥 사모님의 말하지 않아도 들리는 소리에 나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서울 하나로교회 유정옥 사모님은 노숙자 재활센터를 운영하는 분입니다.

노숙자들을 데려다가 먹이고 입히는 삶을 사신 분인데, 어느날 이런 편지 한 통을 받았습니다.

 

묵직한 우편물 한 통을 받았다.

다섯 장이나 쓴 그 편지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나를 난도질하는 글이 쓰여 있었다.

글이나 말이 비수라더니 나는 그 글에 온 몸을 찔려 피를 흘리다 쓰러질 것 같았다.

그 글들은 한마디로 너는 노숙인들을 빙자하여 네 배를 불리는 나쁜 도둑이라는 글이었다.

편지를 다 읽어갈 무렵 내 손은 나도 모르게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것은 나의 피를 거꾸로 솟아 오르게 하는 능욕이었다.”

 

이 글은 유정옥 사모님과 동역하던 분이 쓴 글이었습니다.

그 편지를 받아든 사모님은 얼마나 분하고 고통스러웠으면 모멸감에 치를 떨어겠습니까?

함께 일하면서 자기 사정을 누구보다도 잘 알텐데 말입니다.

그런데도 노숙인을 빙자해 배를 불리는 나쁜 도둑이라고 말하니, 가슴에 분통이 터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그래서 유정옥 사모님은 편지를 읽고 나서 두 시간 동안 조목조목 열 다섯 장 정도의 편지를 썼다고 합니다.

그것을 들고 우체국에 가서 보내려고 하는데, 일반 봉투는 들어가지 않아 서류 봉투를 사서 편지를 넣고 우표를 붙이려고 할때였습니다.

그때 주님의 음성이 이렇게 들려 왔다고 합니다.

딸아, 그렇게도 할 말이 많더냐?”

 

유정옥 사모님은 그와 같은 주님의 음성을 듣고 얼마나 당황했는지 몰랐습니다.

15장이나 써서 보내려고 한 것이 자신의 심정인데, 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으니 말입니다.

그때 주님께서 또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얼마나 할 말이 많았겠느냐?”

그 음성을 듣는데 유정옥 사모님은 더욱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도 입을 열지 아니하였다.”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같이,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같이 입을 열지 아니하였다.”

 

그렇게 연이어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이사야서의 말씀 앞에 유정옥 사모님은 그 편지를 부칠 수가 없었죠.

대신 이렇게 고백을 했습니다.

나는 그 자리에 서서 말없이 오열하셨다.

그리고 그에게 썼던 열 다섯 장의 편지를 찢어 쓰레기통에 넣었다.

고린도후서 1210절에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때에 강함이라하였다.

그런데 나는 바울이 겪었던 그 궁핍도 박해도 곤고도 스스로 다 겪을 수 있다고 자신해 왔다.

그런데 그 가운데 박혀 있던 능욕이라는 것 앞에서 감당할 수 없이 분노가 폭발했던 것이다.

주님은 가장 자부심을 가졌던 일이 여지 없이 무너져 내릴 때도, 변명할 말이 많아 수백 장에 달할 때에도,

그 능욕을 참아내는 정도가 아니라 그 능욕을 기뻐해야 한다고 하셨다.

그렇게 나는 능욕이라는 몸살을 앓고 있었다.

보름쯤 지났을 때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사모님! 제가 사모님께 죽을 죄를 지었어요.’

그는 울먹이느라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지금 나의 가장 신실한 동역자로 내 곁에 와 있다.

바울은 그의 동역자인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에게 그들은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까지 내 놓았다고 소개했다.

그는 나에게 있어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같은 동역자가 되었다.

그날 내가 열다섯 장의 편지를 부쳤다면 나는 그를 영원히 잃었을 것이고

어쩌면 나를 가장 치명적으로 공격하는 적장이 되어 있을 것이다.”

 

(깨달음) 어떻습니까?

무엇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까?

주님은 로마서 1218절을 통해 말씀해주셨습니다.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하고 말이죠.

 

사람을 사랑하는 것, 사람을 섬기는 것, 그것은 다른 데 있는 게 아니죠.

그것은 상대방을 이해하는데서부터 비롯되는 것이죠.

그 사람이 왜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을까? 왜 그렇게 단정하는 걸까?

중요한 것은 그렇게 생각하도록 행동하고 말한 나의 연약함을 먼저 살펴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그 사람의 마음과 말을 이해할 수 있고, 관계가 회복될 수 있고, 거기에 화목이 일어나기 때문에 말입니다.

 

바로 거기에서부터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은혜가 임하는 것이죠.

바로 그것이 반쪽 자리 복음이 아니라 온전한 복음 아닙니까?

바로 그것이 오늘 본문에서 보여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가 아볼로를 섬기고 베푼 그 모습과 같은 격이죠.

 

(내음성) 그렇기에 오늘 우리가 주님께 기도드릴 때 어떤 기도를 기뻐 받으시겠습니까?

그래요, 주님. 이 연약한 자가 주님께서 말씀하신 율법도 잘 모르고 세례도 잘 모르지만 주님의 사랑은 알아요.”

율법과 세례와 영생에 대해 논리적으로 설명하지 못해도 주님의 섬김과 사랑은 잘 알아요.”

그저 상대방의 입장에서 헤아리며 섬기고 사랑하며 살게 해 주세요.”

그것이 저를 통해 주님의 복음이 전해지는 길이요, 그것이 주님께서 가장 기뻐하신 일인 줄 믿습니다.”

주님. 제가 부족하고 연약하지만 더욱더 이해하고 사랑하고 섬기는 삶을 살 수 있게 해 주세요.”

 

(찬양)약한 나로 강하게 가난한 날 부하게

눈 먼 날 볼 수 있게주 내게 행하셨네

 

호 산나 호 산나 죽임당한 어린 양

호 산나 호 산나 예수 다시 사셨네

호 산나 호 산나 죽임당한 어린 양

호 산나 호 산나 예수 다시 사셨네

 

 

[전자책] 하나님의 시간표

이 책은 지난 몇 년간 설교 말씀을 통해 나눈 예화다. br예화는 설교에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다. br말씀의 이론을 실제화할 수 있는 간증이기 때문이다. br그만큼 예화는 설교에서 중요한 몫을 차

www.aladin.co.kr

 

(설교닫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유대인으로 알렉산드리아 출신인 아볼로는 구약에 능통한 성경학자였습니다.

하지만 그가 알고 있는 세례는 요한의 세례요 그가 알고 있는 복음은 반쪽짜리 복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온전히 거듭나고 구원받은 주님의 자녀가 된 것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섬김과 사랑이었습니다.

 

사랑은 소리나는 구리나 울리는 꽹과리가 아니라 묵묵히 이해하고 품고 섬기는 삶이죠.

그를 통해 아볼로의 심령이 녹아내렸고, 그를 통해 아볼로가 온전한 복음 곧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유정옥 사모님이 평생을 노숙자쉼터에서 일하며 밥을 퍼주며 살아왔는데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배신감이 들 정도였죠.

그러나 15장의 편지를 써서 따지고 억울함을 풀고 싶었지만 주님께서 능욕받으신 그 모습을 떠올리며 참았습니다.

그로 인해 시간의 여백 속에서 주님께서 역사하셨고 회복의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바로 그것이 사랑과 섬김의 복음을 통해 주님께서 베푸신 회복의 은혜였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도 그런 사랑과 섬김으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처럼 유정옥 사모님처럼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때 주님께서 부족하고 연약한 우리의 삶을 통해서도 놀라운 복음의 은혜 새 생명의 은혜를 베풀어주실 줄 믿습니다.

그것이 이 시대의 선한 사마리아인의 모습인 줄 믿습니다.

그와 같은 은혜의 주인공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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