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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설교WednesdaySermon/사도행전

회당장 소스데네를 법정에 때리되(행18:12-17)

by 똑똑이채널 2021. 1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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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열기)(성화) 예수님은 이 땅에 아기 예수의 몸으로 태어나셨습니다.

여관에 누일 곳이 없던 아기 예수님은 베들레헴의 말구유통에 태어나셨죠.

이후 나사렛으로 다시 오셔서 어린 유년기를 보냈습니다.

 

그리고는 30살이 되셨을 때 공생애의 삶을 사셨죠.

그 공생애 3년의 삶은 하나님나라를 일구는 삶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태어나실 때 이미 하나님나라가 임하셨지만, 온전한 하나님나라는 아직 오지 않았죠.

그 까닭에 이 땅에 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을 하는 동안 하나님나라를 충실하게 일구셨던 것이죠.

그를 위해 병든 자를 고쳐주고 하나님의 말씀을 먹이셨고 가르쳐주셨고 그 삶을 신실하게 살도록 하셨죠.

회당장 소스데네를 법정에 때리되.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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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는 이제 당신의 최후 사명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 그 하나님께서 친히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게 얼마나 고통스러운 수치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주님은 그 수치와 모멸감을 기꺼이 감당하셨습니다.

 

과연 그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그 수치와 모멸감을 극복하는 길만이 십자가 대속의 길을 여시는 것이기 때문이죠.

이 땅에 죄를 안고 태어난 모든 사람들에게 새 생명의 길을 여실 수 있는 길이 십자가에서 수치와 모멸감을 안고 죽는 것이기 때문이죠.

 

물론 십자가 위에서 로마 군사들에게 수치와 조롱을 다하고 유대인들에게도 모멸감을 당할 때 그것으로 끝은 아니었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끝이 아니라 3일 후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수치와 모멸을 당하며 죽으셨지만 3일 후에 만 왕의 왕으로 부활하셨고 또 승천하셨죠.

 

(깨달음) 바로 이 모습을 정확하게 알려주는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히브리서 122절 말씀이 그것입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수치와 모멸감과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았다는 것입니다.

왜죠?

그 앞에 있는 기쁨, 곧 만 왕의 왕으로 부활 승천하여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을 그 기쁨을 바라보셨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적용)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당하신 십자가의 수치와 모멸감을 통해 우리에게 적용하길 원하시는 부분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우리가 주님을 믿는 것 때문에 때로 남에게 수치와 모멸감을 받는다면 오히려 기쁨으로 이겨낼 수 있다는 것 아닐까요?

주님을 믿는 것 때문에 우리가 정직하게 행하여 세상 사람들로부터 바보 천치라고 수치를 당해도 오히려 기뻐할 수 있다는 것 말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주일이면 산과 들과 호텔과 모텔로 여행과 등산을 떠나면서 온갖 즐길 것을 다 즐기면서 뭐라고 말합니까?

왜 바보처럼 사느냐? 왜 즐기지 못하느냐? 왜 쾌락을 맛보려고 하지 않느냐?”하면서 온갖 수치와 조롱과 모멸감을 주죠.

마치 그것이 이 땅에서 가장 즐겁고 쾌락적인 것으로 여기면서 말입니다.

 

그때 우리가 취할 자세가 무엇입니까?

똑같이 이에는 이, 눈에는 눈으로 맞서기보다 그 수치와 모멸감이 들 때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기쁨으로 삼는 것이죠.

왜냐하면 그것이 궁극적인 승리의 길로 이겨내는 길이요, 머잖아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상급을 받을 길이기 때문이죠.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 수치와 모멸감을 안겨주는 세상 사람들은 백보좌 심판의 날에 땅을 치며 후회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당신의 나라와 의를 위해 수치와 모멸감을 받는 자들은 상급을 주시는 분이요, 그런 자녀들을 비웃는 자들은 심판하시는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죠.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에게 베푸시는 주님의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역배) 오늘 읽은 총독 갈리오(Gallio)’의 본명은 마르쿠스 안네우스 노바투스(Marcus Annaeus Novatus)’입니다.

그는 유명한 웅변가 루시우스 쥬니우스 갈리오(Lucius Junius Gallio)’의 양자가 되었죠.

그때부터 그는 양부의 이름을 따서 루시우스 쥬니우스 안네우스 갈리오로 불렸습니다.

더욱이 그는 로마의 네로 황제 스승이자 철학자였던 세네카(Seneca)와 형제였습니다.

그리스의 델피(Delphi)신전에 있는 비문에 따르면 갈리오는 A.D. 51-52년 아가야의 총독이었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이상은 옥스퍼드의 사도행전 주석 350쪽에 나온 내용을 요약한 것입니다.

바로 그 갈리오가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아가야의 행정수도 고린도 총독으로 부임한 것입니다.

그때 바울을 못마땅하게 여긴 유대인들은 신임총독 갈리오를 흔들고자 바울을 법정에 세우 처벌토록 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고발당한 죄목이 무엇이었습니까?

로마의 정치와 경제와 사회법을 어긴 것이었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았죠.

바울은 최초 고린도에 홀로 왔을 때 평일에는 브리스길라 부부와 함께 천막을 만들며 거주했죠.

그리고 안식일이 되면 유대인들이 모인 회당에 들어가 구약을 토대로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전했죠.

물론 그 유대인들은 바울이 전하는 그 복음을 거부했습니다.

그러니 너무나도 외롭고 쓸쓸했지만 바로 그 무렵에 실라와 디모데가 아가야의 위쪽 마게도냐에 선교헌금을 가지고 왔죠.

그때 바울은 천군만마를 얻은 것처럼 영적으로 큰 힘을 얻어서 더욱 담대하게 주님의 복음을 전했죠.

하지만 그때도 유대인들이 조직적으로 바울을 방해하자, 바울은 그 회당 옆 디도 유스도의 집에 들어가 복음을 전했죠.

디도 유스도는 본래 이방인으로서 유대교에 입교했다가 바울이 전한 복음을 받아들이고, 자기 집을 교회로 내놓은 사람이었죠.

그러자 또 다른 회당장 그리스보가 자기 식구들과 함께 유스도의 집에 와서 복음을 듣고 세례까지 받게 되었죠.

뿐만 아니라 고린도에 사는 고린도 시민들조차도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세례를 받아 주님의 제자가 된 이들이 많았죠.

 

그러니 바울이 너무나도 기쁘고 좋지 않았겠습니까?

하지만 디도 유스도의 집은 바울이 회당에서 복음을 전한 그 회당 옆이라, 그곳에 모여드는 유대인들이 좋아할 리가 없었죠.

그때 그 유대인들은 신임총독 갈리오에게 바울을 붙잡아 아고라 법정에 끌로 갔던 것입니다.

그것은 바울이 로마 시민법을 위반한 까닭이 아니라 오직 유대인들에게 밉보였기 때문이었죠.

바울이란 자가 나타나 자신들의 모임을 흔들어놓고 그곳에 모이던 유스도까지 빼앗아갔고, 그 집에서 교회를 세우고 있었기 때문이죠.

 

(깨달음) 그렇게 갈리오 신임총독의 법정에 끌려가는 바울의 모습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쩌면 그 모습은 예수님께서 골고다 언덕에 십자가를 지고 끌려가는 모습과 같지 않겠습니까?

더욱이 그 십자가에 매달려 로마 군사들로부터 수치와 모욕을 당하는 그런 처지와 같은 격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바울은 이때 유대인들이 자신을 끌고 가는 그 모습 앞에 아무런 저항도 할 수가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그저 그들이 끌고 가는 대로 끌려갔고, 그들이 법정에 세운 대로 법정에 설 뿐이었습니다.

오직 전체 군중처럼 그 유대인들이 고린도시민을 대동해서 바울을 끌고 갔기에 바울은 그 수치와 모욕을 온통 당해야 했죠.

 

(본문) 그런데 이때 갈리오 총독이 어떤 판결을 내립니까?

본문 14-16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바울이 입을 열고자 할 때에 갈리오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너희 유대인들아 만일 이것이 무슨 부정한 일이나 불량한 행동이었으면 내가 너희 말을 들어 주는 것이 옳거니와

만일 문제가 언어와 명칭과 너희 법에 관한 것이면 너희가 스스로 처리하라

나는 이러한 일에 재판장 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고 그들을 법정에서 쫓아내니

 

(깨달음) 유대인들이 고린도시민들까지 선동해서 바울을 붙잡아 갈리오 총독 법정에 끌고 왔습니다.

하지만 갈리오 총독은 바울이 범한 죄라는 게 무엇인지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이 로마의 대역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 유대교와 종교적인 갈등을 일으키는 것 뿐이라는 것 말입니다.

이른바 바울이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유대인들이 주도권을 빼앗기는 것일 뿐, 로마의 법을 어긴 게 아니라는 거죠.

 

그래서 갈리오 총독은 그렇게 말한 것이죠.

나는 너희들의 그 일에 재판장 되지 않겠다그러니 내 법정에서 다들 나가라하고 말이죠.

그러니 바울은 자동적으로 풀려날 수밖에 없었죠.

 

(적용) 무엇을 깨닫게 해 주는 것입니까?

바울이 주님의 복음을 전하다 유대인들에게 붙잡혀 법정에 끌려가는 수치와 모욕을 당했지만 아무런 해를 당하지 않은 거죠.

오히려 바울이 그 법정에서 풀려나도록 하나님께서 갈리오 총독의 마음에 감동을 주셔서 법정에서 나가게 하신 것입니다.

 

(전개) 그런데 그것으로 끝이었습니까?

그렇지 않죠.

본문 17절은 이렇게 끝을 맺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회당장 소스데네를 잡아 법정 앞에서 때리되 갈리오가 이 일을 상관하지 아니하니라

 

(깨달음) 그 법정에 참석한 유대인과 유대인의 선동에 이끌린 고린도 시민들이 회당장 소스데네를 잡아 마구 때렸던 것이죠.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회당장이란 성인 유대인 10명이상만 있으면 회당 모임이 가능한 것인데, 고린도에 그런 회당이 많았던 것입니다.

특별히 바울이 찾은 그 회당이 바로 회당장 소스데네가 주관하는 회당이었고, 그 회당장 소스데네가 주도하여 바울을 법정에 끌고 간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에 대해 고발하려고 바울을 끌고 왔는데 갈리오 총독은 그에 대해 상관치 않겠다고 오히려 바울을 풀어준 거죠.

그러니 어떻겠습니까?

회당장 소스데네 때문에 지금 수많은 유대인들과 고린도 시민들이 구경꾼처럼 따라왔는데, 아무런 일도 없이 해산당하는 거죠.

그 때문에 도리어 자신들이 들러리만 선 느낌이란 그 화를 회당장 소스데네에게 풀고 있는 꼴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 심문받고 처발받아야 될 바울은 풀려났고, 오히려 바울을 고발하려 한 소스데네가 집단 구타를 당한 꼴입니다.

물론 그것은 그 시민들에게 구타를 당한 것 같지만 실은 준엄한 하나님의 심판을 본보기로 보여준 것이죠.

누구든지 진리를 짓밟고 진리를 전하는 이에게 수치와 모욕을 주면 훗날 그는 더 큰 하나님의 심판을 당할 것이란 점 말입니다.

 

(주문) 그렇기에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고자 하시는 은혜가 무엇입니까?

(은혜) 주님은 당신의 자녀들이 주님의 복음 때문에 수치와 모멸을 당할 때 지켜주실 뿐만 아니라 그 수치와 모멸감을 준 이를 심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주음성) 그렇기에 오늘 이 시간에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음성이 무엇이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네가 나의 복음 때문에 세상 사람들의 수치와 모멸감을 당할 때 부끄러워하거나 외면하려고 하지 말아라.”

오히려 그것이 골고다 언덕에서 당한 주님의 십자가 수치와 모멸감이라면 기꺼이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느냐?”

바울도 지금 회당장 소스데네가 주도하여 많은 유대인과 고린도 시민 앞에서 갈리오 총독에게 끌려가는 수치와 모멸감을 받지 않았더냐?”

하지만 바울은 아무런 해를 받지 않고 풀려났고, 도리어 소스데네가 군중들에게 집단 구타를 당하지 않았더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네가 주님 때문에 주님의 복음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 때문에, 때로 수치와 모멸감을 당한다면 오히려 더 기뻐하길 바란다.”

그 일을 통해서도 하나님께서 영광받으실 것이고, 그 일을 통해 하나님의 상급과 심판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예수님도 십자가 위에서 수치와 모멸을 받았지만 곧이어 3일 뒤에 만 왕으로 부활하고 승천하여 하나님 우편에 앉지 않았느냐?”

바울도 갈리오 총독의 법정에 끌려가는 수치와 모욕을 당했지만 곧이어 풀려나고 오히려 소스데네가 집단 구타당하는 주님의 심판에 처해지지 않았더냐?”

하나님은 지금도 시퍼렇게 살아계셔서 당신의 영광을 위해 수치와 모욕을 참는 자들에게 상을 주시고, 당신의 영광을 짓밟는 자들은 분명히 심판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도록 해라.”

 

(찬양)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나는 이 길을 가리라

좁은 문 좁은 길 나의 십자가지고

나의 가는 이 길 끝에서 나는 주님을 보리라

영광의 내 주님 나를 맞아 주시리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나는 일어나 달려 가리라

주의 영광 온 땅 덮을 때 나는 일어나 노래하리

내 사모하는 주님 온 세상 구주시라

내 사모하는 주님 영광의 왕이시라

 

(발췌)유기성 목사님의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라는 책에 나온 내용입니다.

중국 가정 교회가 고난의 시기를 겪을 때 영적 지도자였던 워치만 니가 병들었습니다.

그때 그는 주님께 고쳐달라고 기도를 했죠.

그때 주님께서는 사도 바울에게 말씀하듯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 말씀해주셨습니다.

 

워치만 니는 처음에는 그 말씀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기도하면 고쳐주시는 것이 응답이라고 생각했는데, 왜 은혜가 족하다고만 하시나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몸부림치면서 하루 종일 엎 드려 기도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기도하다가 깜박 잠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꿈에 배를 타고 강을 건너게 되었는데, 엄청나게 큰 바위가 나타나 더이상 갈 수 없게 되었죠.

그러자 다급히 하나님, 빨리 저 바위를 없애주세요.”하고 기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바위가 사라지는 게 아니라 순식간에 강물이 불어나 바위가 물속에 잠겼습니다.

그때 그 배가 그 위로 무사히 지나가는 모습을 보게 된 꿈이었습니다.

 

(깨달음)꿈에서 깨어난 워치만 니는 비로소 하나님의 역사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자신에게 있는 바위와 같은 질병이 장애물이 없어지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는 걸 말입니다.

자신에게 있는 질병이라는 장애물이 사람들 앞에 수치와 모멸감을 주는 게 아니라는 걸 말입니다.

그 어떤 바위도 능히 넘어가게 하시는 은혜와 같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었습니다.

 

(예화2) 박보영 목사님은 한때 의사였는데 주님의 소명을 깨닫고 신학을 공부했습니다

처음에는 병원 일도 하면서 신학교를 다니고 교회 사역을 병행했습니다.

그 즈음에 암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분은 그것을 주님의 일에 전념하라는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병원을 정리하고 개척교회를 시작했습니다.

 

이제 교단 진급 시험이 있던 날이었습니다.

그는 시험을 보러 갔다가 너무 아파서 시험도 못 치렀습니다.

겨우겨우 교회로 돌아왔죠.

그래서 교회 안에 있는 작은 방에 누워 있자니 이렇게 죽는 것인가싶었습니다.

 

그때 죽더라도 기도하다가 죽어야지하면서 교회 강단까지 기어가서 기도를 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죽더라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죽어야지 전도하다가 죽어야지.’하고 2층 계단을 기다시피 내려갔죠.

 

하지만 도무지 힘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지나가던 학생을 손짓으로 불러 그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자 그 학생이 놀랍게도 주님을 영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그는 그 학생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 기도해줬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기도하고 나니 다리에 힘이 들어가는 것 같았습니다.

또한 병으로 음식을 삼킬 수도 없었는데 음식이 먹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근처 식당에 가서 식사도 했습니다.

그 후 몸이 회복되기 시작했고, 건강을 되찾았고, 주님께 쓰임받게 된 것이었죠.

 

(깨달음)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며 그 뜻을 받드는데도 수치와 모멸감을 받는 일이 생길 수 있습니다.

워치만 니도 그렇고 박보영 목사님도 그런 케이스 아닙니까?

본문의 바울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주님의 영광을 위해 받는 그 수치와 모멸감은 모두 상급으로 승화시켜 주시는 분이십니다.

 

(내음성)그렇기에 우리가 주님께 기도할 때 어떤 기도를 기뻐받으시겠습니까?

그래요, 주님 저는 연약한 자예요.”

하지만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다가 수치와 모멸감을 받을 때가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게 해주세요.”

주님의 기쁨을 좋는 일인데도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고 오히려 나를 모함할 때도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바울도 유대인들에게 끌려가 갈리오 총독의 법정에 서는 모멸감을 받았고, 같은 하나님을 믿는 유대인들에게 모멸감을 받았어요.”

그러나 그때도 피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기쁨을 맞았던 바울을 저도 본받게 해주세요.”

하나님께서는 분명코 그 사건 너머에 선한 역사가 있음을 알게 해 주셨고, 오히려 그 소스데네가 심판을 받았습니다.”

주님 오늘도 주님의 기뻐하심을 좇다가 그렇게 수치와 모멸감을 당할 때 제가 기쁨으로 맞이하며 살게 힘을 주시옵소서.”


(찬양)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나는 일어나 달려 가리라

주의 영광 온 땅 덮을 때 나는 일어나 노래하리

내 사모하는 주님 온 세상 구주시라

내 사모하는 주님 영광의 왕이시라

 

(설교닫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도 우리 주님은 시퍼렇게 살아계신 아바 아버지이십니다.

주님의 영광을 위해, 주님의 기쁨을 위해 행하는데 때로 수치와 모멸감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도 골고다 언덕길을 오르신 주님, 십자가에서 수치와 조롱을 당하신 주님을 바라보고 인내하며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본문의 바울도 그 주님을 바라보고 갈리오 총독에 끌려가는 그 수치와 모멸감을 기쁨을 참고 인내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는 그 너머에 상살할 수 없는 평강과 기쁨의 역사를 바울에게 베풀었습니다.

아울러 하나님의 진리를 짓밟는 자들은 분명코 심판하시는 주님이심을 소스데네를 통해 보여주셨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우리 주님처럼, 바울처럼 우리에게 다가오는 믿음의 고난을 기쁨을 통과하는 은혜의 주인공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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