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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열기)(예화) 가수 이수영 씨를 아실 것입니다.
그녀가 엊그제 다니엘기도회 간증자로 나서서 자신의 삶을 나누었죠.
본래 그녀는 어렸을 때 혼전임신을 통해 태어난 딸이었죠.
부모님이 결혼 전에 그녀를 임신한 것이었죠.
더욱이 아버지 쪽은 모두 불교집안이라 어머니도 신앙생활을 할 수가 없었죠.
이모가 그녀의 어머니를 붙잡고 밤새도록 전도했지만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그녀가 초등학생 무렵이었죠.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엄마와 함께 세 동생을 데리고 갔죠.
그런데 아버지는 이미 죽어 있는 상태였죠.
그 후에 어머니가 더 이상 힘들다고 하면서 새 아버지를 만나 결혼을 했습니다.
결혼 하기 전에는 그렇게 잘 하던 것 같았는데, 결혼 후에는 엄마에게 폭언과 구타를 일삼았죠.
심지어 그녀가 집에 들어왔을 때 초등학생인 막내동생을 짓밟는 모습까지 보여준 새아빠였죠.
고등학교 3학년 때는 더욱 엄청난 일이 터졌죠.
10여년 전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병원에 입원했다는 그 소식처럼 이번에는 어머니가 그렇게 돌아가셨죠.
그때까지 그녀는 세상 노래를 하지 않고 복음가수가 되겠다고 했지만 그 일로 가수의 길을 계획하죠.
하루에 4시간 밖에 자지 않고 운동에다 수영에다 혹독한 연습을 거치면서 노래를 불렀던 것이죠.
그리고는 노래실력을 인정받고 연이어 두 번이나 대상을 받게 되었죠.
그때 그녀는 수상소감을 발표하면서 “하나님, 감사합니다.”하며 눈물을 흘리고 말았죠.
왜 그랬습니까?
여태껏 그녀는 하나님을 부정하면서 보란 듯이 성공하겠다고 했지만 자신의 뒤에서 도와주신 분이 하나님이란 사실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죠.
그때부터 엄청난 명예와 돈을 거머쥐었는데, 일각에서는 조흥은행 돈보다 이수영 돈이 더 많다고 할 정도였죠.
그로부터 몇 년 뒤에 그녀의 집을 들이닥친 사람들이 있었고 차압 딱지를 붙였죠.
엄마가 돌아가시고 자기를 봐준 사촌 오빠가 이수영 앞으로 엄청난 빚을 떠넘긴 것이었습니다.
그때 완전히 나락으로 떨어졌는데, 그 즈음에 친구 따라 수요예배에 나가게 되었죠.
그때 예배를 드리는데 하염없는 눈물이 쏟아졌죠.
그리고 교회에 등록을 해서 30대 청년으로 새신자반에서 동료들과 교제를 나누게 되었죠.
다들 울면서 자기 삶을 나누는데, 자기 차례가 되었죠.
“저는 가수 이수영이라고 하는데요...”하면서 고백하는데 다들 “그러냐고”하면서도 자신들의 삶을 두고 또 엉엉 우는 것이었죠.
남을 돌아볼 여력도 없고 다들 각자의 삶에 지치고 힘든 자기 고백을 그렇게 나눈 것이었죠.
그런데 그 교제를 통해 이수영이 주님의 위로와 소망을 발견하게 되죠.
그 전에도 몇 몇 교회들에 나갔지만 다들 그녀를 들러리 세우는 교회였지만 그 교회는 그게 아니었던 것이죠.
그 교회에는 자기 삶을 나누는 영적 동역자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깨달음) 무엇을 깨닫게 해 주는 것 같습니까?
이 세상에 웃는 사람이 많지만 그 속에 쓰디쓴 아픔을 통과하고 있는 이들도 많다는 것이죠.
그렇게 힘들 때 주님은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게 하시고, 영적 동역자들을 붙여주신다는 사실이죠.
(적용) 저도 어떤 면에서 보면 참 외롭고 힘들 때가 있습니다.
그렇게 사랑과 정성을 쏟아붓는데 주님께 돌아오지 않는 새신자를 볼 때 낙심이 되죠.
교회의 직분자인데 주일에 무슨 일만 있으면 세상으로 빠져드는 직분자를 볼때도 그렇습니다.
그렇게 낙심이 되다가도 어떨 때 힘과 소망을 얻게 될까요?
오늘과 같이 영적으로 함께 해 주는 권사님과 집사님이 있다는 사실 앞에 힘과 격려를 얻게 됩니다.
이수영이 자기 아픔과 고통을 함께 나눌 동역자들을 하나님께서 붙여주셨을 때 힘과 소망을 발견한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여러분들도 부족하지만 저를 통해 주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새 힘을 얻고 계실까요?
서로 서로 가까이하고 지지해주고 기도해주는 영적 동역자가 있다는 사실 앞에 저마다 영적인 소망과 힘을 발견하게 되는 줄 믿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주시는 주님의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역배) 바울이 유럽 대륙의 첫 관문인 빌립보에 와서 복음을 전했고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때 다음 데살로니가로 이동하면서 빌립보교회에 의원 출신인 누가를 남겨놓고 왔죠.
그 후에 바울은 실라와 디모데를 데리고 데살로니가에 와서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웠죠.
그런데 그곳의 유대인들 때문에 더 이상 머물 수 없어서 베뢰아로 이동했죠.
그때 유대인들이 난동을 피우는 바람에 바울은 실라와 디모데를 남겨두고 아덴 곧 아테네로 이동했죠.
물론 그날 밤 바울은 베뢰아의 동역자들과 함께 아테네에 왔지만 그들은 또다시 돌아갔죠.
그때부터 바울은 홀로 아테네에서 수많은 신전을 바라봤고 아레오바고 언덕에서 철학자들에게 복음을 전했죠.
그래서 복음의 제자를 얻지 못했지만 그래도 그래도 아레오바고의 관리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는 여자와 몇 몇 사람을 주님의 제자로 삼게 되었죠.
그 중에는 아가야의 수도 고린도에서 온 스데바나란 사람도 복음을 영접했죠.
그만큼 바울의 복음 전도는 아테네에서 실패작 같았지만 결코 실패한 게 아니었죠.
그 때문에 아테네를 떠날 때 바울은 3일길 정도 걸리는 고린도로 이동해 나간 것이었죠.
물론 그때도 바울은 혈혈단신 홀로 고린도로 들어갔습니다.
(전개) 그런데 그곳 고린도는 어떤 도시라고 했습니까?
고린도는 오이디푸스컴플렉스의 진원지였고, 코린토 건축기술이 발달할 정도로 경제적으로 부했죠.
그토록 경제적인 번영을 자랑하던 고린도는 주전 146년 로마제국에게 정복당하면서 그 영화를 잃어버렸죠.
그러다가 주전 44년 로마제국의 카이사르 황제가 재향군인들과 자유민이 된 노예들을 고린도로 대거 이주시켰죠.
바로 그때부터 고린도는 예전의 고린도보다 더 큰 규모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고린도는 그리스 본토와 펠로폰네소스반도를 잇는 지협이 있어서 항구도시였기 때문이죠.
그래서 고린도의 현지인들보다 외지인들이 더 많이 몰려들어 각양각색의 이주민들이 살았죠.
2천년 당시 고린도의 인구는 60만 명이 넘는 도시로 로마제국의 4대 도시에 속한 대도시였죠.
그만큼 고린도는 외지인들로 구성돼 있었고 경제적인 부가 넘쳐나 술과 쾌락과 음욕이 난무했죠.
그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그곳 고린도에는 아폴로, 옥타비아누스, 판테온, 포세이돈, 헤라, 헤라클레스, 헤르메스 등 온갖 신전들이 즐비했죠.
그중에 가장 대표적인 신전은 해발 575미터의 바위 정상에 세워진 아프로디테 신전이었습니다.
그 신전을 섬기는 여사제들만 1천 명이었는데, 다들 신의 이름으로 합법적인 매음을 하던 매춘부들이었죠.
그만큼 고린도는 영적으로 칙칙하고 어둡고 혼탁한 도시였습니다.
그런 고린도에 바울이 홀로 들어갔으니 골리앗 앞에 맞선 모습이자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모습이었죠.
그런데 그렇게 혈혈단신으로 들어가는 바울에게 주님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부부를 준비해 놓으셨죠.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는 본래 디아스포라로 터기 서북쪽 본토에서 태어난 유대인이었죠.
그 부부는 천막을 만드는 기술을 지녔기 때문에 로마에까지 들어가 천막을 만들며 생계를 유지했죠.
하지만 로마의 황제 클라우디우스 1세는 주후 1세기에 로마에 사는 유대인들, 약 2만 명으로 추산하는데 그들을 추방해버렸습니다.
크레스투스라는 유대인 선동가가 유대인들을 내세워 폭동을 일으켰기 때문이었죠.
바로 그때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도 추방당해 로마를 떠나 고린도에 온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바울이 고린도에 들어가기 전부터 그 부부를 준비해놓으셨던 것이죠.
바울은 그 부부를 만나 평일에는 함께 천막을 만들었고 안식일엔 유대 회당에 들어가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본문)그것이 지난 시간에 나눈 말씀이라면 본문은 그 이후의 상황을 전해주는 말씀입니다.
본문 4-5절을 다시 한 번 같이 읽어보실까요?
“안식일마다 바울이 회당에서 강론하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하니라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부터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언하니”
(원성) 바울이 안식일에 맞춰 유대인 회당에 들어가 주님의 복음을 전하며 예수님을 믿으라고 권면한 것이죠.
그런데 그 무렵에 어떤 일이 있었던 것입니까?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 곧 아가야 위쪽 지역 마게도냐 지역에서 고린도로 내려왔다는 것이죠.
그로 인해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더욱 담대하게 복음을 전한 것이었죠.
고린도후서 11장 9절에는 실라와 디모데가 이때 마게도냐교회의 선교헌금을 가져온 것으로 알려주죠.
그렇다면 바로 그 선교비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담대하게 복음을 전했던 것일까욧?
만약 그랬다면 바울이 지금까지 홀로 고린도에까지 와서 복음을 전하려 하지 않았겠죠.
가난하든 부하든, 오직 바울은 주님의 뜻을 받들어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옮겨온 것이었죠.
그렇다면 실라와 디모데가 왔을 때 바울이 더 힘을 얻어 주님의 복음을 전한 이유가 뭘까요?
실라와 디모데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영적인 동역자들이었기 때문이죠.
홀로 지치고 힘든 바울에게 영적 동역자들이 위로자요 격려자가 될 수 있도록 주님께서 보내신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죠.
이것은 서두에서 말씀드린 이수영 집사의 모습과 같은 격 아닐까요?
자기 뜻과 무관하게 사촌 오빠가 자신을 빚더미에 올려 자살충동까지 느낀 그녀였죠.
그렇게 허물어진 상태에서 예배를 통해, 또 자신과 같은 처지의 청년 새신자들과의 교제를 통해 위로와 소망을 발견한 그녀였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이수영에게 붙여준 그 청년 새신자 동역자들은 주님 안에서 영적 동역자들이었던 것입니다.
지금 바울도 그런 상황에 직면하여 주님의 큰 위로와 소망을 얻게 된 것이었습니다.
실라와 디모데와 누가가 함께 동역해왔다가 흩어진 상태였는데, 고린도에서 실라와 디모데를 만나게 된 것이었죠.
바로 이것이 영적으로 외롭고 지친 바울을 위해 주님께서 영적 동역자들을 통해 위로와 소망을 안겨주신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더욱 힘을 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주문)그렇다면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고자 하시는 은혜가 무엇입니까?
(은혜)주님은 우리가 지치고 힘들 때 영적인 동역자들을 붙여주셔서 새 힘을 얻게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주음성) 그래서 이 시간에 주님께서 저에게 여러분들에게 성령님의 음성으로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너도 영적으로 힘들고 지칠 때가 있을 때 하나님께서 너에게 붙여준 영적인 동역자들이 있지 않느냐?”
“네가 새신자들의 믿음을 위해 신앙생활을 위해 애쓰고, 심지어 주일날도 세상에 빠져드는 집사님을 볼 때 낙심이 되는 것 안다.”
“너도 그토록 헌신하고 주님을 위해 최선을 다하지만 뜻한 바 이루고 싶은 소원을 이루지 못해 낙심되는 것 내가 왜 모르겠느냐?”
“때로는 누구도 너를 알아주지 않아 홀로 사는 것 같은 세상이지 않더냐?”
“그러나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너의 하나님 여호와는 그런 상황속에서도 너를 알아주시고, 너를 지지해주는 위로의 주님이지 않더냐?”
“세상 사람들이 다 몰라줄지라도, 너의 교회 성도들이 너를 알아주지 않을지라도,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말아라.”
“네 곁에 영적인 동역자인 권사님과 집사님이 있지 않느냐? 네 곁에 권사님과 집사님을 하나님께 위로자로 붙여주지 않았더냐?”
“바울이 혈혈단신 힘들고 지칠 때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부부를 붙여주셨고, 지금은 실라와 디모데라는 영적 동역자를 봍내주지 않았더냐?”
“네가 힘들고 지치고 외로울 때 그래도 네게 영적인 동역자가 되어주는 권사님, 집사님, 그리고 목사님,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너를 알아주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도록 해라.”
(찬양)나 약해 있을 때에도 주님이 함께 계시고
나 소망 잃을 때에도 주님은 내게 오시네
나 시험 당할 때에도 주님이 지켜 주시고
나 실망 당할 때에도 주님이 위로 하시네
주님만이 내 힘이시며 오 주님만이 날 도우시네
오 나의 주님 내 아버지여 오 나의 주님 내 사랑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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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한 해 동안 코로나19로 인해 너무나 답답했다. 지금도 그게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앞이 보이지 않는 것 같고 모든 게 답답하기만 하다. 청년들도 꿈을 꿀 수 없는 상태다. 초등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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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그런데 실라와 디모데가 왔을 때 바울이 영적인 힘을 얻었는데 무엇에 붙잡혔다고 말씀을 해 주고 있나요?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서 더욱 담대하게 복음을 전했다고 증언해주고 있습니다.
바울이 영적 동역자들에게 위로를 받았지만 궁극적으로 말씀에 붙잡혀야 참된 소명을 다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이수영 집사도 마찬가지였죠.
그녀가 상처받고 찢기고 죽고 싶을 정도로 괴로웠을 때 그때 예배를 통해 새신자반 청년 동역자들과의 교제를 통해 그녀가 위로와 소망을 얻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수영 집사님 곁에 영적 동역자들을 붙여주셔서 그녀에게 살 소망을 안겨주신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그치게 하신 하나님이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영적 동역자들을 매개로 해서 더욱더 말씀에 붙잡힌 삶으로 인도해주셨죠.
매순간 순간 말씀을 읽고 큐티하며 주님의 임재를 모시는 삶으로 말이죠.
(성화)이것은 다윗도 마찬지고 바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다윗도 사울의 칼날을 피해 도망쳐 다녔죠.
8년 넘게 도망쳐 다녔으니 어찌 다윗이라고 자결하고픈 마음이 들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윗 곁에 영적인 동역자들을 붙여주셨습니다.
다윗과 함께 한 군사들이 바로 그들이었습니다.
때론 다윗이 목말라 죽을 지경에 처했을 때 그 동역자들이 목숨을 담보로 적진에 뛰어들어가 물을 떠온 일도 있었죠.
그때 다윗은 그 물이 영적 동역자들의 피와 같다면서 결코 마실 수가 없었죠.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 동역자들을 붙여주시는 것으로 끝이었습니까?
아니죠.
다윗은 유대 광야에 있을 때 그 곁에 동역자들이 있었지만 그들을 기반으로 말씀에 붙잡혀 살도록 인도해주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다윗의 인생길에 빛이자 등불이었기 때문입니다.
(성화2) 이것은 바울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바울 곁에는 1차, 2차, 3차 전도여행 때마다 주님께서 영적인 동역자들을 붙여주셨습니다.
그로 인해 어디를 가든지 낙심치 않도록 절망치 않도록 인도하시는 주님의 섭리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영적 동역자들이 함께 하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게 하셨습니다.
그런 동역자들 너머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히도록 해 주셨죠.
왜냐하면 주님의 말씀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었기 때문입니다.
(깨달음) 무엇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까?
제 곁에 저를 인정해주고 격려해주는 권사님과 집사님이 있다는 게 얼마나 큰 위로오 소망이겠습니까?
권사님과 집사님은 주님께서 제 곁에 보내주시고 붙여주신 주님의 영적 동역자들이기 때문이죠.
이것은 권사님과 집사님도 마찬가지인 줄 모르겠습니다.
권사님과 집사님이 때로 힘들고 지칠 때 저를 통해 성령님께서 영적인 위로와 권면을 베풀어주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나 권사님이나 집사님은 그것을 기반으로 더욱 바라봐야 할 게 있다는 점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 앞에 붙잡히는 삶이 그것이죠.
내 삶이 힘들고 지칠 때 우리가 흔들림 없이 나아갈 수 있는 것은 영적 동역자들이 함께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오직 말씀에 사로집히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히면 어떤 고독과 외로움도 능히 이겨내고 말씀의 인도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죠.
(적용) 요즘은 제가 잠자리에 들기 전에 유튜브로 시편이나 요한복음에 좋은 말씀을 낭독해주는데, 그것을 듣고 잠자리에 듭니다.
그러면 잠자면서도 영적인 영향력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죠.
다니엘 기도회도 많은 성도들이 코로나상황이라 유튜브로로 집에서 듣는 분들도 많죠.
그만큼 요즘 시대에는 말씀을 가까이 할 수 있는 길, 말씀에 더욱더 사로잡힐 수 있는 길이 참 많습니다.
(내음성) 그렇기에 우리가 이 시간에 기도할 때 주님께서 어떤 기도를 기뻐받으시겠습니까?
“그래요, 주님. 바울이 혈혈단신으로 홀로 고린도에 왔을 때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를 만나게 해 주셨어요.”
“홀로 유대인 회당에 들어가 복음을 전할 때 외롭고 쓸쓸했지만, 실라와 디모데를 보내주셨네요.”
“실라와 디모데 같은 영적 동역자들을 보내주셔서 바울이 영적으로 새 힘을 얻게 해 주셨어요.”
“이수영 집사에게도 새신자 청년들 곧 영적 동역자들을 붙여주셔서 위로와 소망을 얻게 해 주셨어요.”
“오늘 저에게도 우리 귀한 권사님과 집사님을 영적 동역자로 붙여주심에 감사를 드려요.”
“전도대상자가 나오지 않고 새신자가 2년간 결석을 하고 집사님들이 한 달에 두 세 번은 세상에 빠질 때 낙심될 때가 많아요.”
“그러나 여전히 저와 함께 주님을 사모하고 예배의 자리를 지키며 영적인 동역자와 같은 권사님과 집사님이 계시다는 게 얼마나 큰 위로요 소망인지 몰라요”
“우리 권사님과 집사님도 부족하지만 저를 통해 성령님의 위로와 소망을 발견한다면 감사하겠어요.”
“주님. 그러나 영적 동역자들의 위로와 소망을 기반으로 주님의 말씀 앞에 사로잡혀 살게 해주세요.”
“지금은 우리 곁에 말씀을 가까이할 수 있는 길이 많사오니 매일 잠자리에 들기 전에라도 말씀을 듣고 꿈 속에서라도 주님을 만나게 해주세요..”
“그리하여 광야의 다윗을 인도해주시고 바울의 인생길을 인도해주신 말씀을 등불로 빛으로 삼게 해 주세요.”
“주님의 말씀은 지금도 시퍼렇게 살아 역사하셔서 저의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수술케 해주실 줄 믿어요.”
“제 인생과 가정과 자녀들의 앞길을 친히 빛으로 비춰주시고 인도해주실 줄 믿어요.”
(찬양) 주님 말씀하시면 내가 나아가리다 주님 뜻이 아니면 내가 멈춰 서리다
나의 가고 서는 것 주님 뜻에 있으니오 주님 나를 이끄소서
주님 말씀하시면 내가 나아가리다 주님 뜻이 아니면 내가 멈춰 서리다
나의 가고 서는 것 주님 뜻에 있으니 오 주님 나를 이끄소서
뜻하신 그곳에 나 있길 원합니다 이끄시는 대로 순종하며 살리니
연약한 내 영혼 통하여 일하소서 주님 나라와 그 뜻을 위하여
[전자책] 하나님의 시간표
이 책은 지난 몇 년간 설교 말씀을 통해 나눈 예화다. br예화는 설교에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다. br말씀의 이론을 실제화할 수 있는 간증이기 때문이다. br그만큼 예화는 설교에서 중요한 몫을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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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닫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제가 7년 넘게 우리교회에서 목회하면서 외롭고 힘들 때가 있습니다.
전도해도 쉽게 부흥이 되지 않고 새신자에게 사랑과 관심을 쏟아부어도 세상에 푹 빠져버릴 때죠.
심지어 직분자들도 한 주가 멀다하고 세상에 일이 생기면 무조건 달려가는 분들을 볼 때죠.
그때마다 그렇게 낙심이 되고 절망감이 몰려올 때 그때마다 주님의 위로와 격려를 받습니다.
어떻게요?
오늘 예배에 참석한 권사님과 집사님 같이, 제 곁에 영적인 동역자가 있다는 사실 때문이죠.
얼마나 감사하고 또 감사한지 모릅니다.
그것이 바울 곁에 실라와 디모데를 보내서 영적으로 소성케 하고 새 힘을 공급하시는 주님의 원리와 같은 격이죠.
물론 저와 여러분이 서로서로 영적 동역자의 원리로 끝내기를 원하시는 주님은 아니시죠.
그를 기반으로 우리 주님은 더욱더 말씀 앞에 사로잡혀 말씀의 인도하심 속에 살기를 원하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래야 다윗과 같은 광야길을 걸어도, 바울과 같이 힘든 길을 걸어도, 오직 말씀을 푯대삼아 성령님과 동행하며 인생이 길을 승리하며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에게 그와 같은 주님의 은혜가 충만할 수 있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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