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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설교WednesdaySermon/사도행전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행18:6-11)

by 똑똑이채널 2021. 11.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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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열기)(예화)새벽에 에스라서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에스라서는 역대기와 맞닿아 있는 말씀이죠.

역대기는 바벨론에 멸망한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붙잡고 성전재건을 꿈꿀 수 있도록 설계한 말씀입니다.

에스라서는 바벨론 포로에서 70년 만에 돌아온 유다 백성들이 꿈꿨던 설계를 토대로 직접 건축하는 현장의 말씀입니다.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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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왕국 유다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갈 때 1, 2, 3차에 걸쳐 포로로 끌려갔는데, 그 총 수가 약 180만명 됩니다.

70년이 지나 바벨론을 무너뜨린 페르시아의 고레스대왕이 유다 백성이 고국으로 돌아가도록 명령했는데 몇 명이 왔을까요?

1차 때 돌아온 사람은 5만명 가량이 되는데, 3%밖에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2차 때는 1,500명이었고, 3차 때는 극소수의 사람만 돌아왔습니다.

물론 여자와 아이들까지 포함한다면 약 20%, 20만명 정도는 돌아오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런 그들이 유다 고국에 돌아와 무엇을 했겠습니까?

예루살렘에 돌아온 그들은 적정기간 안식과 쉼을 얻은 후에 7월이 되어 속죄일과 장막절을 지켰습니다.

그리고는 곧장 하나님께 번제를 드렸고 이후 성전의 지대 곧 성전재건축 기공식을 가졌습니다.

그때 옛 성전의 영화로움을 알고 있던 어른 세대는 통곡의 눈물을 흘렸고, 젊은 세대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죠.

 

그런데 그 성전재건 공사가 그대로 잘 진행되었습니까? 아니죠.

북쪽의 사마리아 사람들과 동쪽의 암몬과 모압 사람들, 남쪽의 아라비아 사람들, 서쪽의 아스돗 사람들이 방해공작을 폈죠.

그들은 유다 관원을 돈으로 매수하는가 하면, 일반 백성들을 무기력하게 비방하고 혼란스럽게 했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다리오 왕에게 성전재건축 중지명령을 내려달라고 상소문을 올렸죠.

그러자 다리오 왕이 보기에도 유다 백성들이 성전과 성벽을 재건하면, 자신들에게 등을 돌릴 것 같아, 성전재건을 중지하라고 하죠.

 

그로부터 2년간 성전재건은 중단되었고, 성전을 재건하고자 했던 사람들은 다들 자기 집을 세우기에 급급했죠.

그때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90세에 가까운 학개 선지자와 20대 초반의 스가랴 선지자에게 감동을 주셔서 성전재건을 독려하는 메시지를 선포하게 하셨죠.

더욱이 유다 장로들에게 지혜를 주셔서 다리오 왕에게 성전재건 상소문을 써 보내도록 해 주셨습니다.

다리오 왕이시여. 만세무강하옵소서. 우리가 성전을 재건하는 것은 다리 왕의 선왕인 고레스 대왕의 칙령에 근거한 것입니다

다리오 왕이시여, 역대왕조실록을 잘 살펴보시면 알 수 있는 사항이오니, 그걸 보시고 다시금 허락해 주시옵소서.”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해 하나님의 선하심을 좇아 순종하고자 할 때 다리오 왕도 허락해주었습니다.

 

(깨달음) 그 사건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어떤 깨달음을 주는 것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일이든 세상의 일이든, 하나님의 선하심을 좇아 살아갈 때 방해하는 세력들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죠.

 

그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일깨워주는 말씀이죠.

내가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좇아 순종할 때 내 심령을 힘들게 하고 영적으로 무력하게 만드는 사람들이 있을 때 말이죠.

그때 우리가 취해야 할 자세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맞설 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히는 게 중요하죠.

 

성전방해공작을 조직적으로 펼치는 세력 앞에 유다 백성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를 통해 전해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그 백성들이 붙잡혀 순종했죠.

더욱이 그때 성령님의 감동속에 지혜를 주셨는데, 다리오 왕에게 편지를 띄워서 허락을 받도록 하는데 있었죠.

 

그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좇아 순종할 때 영적으로 인간적으로 힘들게 할 때 그때 말씀에 사로잡히는 게 중요하죠.

더욱이 그때 성령의 감동하심을 좇아 지혜롭게 대처하는 게 더욱 중요하죠.

주일날 나눈 말씀처럼 감감축하는 영적 비밀의 원리를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에게 적용하는 것이죠.

 

하나님, 나를 힘들게 하는 그 사람을 만나게 해 주심을 감사드려요. 내게 필요하기에 하나님께 붙여주신 사람임을 믿어요.”

하나님, 그 사람이 나를 힘든 일로 괴롭게 하는데 그또한 감사드려요. 그 일을 통해 나를 훈련시키시려는 뜻임을 믿어요

하나님,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 것이라고 하셨듯이 내가 그 사람을 진심으로 축복해요. 그 사람에게 복을 내려주세요.”

 

(적용)우리가 왜 그렇게 감감축의 영적 비밀의 원리를 나와 부딪히는 사람에게 적용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겠습니까?

성전방해공작을 펼치는 이들 앞에 유다 백성들, 그 중에 총독 스룹바벨과 제사장 예수아가 행한 모습이기 때문이죠.

이에는 이, 눈에는 눈, 비방에는 비방으로 맞서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감감축의 영적원리에 순종했기 때문에 말이죠.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고자 하시는 주님의 메시지도 바로 그것입니다.

 

(역배) 바울이 아테네에서 3일 걸려 고린도로 홀로내려 왔죠.

그것은 아테네에서 복음을 전할 때 고린도에서 온 스데바나’(고전16:15)가 있었기 때문이었죠.

그런데 홀로 고린도에 내려왔을 때 주님께서는 천막을 만들어 팔던 브리스길라 부부를 만나게 해 주셨습니다.

그때 바울은 그 부부와 함께 평일에는 천막을 만들며 함께 지냈고, 안식일에는 유대인 회당에 들어가 복음을 전했죠.

 

물론 유대인들은 바울이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선뜻 받아들일리 만무했죠.

그들은 구약의 하나님만 믿는 자들로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죠.

그러니 바울이 육신적으로도 힘든 상태였지만 영적으로 얼마나 더 지치고 힘든 상태였겠습니까?

 

그런데 바로 그 무렵에 아테네의 위쪽 마게도냐의 교회를 돌보고 있던 실라와 디모데가 고린도에 내려왔습니다.

그때 그들은 마게도냐 교회가 헌금해 준 선교비를 가지고 바울에게 전달해줬습니다.

그러니 바울이 영적으로 얼마나 큰 위로와 힘을 받았겠습니까?

평일에는 브리스길라 부부와 함께 천막을 만들며 그 부부에게 복음을 전했지만 그 부부는 초신자에 불과한 부부였죠.

하지만 실리와 디모데는 여태 선교지를 누비며 믿음으로 동역자들이었으니, 바울은 천군만마를 얻는 마음 아니었겠습니까?

그런 위로와 격려 속에서 바울은 안식일이 되면 더욱더 강력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이죠.

 

(깨달음)지난 시간에 이 본문을 읽을 때 저도 권사님과 집사님을 통해 주님의 위로와 격려를 받고 있다고 말씀을 드렸었죠.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나팔을 불어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로 인해 낙심될 때가 있지만 그래도 주님의 말씀에 도전을 받고 순종하는 권사님과 집사님을 볼 때 말입니다.

 

(본문) 오늘 본문은 그 이후의 상황을 전해주는데, 그 후로도 바울이 유대인 회당에 들어가 담대하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유대인들은 조직적으로 바울을 방해하고 음해하는 모습을 보여줬죠.

그때 바울은 예수님께서 하라는 대로 회당에서 나와 먼지를 털고, 그 회당 옆에 위치한 디도 유스도의 집에 들어갔습니다.

 

디도 유스도란 이름은 로마식 이름으로 본래 이방인인 그가 유대인들의 전도를 받고 유대인 모임에 참여한 것이었죠.

그런데 그 유대인 회당에 바울이 나타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자, 그가 그 복음 앞에 녹아내린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이 조직적으로 바울을 방해하고 훼방하자 그가 나서서 바울을 자기 집으로 모셨던 것이죠.

그저 잠잘 수 있는 숙박차원에서 바울을 모신 게 아니라 온 집안 사람들과 이웃 사람들이 복음을 듣도록 집회 장소로, 교회 장소로 제공했던 것이죠.

 

그런데 8절에 보면 더욱 놀라운 사실을 전해줍니다.

회당장 그리스보와 집 사람들, 그리고 수많은 고린도 사람들이 주님의 복음을 듣고 세례를 받았다고 전해주고 있죠.

무슨 뜻이겠습니까?

바울이 그 회당 옆에 있는 유스도의 집에서 복음을 전할 때 또 다른 회당장과 집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세례를 받았다는 거죠.

그뿐만 아니라 고린도에 사는 많은 사람들조차 그 집에 들어와 복음을 듣고 주님을 영접하고 세례받은 일이 일어난 거였죠.

 

그러니 바울이 얼마나 기쁘고 행복한 마음이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본문 9-10절은 전혀 다른 상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원해)바울이 디도 유스도의 집에 들어가 복음을 전하는데 또 다른 회당장 그리스도와 그 집 사람들이 주님을 믿기 시작했죠.

더욱이 고린도에 사는 많은 사람들이 그 집에 들어와 주님의 복음을 영접하고 주님의 제자가 되겠다는 세례까지 받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렇다면 응당 바울이 영적으로 기뻐하고 성령에 충만해야 할 것 같은데, 그 밤에 주님께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죠.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고, 다시 말해 침묵하지 말고 복음을 계속 선포하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더욱이 주님께서는 내가 너와 함께 있다. 어떤 사람도 너를 해칠 사람이 없다. 이 성에 내 자녀가 될 사람이 많다하신 것입니다.

 

그만큼 바울은 영적으로 기쁨이 충만했지만, 또다시 유대인들이 조직적으로 방해할까봐, 두려움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런 바울에게 주님께서 환상 가운데 나타나 말씀하셨는데, 이때 주님께서 강조하신 단어가 무엇이겠습니까?

내가 너와 함께 있다하실 때 사용하는 라는 1인칭 주어 아니겠습니까?

다시 말해 그 분이 천치의 창조주이시고, 그 분이 인간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계시고, 생사화복의 주관자이시 말입니다.

이 세상 어떤 유대인들이 너를 조직적으로 방해하고 위협할지라도, 내가 너의 보호자이지 않더냐, 하는 말씀이죠.

 

(깨달음) 어떻습니까?

여태껏 바울이 회당에서 복음을 전할 때 유대인들이 조직적인 방해공작을 펼치고 음해하고 모함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회당이 아닌 디도 유스도의 집을 고린도교회로 삼아 복음을 전할 때 또 다른 회당장 집안 사람도, 많은 고린도 사람들이 찾아와 주님을 믿었죠.

심지어 그들 가운데 주님의 제자가 되겠다고 세례까지 받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상황속에서도 그 심령이 편치만은 않았던 것이죠.

왜냐하면 이전처럼 또 다시 바울을 방해하고 음해하는 세력들이 나타나 바울의 심령을 힘들게 흔들어댈지 모르기 때문이죠.

 

바로 그때 주님께서 바울에게 찾아와 강하고 담대하도록 말씀으로 권면해주신 것이었습니다.

바울아. 네게 다운되었는지. 네 심령이 왜 곤고한지 내가 다 안다.”

바울아. 그러나 낙심하지 말아라. 내가 너와 함께 하지 않느냐.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지 않더냐.”

그런 내가 너와 함께 하고 있으니, 너는 나를 보고 두려워하지 말도록 해라. 이 성읍에 내 제자가 될 사람이 많다.”

 

(적용)이것은 마치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유대 백성들이 성전을 재건할 때 동서남북에서 방해공작을 펼치는 이들의 모습과 같은 격이죠.

그로 인해 2년간 성전재건을 놓아버렸고, 다들 지쳐 있는 상태였으니 말이죠.

 

그때 어떻게 했습니까?

하나님께서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를 통해 다시금 그 백성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도록 하셔서, 그 백성에게 힘과 용기를 북돋아주신 것과 같은 격이죠.

 

(주문) 그렇다면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고자 하시는 은혜가 무엇입니까?

(은혜) 주님은 우리가 주님의 뜻을 받들 때 낙심되는 상황이 벌어질 때 그때도 말씀으로 찾아와 새 힘을 베풀어주시는 아바 아버지라는 사실입니다.

 

(주음성)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 성령님의 음성을 통해 우리 각자에게도 그렇게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네가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순종하고자 하는데 때로 너를 방해하고 낙심케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걸 내가 모르겠느냐?”

오늘 본문에서도 바울이 유대인 회당에서 복음을 전할 때 유대인들이 조직적으로 방해하고 음해하듯이 말이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유다 백성들이 성전을 재건코자 할 때 그때도 동서남북의 사람들이 방해공작을 펼치듯이 말이다.”

그때 바울이 얼마나 심적으로 영적으로 힘들고 괴로웠겠느냐?”

그때 유다 백성들이 얼마나 낙심되고 절망감에 사로잡혔겠느냐?”

네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받들어 순종하려는데 그렇게 방해하고 음해한다면 너도 낙심되고 절망에 사로잡히지 않겠느냐?”

 

그러나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그런 상황속에도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말도록 해라.”

나 여호와, 전능하신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이신 주님,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께서 너와 함께 하고 있으니 말이다.”

바울이 영적으로 지치고 낙심될 때 주님께서 말씀으로 격려해줬듯이 너에게도 말씀으로 친히 격려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바울이 사방으로 우껴삼을 당해도 싸이지 않았고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을 수 있었다.”

너도 네 주변에서 영적으로 힘들고 때로는 인간적으로 실망감을 안겨주는 이가 있을지도, 주님께서 함께 하심을 바라보고 새 힘을 얻도록 해라.”

 

(찬양)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 하시며 즐거이 부르며 기뻐 기뻐하시리라 즐거이 부르며 기뻐 기뻐하시리라

 

 

[전자책] 하나님의 시간표

이 책은 지난 몇 년간 설교 말씀을 통해 나눈 예화다. br예화는 설교에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다. br말씀의 이론을 실제화할 수 있는 간증이기 때문이다. br그만큼 예화는 설교에서 중요한 몫을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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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일반적으로 병이 들었을 때 환자가 선택할 수 있는 치료 방법은 네 가지가 있죠.

첫째는 서양의학, 둘째는 한의학, 셋째는 대체의학, 마지막 넷째는 주님의 치유를 바라는 신유입니다.

그런데 크리스천 가운데는 자신이 선택한 치료방법 이외의 나머지 방법에 대해 배타적인 입장을 갖고 있는 분들도 있죠.

이를테면 서양의학 외에는 모두 불신한다든지, 대체의학을 내세우기 위해 서양의학과 한의학을 모두 부정한다든지 말이죠.

그런가 하면 신유의 은혜를 입기 위해 세상의 모든 치료 방법을 포기하는 이들도 있죠.

 

과연 어떤 방법이 옳은 것일까요?

스티븐잡스가 56세에 암으로 죽었을 때 그는 대체의학만 신봉할 뿐 다른 치료 방법을 모두 놓친 사람이었죠.

그가 대체의학을 통해 치료하면서도 서양의학, 한의학, 주님의 신유까지 행했다면 좀 더 오래 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그런데 주님의 신유를 덧입는다면서 세상의 모든 치료 방법을 끊어야 한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너무나 어리석은 사람일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런 방법만 고집하도록 했다면 이 세상의 서양의학이나 한의학이나 대체의학은 아예 만들지 않도록 했을 것입니다.

만야 그런 의학이 발전하지 못했다면 지금도 사소한 질병이나 전염병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을지 모르죠.

심한 감기에 걸린 크리스천이 주사를 맞거나 약을 먹고 감기의 고통에서 해방된다면 그 약을 통해 주님의 치유를 덧입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더욱 큰 은혜가 넘치기 때문입니다.

 

왜 그런 이야기를 드리는 것일까요?

제가 아는 목사님 한 분이 전립선암 4기에 걸렸을 때, 그 교회 성도들이 그렇게 수군수군거리는 일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목사님이 암 수술을 받고, 너무 방사선 치료에만 의존하는 게 아니냐, 하고 말이죠.

 

사실 그 분은 고려대안암병원에서 전립선암 검사를 할 때 열 두 군데 세포 조직검사에서 열 한 군데 세포가 암이었습니다.

암의 악성도를 나타내는 글리슨등급은 최악이 10인데 그 분의 등급은 9였습니다.

그렇게 고위험군 암환자의 치료방법은 암덩어리를 제거하는 것 뿐이었죠.

그와 동시에 방사선치료도 병행해야 했고, 현미밥을 먹는 것과 같은 대체의학의 장점도 따르기도 했죠.

그런데 놀랍게도 그 암덩어리를 다 제거했는데, 뼈나 림프에 전이된 게 하나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담당교수는 혹시도 모를 암세포가 0.001%라도 남아 있을 수 있기에 수술이후에 호르몬치료, 곧 방사선치료를 권한 것이었죠.

그때 그 목사님은 그 의사의 말을 신뢰하여 몇 차례에 걸쳐 방사선 치료를 받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방사선 치료를 받는 동안 하나님의 신유의 방법만 생각한 성도들 사이에 그런 말들이 오갔던 것이었죠.

 

그 후에 그 분은 은퇴할 때까지 정말로 건강한 모습으로 목회사역을 감당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어떻게 그 전립선 암 수술을 믿음으로 이겨낼 수 있었을까요?

서양의학을 통해 그 분이 수술을 받긴 했지만, 그 순간에도 죽을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였는데, 그때 설교테잎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 설교를 통해 주님께서 깨닫게 해 주시는 메시지는 분명했죠.

서양의학을 통해 주님께서 낫게 하시든, 천국으로 데려가시든 상관없이, 주님은 영원히 살게 하시는 분이란 사실이었죠.

이 땅에 70 강건하면 80, 지금은 100세라고 하지만, 결국 죽음을 통과하여 천국에 갈 것을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죠.

다만 60대 초반의 그 나이에 암수술을 하다가 떠나느냐, 아니면 그 후에 떠냐느냐 그 차이만 있을 뿐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설교 테잎을 듣는데, 주님께서 자신을 그렇게 위로하고 격려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〇〇. 내가 너와 함께 있단다. 과거에 수렁에서 너를 건져 주었던 내가 지금도 너와 함께 하고 있단다.”

주님의 그 격려하심 때문에 전립선암 덩어리를 제거하면서도 온전히 주님께 맡길 수 있었던 거죠.

 

(깨달음)이것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 성전재건을 하다가 지쳐버린 유다 백성들을 향한 주님의 위로하심과 같지 않나요?

고린도의 디도 유스도 집에서 복음을 전하다 낙심하고 불안해하는 바울을 향한 주님의 격려하심과 같은 음성 아닙니까?

 

바울아. 내가 너와 함께 있지 않느냐? 이전에 1차 전도여행 때 함께 했던 것처럼 지금도 너와 함께 하고 있지 않느냐?”

바울아. 유대인들이 조직적으로 너를 방해하고 위협해도 내가 너를 지켜줄 것이다. 이 성에 나의 자녀들이 많이 있다.”

바울아. 그러니 낙심하지 말거라. 내가 너와 영원히 함께 할 것이다.”

 

(내음성)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이 주님께 기도를 드릴 때 어떤 기도를 기뻐받으시겠습니까?

그래요, 주님. 저도 이 세상의 사람들로 인해, 이 세상 일로 인해 낙심되고 절망할 때도 있음을 솔직히 고백해요.”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좇아 순종해도 힘들게 하는 사람들, 힘든 일로 인해 낙심되고 속상할 때가 있음을 고백해요.”

이게 저의 연약한 모습이예요.”

그러나 주님, 오늘 본문의 바울에게 친히 찾아와 위로해주시는 주님, 저에게도 그렇게 격려해주심을 믿어요.”

말기 전립선암수술을 하는 그 목사님이 설교테잎을 통해 주님께서 친히 위로하시고 격려해주셨듯이, 저도 그렇게 붙잡아 주시는 줄 믿어요
제가 인간인지라 사람 때문에 세상 일 때문에 낙심될 때가 있지만, 그때마다 주님께서 나를 바라보시고 나와 함께 하심을 믿고 살아갈 수 있도록 힘을 불어넣어주세요.”
그리하여 부족한 제 인생 여정을 통해 주님께서 영광받으신다면, 그것으로 족하며 살게 해 주세요.”

(찬양)내가 누려왔던 모든 것들이 내가 지나왔던 모든 시간이

내가 걸어왔던 모든 순간이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아침 해가 뜨고 저녁의 노을 봄의 꽃 향기와 가을의 열매

변하는 계절의 모든 순간이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모든 것이 은혜 은혜 은혜 한 없는 은혜

내 삶에 당연한 것 하나도 없었던 것을 모든 것이 은혜 은혜였소

 

 

[전자책] 눈을 뜨면 볼 수 있어요

2020년 한 해 동안 코로나19로 인해 너무나 답답했다. 지금도 그게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앞이 보이지 않는 것 같고 모든 게 답답하기만 하다. 청년들도 꿈을 꿀 수 없는 상태다. 초등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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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닫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가 아닌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내가 이 땅에 두 발을 내 딛고 살고 있는 것도, 설령 암이 생겨 수술을 받고 방사선치료를 받는다 해도, 그 모든 것들이 주님의 은혜라는 사실입니다.

설령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믿음의 삶을 살다가 낙심되고 절망되는 사람과 일을 만나도, 그것조차 주님의 은혜라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순간순간 주님은 나를 알아봐주시고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말입니다.

그 모든 사실을 말씀을 통해 나를 위로하시고 우리의 고백을 통해 재확인시켜주시는 아바 아버지인줄 믿습니다.

 

바울에게 내가 너와 함께 하고 있으니 두려워하지 말아라.”하셨던 것처럼, 오늘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주님께서 동일하게 말씀해주시는 줄 믿습니다.

그런 은혜가 저와 여러분들에게 충만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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