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열기)(나예) 어제 지방회 감찰회 모임이 있어서 참석했습니다.
그 교회 목사님이 그런 간증을 하셨죠.
옛날 자신이 전도사로 있던 그 시절에 교회에서 찬양단을 인도할 때 겪은 일이었습니다.
그때 교회에 콘센트 하나가 고장이 났는데, 찬양단 땐 연결해 쓰고 끝나면 벌여놓곤 했다고 하죠.
어느날 본당 불어 꺼진 상태에서 청년 하나가 선을 연결코자 들어갔고 당시 전도사님은 기타를 들고 따라들어갔다는 거죠.
그런데 그 선을 잘못 연결해서 각각의 손등에 닿았는데, 그때 뒤에서 바라본 그 전도사님, 그 목사님의 표현이 꼭 그랬죠.
텔레비전에서 보는 그 장면이 그대로 연출되더라는 것 말입니다.
목소리도 변조되는 목소리처럼 “나 타죽겠어요.”하더라는 것이죠.
그때 그 전도사님이 어떻게 했을까요?
저 같았으면 전도사님을 붙잡아서 떼어내려고 했겠는데, 그 전도사님은 신발 신은 발로 그 청년을 차냈다고 하죠.
그랬더니 그 청년이 떨어져나가면서 전기감전이 멈춰섰다는 것입니다.
(깨달음) 지금은 그 청년이 자기 매제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때 겪은 일을 그 뒤에 물어봤더니,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전기감전 충격이 그렇게나 큰 것임을 처음 알게 되었는데, 전기감전이 일어난다면, 저와 여러분들도 발로 차야 한다는 것 기억했으면 좋겠네요.
(예화) 그 이야기를 듣는 동안 지선 전도사님에 관한 이야가 떠올랐습니다.
지선 전도사님은 지난 주 다니엘기도회 때 간증을 했는데, 작년에 수능시험을 마친 당일날 저녁에 목포극동방송에서 간증한 분이죠.
그녀는 어린 시절 부모의 이혼으로 대전의 큰 집에 내려갔는데, 고등학교 때까지 위염에 시달렸고 코피를 쏟았죠.
고3 때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 무료로 성악 레슨을 받았고 1년 만에 음대에 합격했습니다.
하지만 학비문제와 인간관계로 휴학을 결심했는데, 전체 수석장학금을 받았고 이후 음대 교수들의 후원으로 독일유학 비행기 티켓과 베를린의 방도 얻게 되었죠.
그런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커서 새벽기도에 나갔습니다.
그런데 그날 누군가 자신을 안아주는 느낌을 받게 되었죠.
“하나님이 진짜 살아계신가?”하는 생각을 처음 한 것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새벽기도는 계속되었고 그 와중에 대전시립합창단에 합격하는 은혜를 덧입게 되었죠.
그 후 27살 때에 지금의 남편을 만나 결혼을 했고 집도 생겼고 첫째와 둘째까지 낳았죠.
그런데 큰아이가 5살 무렵에 젓가락을 콘센트에 넣어 감전사가 일어나는 일을 겪은 것입니다.
그때 손가락 10개가 연기 나는 상태로 입원을 한 것이죠.
의사들은 남은 손가락을 살리기 위해 엉덩이 살을 이식해 손가락을 배에 꽂아 재생수술을 했죠.
그러니 엄마의 심정으로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화상을 입은 환자들 앞에 그녀가 찬양을 했습니다.
그날 성령님께서는 누워있던 환자들의 영혼이 일어나는 걸 목격하도록 해 주셨습니다.
그때 그녀가 선택한 것은 공무원 자격을 누리던 시립합창단을 내려놓고 찬양사역자의 길을 택한 것이었죠.
(깨달음)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부르심은 신묘막측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참으로 신기한 방법으로 당신의 자녀를 부르시는 분이시죠.
(적용)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방법도 그와 다르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통해 누군가를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실 그 방법도 그와 같다는 점이죠.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시는 주님의 메시지도 바로 그와 같습니다.
(역배) 바울이 아테네에서 복음을 전하는데 많은 열매를 거두지 못했죠.
겨우 주님의 자녀가 된 사람은 아레오바고의 관리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 하는 여자와 몇 몇 사람들이었죠.
그러나 그들 몇 사람을 통해서도 주님은 함께 하셨고, 디오누시오는 훗날 아테네의 감독이 되었다고 요세푸스가 전하고 있죠.
더욱 중요한 것은 바울이 오늘 본문을 통해 아테네에서 왜 고린도로 옮겨갈 생각을 했는가, 하는 점입니다.
만약 아테네에서 복음을 전하는 게 실패라고 생각했다면 바울은 그때 짐을 싸서 안디옥교회로 돌아와버렸겠죠.
하지만 그가 짐을 싸지 않고 계속 고린도로 선교여행을 떠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고린도전서 16장 15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형제들아 스데바나의 집은 곧 아가야의 첫 열매요 또 성도 섬기기로 작정한 줄을 너희가 아는지라”
바울은 고린도전서를 써 보내면서 ‘스데바나’가 바로 ‘아가야의 첫 열매’라고 밝힌 것입니다.
그 ‘아가야’는 로마의 행정구역상 그리스의 남쪽지역을 가리키는 말이고, 북쪽은 마게도냐로 칭했죠.
그만큼 아테네 위쪽은 마게도냐지역이고, 아테네를 포함한 그리스의 아래쪽은 모두 아가야 속주(屬州)였던 것이죠.
당시 아가야에 포함된 도시는 아테네, 겐그레아, 스파르타, 델피, 그리고 고린도가 있었는데, 당시 아가야의 수도가 고린도였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써 보내면서 ‘스데바나’를 아가야의 첫 열매라고 표현한 것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겠죠.
바울이 아가야에 속한 아테네에서 복음을 전할 때 처음 영접한 사람은 디오누시오와 다마리 뿐만 아니라 고린도에서 아테네로 올라온 스데바나란 사람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스데바나가 아테네에서 바울이 전한 복음을 영접하고 주님의 자녀가 된 것이었고, 그를 통해 바울이 고린도로 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만큼 스데바나는 주님께서 바울을 위해 친히 준비하신 복음의 준비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우리가 복음을 전하거나 성도를 섬길 때 아주 작고 미약해 보여도, 하나님께서는 그 한 사람을 통해 놀라운 역사의 길을 열어가신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게 하신 것이죠.
(전개) 아가야의 속주에 속한 아테네에서 고린도까지는 3일길 정도 걸립니다.
그런데 바울이 고린도에 당도했을 때 그곳 고린도는 어떤 도시였을까요?
그곳 고린도는 오이디푸스 이야기가 전해내려오는 곳입니다.
테베의 왕 라이오스와 왕비 이오카스테가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이가 장성하면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할 것이라는 신탁을 받죠.
그래서 왕이 그 아이를 두 발을 쇠사슬에 묶어 숲속에 내다버렸는데, 목동이 발견해서 고린도의 왕 폴리보스에게 바치죠.
그때부터 고린도 왕 폴리보스는 자기 아들로 삼았는데, ‘부은 발’을 뜻하는 의미로 ‘오이디푸스’라고 지어줬죠.
그가 이제 장성해서 델포이 신전에서 신탁을 받는데, 역시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할 것이라는 이야기였죠.
그래서 고린도로 돌아가지 않고 다른 길을 가다가 외길에서 자신도 모르는 친아버지와 싸우다 죽이게 되죠.
그 후에 테베 사람들을 괴롭히는 스핑크스를 만납니다.
스핑크스가 아침에는 네 발, 낮에는 두 발, 저녁에는 세 발로 가는 걸 묻는데, 오이디푸스가 ‘사람’이라고 맞추죠.
그러자 오이디푸스가 테베를 구했다면서 테베의 왕이 되는데, 바로 그가 어머니였던 이오카스테를 왕비로 맞이하게 되죠.
나중에 그 사실을 알게 된 그의 어머니는 자결하고, 오이디푸스는 두 눈을 찔러 눈이 먼 채로 사방을 헤매게 되죠.
바로 그것으로부터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란 말이 나온 것이죠.
동성의 부모에게는 시기와 질투심이 생기고 이성의 부모에게는 애정이 생긴다는 것 말이죠.
바로 그 배경이 나온 곳이 고린도죠.
그런데 고린도는 그런 배경만 있는 게 아니라, 서양의 대표적인 건축양식인 코린트식 양식도 유명하죠.
도리스식, 이오니아식 그리고 코린트식 중에 가장 우아하고 세련된 건축기술이 5세기 경의 코린트 식으로 알려져 있죠.
그런 건축기술을 사용했다면 경제적으로 얼마나 풍부한 곳이었는지 알 수 있는 것이죠.
그 정도로 고린도는 경제적으로 대부흥기를 맞이한 도시였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그토록 경제적인 번영을 구가하던 고린도는 주전 146년에 로마 제국에게 정복당하면서 옛 영화를 상실했습니다.
그러다가 주전 44년 로마제국의 카이사르가 재향군인들과 자유민이 된 노예들을 고린도로 대거 이주시켜서 예전의 고린도보다 더 큰 규모로 고린도를 재건했습니다.
그때부터 고린도에는 원지인보다 외지인들이 몰려들어 각양각색의 이주민들이 어울려 사는 도시가 된 것이죠.
더욱이 그곳 고린도는 그리스 본토와 펠로폰네소스반도를 잇는 해협이 있어서 고린도 동서양쪽에 항구가 있는 도시였습니다.
그러니 무역의 중심지로 자리잡을 수밖에 없었던 도시였죠.
2천년 전 인구 60만명이 사는 고린도는 로마제국의 4대 도시에 속한 대도시였습니다.
하지만 도시 구성원들이 자기 정체성이 없었고, 오직 경제적인 부만 축적할 뿐이라, 그만큼 타락할 수밖에 없는 도시였죠.
고린도가 쾌락과 향락과 술취함과 음욕과 방탕이 난무하는 도시였던 이유가 그것이죠.
그 뿐만이겠습니까?
아테네 역시 항구도시로서 세계 곳곳의 무역상들이 찾아와 아르테미스 신전 앞에 빌고 또 빌었다고 했습니다.
고린도도 항구도시였고, 그곳에는 아폴로 옥타비아누스 판테온 포세이돈 헤라, 헤라클레스, 헤르메스 등 온갖 신전들이 서 있는 곳이죠.
그러니 고린도 시장에 나오는 음식들은 대부분 그런 신전 앞에 바쳐진 음식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신전은 해발 575미터의 바위 정상에 세워진 아프로디테 신전이었습니다.
영어로는 비너스인데, 그 신전에 1천명에 달하는 여사제들이 있었는데, 그녀들은 신의 이름으로 합법적으로 매음을 하던 매춘부들이었죠.
바로 그런 고린도에 들어갔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 보면 아테네에 들어간 것보다 더 무모한 일 아니었겠습니까?
마치 다윗이 골리앗을 맞서 싸우는 것처럼,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과 같은, 그런 격이지 않겠습니까?
(본문) 그런데 오늘 본문 1-3절이 이렇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 후에 바울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르러
아굴라라 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한 사람을 만나니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 고로 그가 그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로부터 새로 온지라 바울이 그들에게 가매
생업이 같으므로 함께 살며 일을 하니 그 생업은 천막을 만드는 것이더라”
(깨달음) 무엇을 깨닫게 하는 말씀입니까?
아네테보다 더 큰 대도시고, 아네테보다 신전들이 즐비하고, 아프로디테 신전에는 1천명의 여사제들이 있는 곳이라 영적으로 답답한 지경 아니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인도하심 속에 천막만드는 바울에게 어울리는 사람 아굴라를 만나게 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예비하심이죠.
(적용) 앞서 말씀드린 전기감전사를 통해서도 하나님께서 동역자를 만나게 하시고, 어린 아이의 감전사를 통해 그 어머니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부르시는 모습처럼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이 고린도에 가기 전에 아테네에서 복음을 전할 때 이미 고린도에서 올라온 스데바나를 통해 고린도를 준비해주셨듯이 말이죠.
그리고 직접 고린도에 왔을때도 하나님께서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를 통해 복음의 길을 열고자 하신 것이죠.
(주문) 그렇다면 본문 말씀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고자 하시는 은혜가 무엇인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은혜) 주님께서는 우리가 복음을 위한 길을 걷고자 할 때 주님께서 준비하신 사람들을 만나게 하신다는 것이죠.
(주음성)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뭐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네가 나를 위한 복음의 길을 걷고자 하면 너에게 합당한 사람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도록 해라.”
“복음은 네 힘으로 전하는 게 아니라 내가 준비한 길을 통해 열어가는 것이니 말이다.”
“바울이 아테네에서 복음을 전할 때 어떻게 고린도에서 올라온 스데바나를 만날 줄 생각이나 했겠느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네가 하나님나라를 위한 뜻을 품고 기도할 때 내가 너에게 준비된 영혼을 붙여주지 않겠느냐?”
“네가 온 우주의 충만하신 하나님의 뜻을 묻고 기도할 때 너에게 준비된 길을 열어주지 않겠느냐?”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자에게 어찌 하나님께서 그 길을 선하게 인도하지 않겠느냐?”
(찬양)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나는 이 길을 가리라 좁은 문 좁은 길 나의 십자가 지고
나의 가는 이 길 끝에서 나는 주님을 보리라 영광의 내 주님 나를 맞아 주시리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나는 일어나 달려가리라 주의 영광 온 땅 덮을 때 나는 일어나 노래하리
내 사모하는 주님 온 세상 구주시라 내 사모하는 주님 영광의 왕이시라
(발췌) 김우현의 〈하나님 심장〉이란 책에 나온 내용입니다.
김우현 감독을 아실 것입니다.
그분은 맨발로 서울의 전철을 타고서 복음을 전하는 최춘선 할아버지의 〈팔복〉이란 영상을 찍어서 널리 알려졌죠.
실은 그 최춘선 할아버지가 가난해서 맨발로 다닌 게 아니라 부유한 유학자요 실력자였지만 주님의 뜻을 몸소 실천한 것이었죠.
더욱이 최춘선 할아버지는 일본에 유학을 간 분으로, 그 당시 우찌무라 간쪼의 제자인 가가와 도요히꼬 목사(1888-1960)에게서 세례를 받았죠.
그때 은혜를 받아 젊은 시절 김구 선생님과 함께 일제 치하에서 광복군 독립투사로 일했죠.
광복 후에는 참된 ‘조선산 기독교’와 ‘조국 통일’을 위해 또 가난한 이들의 이웃으로 삶을 살고자 땅도 재산도 다 나눠준 분이었죠.
바로 그와 같은 최춘선 할아버지의 탁발 선교기행을 김우현 감독이 찍은 게 〈팔복1〉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였습니다.
그런데 그 김우현 감독이 팔복 시리즈를 찍고 유명세를 탔는데, 그 후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아 음지로 숨어들었죠.
그때 성령님께서는 〈하늘의 언어〉 곧 방언의 세계를 그에게 열어주셨고, 일본에까지 가서 집회를 하게 되었죠.
그런데 일본 집회 때 K교수란 분을 만나 ‘이스라엘의 언약’에 대해 듣게 됩니다.
솔직히 그때까지 김우현 감독은 메시아 예수를 죽인 이들은 이스라엘 민족이고 그들은 끝나버렸다고 생각을 했죠.
그런데 K교수님의 이야기를 듣고 또 한국에 돌아와 여러 동료들과 교제하면서 그게 아님을 알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이스라엘의 회복’을 기대하고 있다는 걸 깨달은 것이죠.
그 후에 김우현 감독은 고향땅 강원도 춘천으로 집회를 갔습니다.
그때도 이스라엘을 향한 아버지의 마음을 열어주세요, 하고 기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춘천에서 한 자매를 만났는데 그녀가 놀라운 이야기를 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1990년대 초에 한국에 온 메시아닉쥬 목사님들의 설교를 듣고 감동을 받은 자매였습니다.
메시아닉쥬란 유대인들 가운데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이들을 말하는 것인데, 그 중에 목사님들도 있다는 것이었죠.
그때부터 그녀는 이스라엘을 위해 눈물로 기도를 했고, 용돈을 아껴서 메시나익쥬 교회에 헌금을 보냈다는 것입니다.
그때부터 김우현 감독은 이스라엘의 회복 곧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도록 기도하며 성령님의 뜻을 간구했죠.
그 후 일본 호카이도 삿포로에서 연합집회를 인도하면서 일본과 한국인이 주님 안에서 하나가 되어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2008년 여름, 처음으로 김우현 감독이 이스라엘 땅을 밟게되는데, 그곳에서 아셔 인터레이트 목사를 만나게 됩니다.
그는 하버드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유대인이었는데, 그 분이 1970년에 기적적인 방법으로 주님을 만나 메시아닉쥬 목사였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춘천에서 만난 그 자매가 기도하고 선교비를 보낸 분이 바로 아셔 인터레이트 목사였던 것입니다.
그 후로도 김우현 감독이 열 번에 걸쳐 이스라엘 땅을 다녀왔습니다.
그때마다 이스라엘을 위해, 전 세계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영접하도록, 간구했는데, 그곳에서 놀라운 간증을 듣게 되었죠.
미국에서 이스라엘을 위해 기도하는 ‘레베카’라는 자매가 어스름한 저녁에 혼자 예루살렘의 유대인 구역을 돌며 중보기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 자기를 따라오는 기척을 느껴서 불안한 마음으로 걸음을 재촉하게 되었죠.
그때 뒤에서 누군가 ‘레베카’하고 자기 이름을 부르며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뒤돌아보지 마세요. 주께서 당신 이름을 알려주셨고, 이 말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는 거리를 두고 따라오면서 조용히 그녀에게 놀라운 말을 전했습니다.
그는 정통 유대인 랍비였는데, 어느날 50여 명의 랍비들이 모여 메시아에 대한 예언을 연구하고 토론하고 있었답니다.
그런데 갑자기 누군가 노크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문을 열어보니 뜻밖에도 자기들이 가장 경멸하는 “예수아”(예수님의 히브리 이름)가 서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한순간에 그분이 예수님인 줄 영적으로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당황하는 그들에게 마치 엠마오의 두 제자에게 말씀하셨듯이 그렇게 가르쳐주셨다는 것입니다.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아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령에 쓴 바 자기에게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눅24:25-27)
바로 그와 같은 주님을 만난 이후에는 그곳에 모인 랍비들이 모두 주님을 구주로 영접하여 변화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중의 한 랍비가 레베카를 따라오는 랍비였던 것입니다.
그때 그 랍비는 성령님의 은사를 통해 주님의 음성을 직접 듣게 되었다고 하면서 그 말씀을 레베카에게 전하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자매님 이런 역사가 일어나고 있음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전 세게의 유대인들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도록 중보하라고 하셨습니다.”
(깨달음) 우리에게 무엇을 깨닫게 하시는 사건 같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고 교회를 세워나가는 것, 복음을 전하고 한 사람을 주님의 자녀로 삼는 것, 너무나도 귀한 일이 아닐 수 없죠.
그런데 그것을 내가 주도권을 가지고 하려고 하기보다 전적으로 성령님께 내어맡기고 기도하면 그런 사람들을 붙여주신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더욱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회복 곧 무화과나무 잎이 무성하게 될 때 즈음엔 주님의 재림이 곧 다가올 때임을 알려주시는 것이죠.
주님의 재림이 오기 전에 곳곳에 복음이 전해지겠지만 궁극적으로 무화과를 상징하는 유대인들이 회복이 되면 주님의 재림은 더욱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내음성) 그를 위해 우리가 주님께 기도할 때 어떤 기도를 기뻐 받으시겠습니까?
“그래요, 주님. 내가 누군가를 전도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주님께서 열어 주세요.”
“내가 주님의 뜻을 좇아 기도할 때, 주님의 뜻을 묻고 기도할 때 주님께서 필요로 하는 사람을 붙여주세요.”
“김우현 감독이 성령님의 길을 좇아 순종할 때 춘천에서 준비된 자매를 만나게 해 주셨고, 이스라엘 땅에서 메시아닉쥬 목사를 만나게 해 주셨잖아요.”
“또 레베카라는 자매에게 유대 랍비 출신의 메시아닉 목사를 만나게 하셔서 하나님의 계획을 알려주셨잖아요.”
“주님, 저도 주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며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준비된 사람을 만나 복음을 전하고 주님께 인도할 수 있도록 역사해 주세요.”
“그리하여 내가 두 발을 내 딛고 사는 이곳의 바울의 고린도와 같은 그 지경이 되게 해주세요.”
(찬양)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나는 이 길을 가리라 좁은 문 좁은 길 나의 십자가 지고
나의 가는 이 길 끝에서 나는 주님을 보리라 영광의 내 주님 나를 맞아 주시리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나는 일어나 달려가리라 주의 영광 온 땅 덮을 때 나는 일어나 노래하리
내 사모하는 주님 온 세상 구주시라 내 사모하는 주님 영광의 왕이시라
(설교닫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일은 천하보다도 귀한 한 영혼이 주님께 돌아오는 일 아니겠습니까?
그를 위해 바울을 사용하셨고, 그를 위해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를 사용하신 것 아닙니까?
그것은 바울의 의지도 반영된 일이지만 실은 성령님께서 하나님의 뜻 가운데 준비하시고 예비하신 은혜였습니다.
바울이 아테네에서 복음을 전할 때 고린도에서 올라온 스데바나를 미리 준비하셔서 고린도로 이끄신 것처럼 말입니다.
김우현 감독의 길도, 또 지방회 목사님의 그 길도, 지선 전도사의 그 길도, 오늘 저와 여러분의 길도 마찬가지인 줄 믿습니다.
아무쪼록 주님의 나라를 위한 한 영혼을 만날 수 있도록, 그 영혼을 주님께 인도할 수 있도록 기도할 때, 성령님께서 가장 선한 예비하심의 길을 열어주실 줄 믿습니다.
그것은 영혼을 전도하는 것 뿐만 아니라 우리 삶의 일도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에 우선순위를 두고 간구할 때 성령님께서 합력하여 선으로 이루시는 놀라운 일을 만나게 해 주실 줄 믿습니다.
그런 은혜의 주인공들이 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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