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열기)(논지) 다른 종교와 기독교의 차이점이 있죠.
다른 종교는 인간이 신을 만나고자 득도하고자 하지만 기독교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찾아오신 종교죠.
다른 종교는 신이 인간을 떠나 멀리 존재하는 신이지만 기독교는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시죠.
주일날도 살펴봤지만 무당이 굿을 하는 이유도 멀리 있는 귀신을 달래고 얼래서 액땜을 하기 위함이죠.
하지만 하나님은 인간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맡겨주신 분으로, 천지만물의 소유권자요 통치권자이시죠.
그 하나님은 우리와 임마누엘로 함께 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했을 때, 진노하고 죽이고 멸망시킨 분이셨나요?
오히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하시면서 찾아오셨고, 그런 그들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혀주셨죠.
더욱이 그들을 에덴동산에서 추방했을 때, 그곳은 에덴동산 바로 앞이었습니다.
그것은 에덴동산 앞에서 창조주 하나님을 바라보며 영생을 갈망하는 피조물로 살도록 하신 하나님의 배려였습니다.
그것은 갈대아 우르에서 아버지 데라를 따라 우상을 만들어 팔던 아브라함도 마찬가지 아니였습니까?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었던 것, 창대와 번영의 씨앗인 이삭을 얻게 된 것, 그것은 그의 믿음 때문이 아니었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먼저 찾아와주셨고, 그의 연약함 가운데서도 그를 긍휼로 감싸주셨기에 믿음의 아버지가 된 거죠.
그런 모습은 애굽에 팔려가 종살이하던 요셉도 마찬가지요, 사울의 칼날을 피해 도망자의 삶을 살던 다윗도 마찬가지였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택하신 자들에게 먼저 찾아와 은혜를 베풀어주셨고, 그들을 끊임없이 긍휼로 품어주신 아버지이십니다.
그 하나님께서는 멀리 있는 다른 신들과 달리, 인간에게 찾아와 구원을 베푸신 가장 극명한 사건이 있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 십자가에 대속물로 죽게 하셔서 우리의 죄를 대속해 주신 사건입니다.
더욱이 그 분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지만,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하리라”(마28:20) 약속해주셨죠.
(깨달음) 그와 같은 사실을 통해 깨닫게 되는 바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나의 소유권자요 나의 통치자로서 ‘나의 주인’되시는 아버지라는 사실이죠.
그 분은 성령을 통해, 부활의 영이신 주님의 영을 통해, 언제나 당신의 자녀들과 함께 동행하시는 주인이라는 사실입니다.
그 분은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내가 하늘에 있든 땅에 있든 바다에 있든 지하에 있든, 언제나 나와 함께 하시는 분이시죠.
그 하나님을 의지하는 한 내가 어떤 슬픔과 괴로움과 고통과 두려움도 능히 이겨내게 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적용) 전에 어떤 목사님과 커피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그 분은 무릎을 세 차례나 수술을 했고, 그 후에 집에 있다 보니까, 무기력증도 밀려왔고, 심지어 공황장애 증세까지 겹쳤죠.
제가 그 분에게 제 이야기를 했죠.
작년과 제 작년에 딱 한 차례씩, 나도 공황장애가 온 것 같다고 말이죠.
그랬더니 그 분이 자신이 느끼는 증세를 이야기해줬습니다.
버스를 타도 공황장애가 오면 답답해서 죽을 것 같고, 누군가를 차를 타고 갈 때 그게 밀려오면 ‘잠깐 차를 세워달라’고 한다고 말이죠.
그때 제가 느끼는 것은 약간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제가 느겼던 것은 그런 공황장애가 아니라 지극히 영적인 부분임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옛날로 치면 가위눌림 같은 현상이라고 할 수 있죠.
아직까지 올해는 그런 증세가 없는데, 감사하면서도, 이제는 어떻게 하면 물리칠 수 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영적으로 짓눌림 같은 현상이 내게 밀려올 때, 내 안에 계시는 주님을 의지하면서 성령안에서 말씀으로 물리치면 된다는 것 말이죠.
바로 그것이 멀리 계신 주님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시는 주님과 동행하는 삶이요, 내 안에 계신 주님을 늘 의식하며 사는 삶인 줄 믿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역배) 바울이 홀로 아테네에 들어가 거대한 제우스 신전과 파르테논 신전을 비롯해 크고 작은 신전들을 바라봤죠.
더욱이 그곳 아테네에는 3만개나 되는 신상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는 ‘알지 못하는 신’이라고 쓰여 있는 신상도 있었죠.
더욱이 그곳은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철학의 발상지였고, 그 후에 두 개의 큰 철학 사조가 내려왔죠.
에피쿠로스주의자들과 스토아주의자들이 그들이었죠.
에피쿠로스주의자들은 신을 인정하지만 신이 인간의 삶에 관여치 않기에 내일을 걱정하지말고 오늘을 즐기라고 주장했죠.
스토아주의자들은 신을 인정하지만 만물에 신이 깃들어 있다는 범신론주의자들로서 신을 경배의 대상으로 섬기진 않았죠.
그런 철학자들에게 바울은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데, 그들이 바울을 아레오바고 언덕으로 데리고 갔죠.
그때 바울은 아테네 시민들의 종교성을 칭찬하지만 그들의 무지한 신관에 대해 이야기했죠.
너희들은 ‘알지 못하는 신’에까지 경배하지만, 나는 천지의 주재이신 하나님을 믿고 있다고 말입니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만물의 소유권자요 통치권자인 하나님을 ‘나의 주인’으로 모시고 있다는 뜻이었습니다.
더욱이 바울은 아테네 시민들이 그들의 신을 신전에 가둬두지만 하나님은 결코 신전에 제한받지 않는 분이라고 했죠.
뿐만 아니라 아테네 시민들은 그 신전의 신이 뭔가 부족하여 재물을 원하지만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의 재능까지 맡겨주신 분임을 선포했죠.
(본문) 오늘 본문은, 그 이후에 계속되는 바울의 복음선포인데, 본문 26-27절을 다시 한 번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니
이는 사람으로 혹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
(원해) 여기에 ‘한 혈통’으로 번역된 헬라어 ‘엑스 헤노스’(ἐξ ἑνὸς)는 ‘한 종족’(a tribe)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한 종족의 기원이 누구로부터 비롯되는 것입니까?
바로 아담 한 사람으로부터 모든 종족이 시작되는 것이죠.
그 아담으로부터 가인과 아벨이 나오고, 가인의 후예들 곧 각 종족이 나오고, 또 셋 대신에 에노스의 종족이 나왔죠.
(깨달음) 바울이 하나님께서 그 ‘한 혈통’을 통해 온 땅에 인류가 살게 하셨다고 철학자들에게 이야기하는 바가 무엇일까요?두말할 것도 없이 지금 아테네 시민들도, 너희 철학자들도, 실은 아담의 후손이라는 뜻입니다.
바로 그 하나님께서 아담의 후손들에게 연대를 정하시고 거주지를 정해주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너희들도 아담의 후손으로서 죄를 안고 태어난 죄의 후손이라는 사실이죠.
그런데 바울은 그것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더욱 중요한 복음의 핵심을 정하죠.
너희 아테네 사람들은 신을 더듬어 찾아 발견코자 하지만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결코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는 사실 말이죠.
(원해2) 여기에 ‘더듬다’는 헬라어 동사 ‘프셀랍하오’(ψηλαφάω)는 ‘만지다’(touch), ‘느끼다’(feel)는 뜻입니다.
사실 인간이 하나님을 만지고 느끼려면 왜 못하겠습니까?
봄이 가면 여름이 오고 여름이 가면 가을이 오고 가을이 가면 겨울이 오는 사철의 변화 속에도 하나님을 감지할 수 있죠.
또한 거센 비바람을 통해 홍수의 심판을 느낄 수 있고, 지진과 자연재해를 통해서도 하나님의 심판을 감지할 수 있죠.
어디 그 뿐이겠습니까?
이 세상에 불의가 판을 칠지라도 그것은 잠시 잠깐이요 결국에는 정의가 반드시 승리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 역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통치하시기에 가능한 일 아니겠습니까?
만약 하나님께서 인류의 통치자로 존재하지 않는다면, 수많은 신들이 통치한다면, 과연 그 일이 가능하겠습니까?
오히려 그 수많은 신들의 다툼과 싸움으로 인해, 어찌 정의가 승리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 한 분이 온 우주의 통치자요 소유권자이시기에 이 세상은 정의가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는 것이죠.
(깨달음) 바울은 그러나 그런 자연계를 통해서만, 불의와 정의를 통해서만 하나님을 감지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말합니다.
27절 하반절에 하나님은 너희 아테네 신들처럼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가까이 계신 분이라고 선포하고 있는 것이죠.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에게 임마누엘로 함께 하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의 심령 속에 성령을 통해 부활의 영이신 주님의 영을 통해 말씀으로 이끌어주신다는 뜻이죠.
모든 신들은 멀리 있기에 인간의 치성으로 만나고 찾아야 하지만, 하나님은 먼저 찾아와주시고 만나주시고 동행해주신다는 말씀이죠.
서두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아담과 하와에게도, 아브라함에게도, 요셉에게도, 다윗에게도 그렇게 먼저 찾아와주시고 함께 해 주신 주님이십니다.
뿐만 아니라 당신의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주셔서 십자가 대속과 부활을 통해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시죠.
주님은 지금도 세상 끝날까지 나와 함께 하시는 분임을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주문) 그렇다면 오늘 바울의 그 선포를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고자 하는 은혜가 무엇인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은혜) 주님은 이 세상에 멀리 있는 신들과 달리 우리와 가까이 친밀하게 계시는 은혜를 베풀어주길 원하시는 분입니다.
(주음성) 그래서 오늘 성령님의 음성을 통해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너는 하나님께서 저 멀리 하늘에 계신 분으로 생각한 적은 없었더냐?”
“너는 미신을 숭배하고 귀신을 부르는 무당들처럼 하나님을 그런 신으로 착각한 적은 없었더냐?”
“하나님은 언제나 너에게 먼저 찾아와주시고 너를 만나주시고 너와 동행하는 하나님이시지 않더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네게 근심과 걱정과 두려움과 공포가 밀려올 때 그때도 네 안에 계신 주님을 결코 놓치지 말도록 해라.”
“네 몸에 이상징후가 찾아오고 영적으로 짓누르는 세력들이 다가올 때 네 안에 계시는 주님을 신뢰하도록 해라.”
“네가 땅에 있거나 하늘에 있거나 바닷가나 땅 속 지하에 있을 때도, 하나님은 임마누엘도 너와 함께 하고 있는 걸 놓치지 말아라.”
“다윗이 사울의 칼날을 피해 도망자로 살던 8년 동안에도, 광야의 이슬을 머금고 잘 때도 그런 고백을 하지 않았더냐?”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 몰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다(시34:10)고 말이다.”
“솔로몬도 그의 잠언을 통해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더냐?”
“오히려 그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3:6)하고 고백하지 않았더냐?”
“너도 그 하나님을 가까이 계신 하나님으로, 네 심령 안에 말씀으로 동행하는 하나님으로 믿고 의지하길 원한다.”
(찬양) 하나님은 너를 만드신 분 너를 가장 많이 알고 계시며
하나님은 너를 만드신 분 너를 가장 깊이 이해하신단다
하나님은 너를 지키시는 분 너를 절대 포기 하지 않으며
하나님은 너를 지키시는 분 너를 쉬지 않고 지켜보신단단
그의 생각 셀수 없고 그의 자비 무궁하며
그의 성심 날마다 새롭고 그의 사랑 끝이없단다
(발췌) 강준민 외 15인의 〈그래도 사랑합니다〉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오랫동안 공직생활을 하신 분이 있습니다.
그는 사회적으로 저명한 인사죠.
그분은 장관직을 두 번이나 역임해서 귀한 일을 많이 하신 분입니다.
그런데 그 분은 10년 전에 병원에서 암으로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때 이미 암세포가 온 몸에 퍼져 있는 상태였습니다.
병원에서는 수술을 해도 6개월을 넘기기 어려우니 수술을 포기하고 사는 날까지 살라고 권면을 했죠.
그런데 벌써 10년이 지났습니다.
아직도 말씀도 잘 하고 식사도 잘 합니다.
활동하는 데 조금 불편하지만 살아가는 데는 지장이 없습니다.
그분 말씀이 자기는 매일 자기 속에 있는 암세포와 대화를 나눈다고 합니다.
“야, 어차피 네가 살겠다고 내 몸 속에 들어왔으니 우리 서로 괴롭히지 말고 너도 살고 나도 살자.”
“네가 나를 너무 괴롭히면 내가 어쩔 수 없이 내 몸에 칼을 댈 수밖에 없지 않니?”
“칼을 대는 순간 너도 죽지 않니?”
“내가 살아야 너도 살지.”
“내가 죽으면 너도 죽을 수밖에 없지 않니?”
“그러니 너도 살고 나도 살기 위해서 우리 서로를 괴롭히지 말고 함께 살자!”
그런 식으로 매일 몸 속에 암세포와 대화를 나눈다고 하죠.
그리고 이따금 통증이 느껴질 때면 이렇게 달랜다고 합니다.
“알겠다. 너 지금 살아 있다고 내게 신호를 보내는 모양인데 그 정도로 충분하다.”
“더 아프면 내가 견디기 괴로우니까 그 정도 신호를 보내는 것으로 만족하자.”
(깨달음) 어떻습니까?
우리가 살다 보면 때로는 우리의 육체를 찌르는 가시가 있을 수 있지 않습니까?
때로는 우리의 마음을 찌르고 우리의 심령을 찌르는 사람의 가시도 있을 수도 있죠.
하지만 그것 때문에, 그런 사람 때문에 너무 괴로워하지 말아야 하겠죠.
암과 함께, 우리의 마음을 찌르는 사람과도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하는 존재가 우리 자신이기 때문이죠.
그것이 성숙한 신앙인의 모습이기 때문이죠.
(적용) 그런데 암 세포가 꿈틀거릴 때, 자신을 콕콕 찌를 때, 그분이 그 암세포를 향해 달래듯이 말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 것처럼, 우리의 심령 안에 계시는 주님과도 그렇게 달래고 기도하고 아뢴다면, 얼마나 주님이 기뻐하시겠습니까?
내가 뭔가 죄악을 범할 때 “하나님, 제가 이렇네요.”하고 기도를 드린다면 말입니다.
또 뭔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심을 좇아 행했을 때 “하나님, 제가 그렇게 순종했어요. 주님 기쁘시죠?”하고 기도한다면 말이죠.
(성화) 이 모습은 요즘 새벽에 살펴보고 있는 아사 왕도 마찬가지죠.
그는 남왕국 유다의 세 번째 왕이었습니다.
그는 증조 할아버지 솔로몬의 치세 후반에 세운 우상과 이방 신상들을 다 허물어뜨리고 아세라 목상까지 파쇄했죠.
그래서 통치 10년 만에 하나님께서 태평성대를 이루게 해 주셨고, 구스 곧 에디피아 왕이 100만 대군을 이끌고 올 때 58만으로 맞서 싸웠죠.
그때 그는 “강한 자와 약한 자 사이에 도울 이는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하면서 간절히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도움을 구했죠.
그때 하나님께서는 100만 대적 중에 50만이 넘는 이들이 자중지란이 일어나 승리하게 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의 통치 36년에 북 왕국 이스라엘의 바아사가 유다를 위협하고자 라마 성을 건축하려고 하죠.
그때 아사 왕은 그의 심령 속에 계신 하나님께 어떻게 해야 할지 물어야 했는데, 전혀 그런 게 없이 아람 왕에게 뇌물을 바쳐 도와달라고 하는 것이었죠.
그때 하나님께서는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가까이 함께 하신 분임을 알리고자, 그의 어리석음을 책망코자 선견자 하나니를 보냈죠.
그런데 그는 가까이 계신 하나님, 그의 심령 속에 임마누엘로 계신 주님을 그의 심령에서 몰아내버렸죠.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견자의 책망을 무시한 채 그를 감옥에 가둬버린 게 그런 모습이었죠.
더욱이 그의 통치 말년 곧 그의 통치 39년째에는 하나님께서 그를 깨우도록 발에 병을 가져다주셨죠.
(깨달음) 그때 어떻게 합니까?
암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했던 그 장관과는 달리, 아사 왕은 하나님은 완전히 제쳐놓고 의원들만 찾아나서기에 바쁜 모습이었죠.
완전히 세속적인 인본주의자로 전락해 버린 것이었습니다.
병이 들었을 때 의사를 찾아가는 것을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실 분이 아니죠.
다만 그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그에게 가까이 계신 하나님을 제쳐놓고 세상 방법만 의지하며 살아가는 어긋난 모습을 탄식하시는 것이죠.
(내음성) 그렇기에 우리가 주님께 기도할 때 어떤 기도를 기뻐받으시겠습니까?
“그래요, 주님. 주님은 다른 신들처럼 멀리 계신 분이 아님을, 오히려 저와 늘 함께 하시는 분임을 잊지 않게 해 주세요.”
“그 장관이 암에 걸려 더 이상 수술해도 소용이 없다고 할 때, 그 암을 친구처럼 대하며 달래가며 살았다는 걸 깨닫네요.”
“그 속에서 주님의 음성을 듣고, 그 속에서 주님께서 일깨우시는 영적인 깨달음을 얻고자 한 전직 장관이었어요.”
“그런데 종교개혁을 하고 가까이 계신 하나님과 친밀했던 아사 왕은 말년에 엉뚱한 인본주의자로 전락해 버렸어요.”
“주님, 저는 저와 가까이 계시고 심령에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 주님을 참 주인으로 끝까지 모시며 순종하며 살게 해 주세요.”
“삶에 어려움과 역경이 닥쳐 올때도 세속적인 인본주의자로 전락치 않게 하시고 언제나 주님만을 신뢰하며 살게 해주세요.”
“언제나 제 명철을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주님을 신뢰하며 살게 하시고, 그 속에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은 상상밖의 놀라운 은혜로 채워주실 줄 믿어요”
(찬양) 하나님은 너를 만드신 분 너를 가장 많이 알고 계시며
하나님은 너를 만드신 분 너를 가장 깊이 이해하신단다
하나님은 너를 지키시는 분 너를 절대 포기 하지 않으며
하나님은 너를 지키시는 분 너를 쉬지 않고 지켜보신단단
그의 생각 셀수 없고 그의 자비 무궁하며
그의 성심 날마다 새롭고 그의 사랑 끝이없단다
(설교닫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테네 시민들, 아테네 철학자들은 3만개나 되는 신을 섬기고 있지만 그들은 멀리 있는 신을 얼래고 달려는 격이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이 선포한 하나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아담의 혈통을 지닌 죄인인 우리에게 먼저 찾아와 구원해주신 아버지시죠.
우리의 주인되신 아버지 하나님은 멀리 있는 분이 아니라 우리와 친밀하게 가까이에 계시고 우리 심령에 함께 하시는 분입니다.
주님께서 아담과 아브라함과 요셉과 다윗과 함께 해 주셨고, 신약시대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서 지금도 부활의 영으로 함께 하고 계십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아사 왕처럼 인생 말년에 갈수록 내 힘과 능력을 의지한 채 하나님의 음성을 무시하는 그런 어리석을 범하지 않도록 하십시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신앙심이 깊어갈수록, 나의 명철과 능력을 의지하기보다 오직 주님의 음성에 민감하게 순종하는 저와 여러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나에게 찾아와 구원을 베풀어주시고, 나와 친밀하게 가까이 계시고, 내 안에 계시는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삶인 줄 믿습니다.
그때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은 놀라운 은총으로 함께 하시는 은혜의 주인공들로 삼아주실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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