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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설교WednesdaySermon/사도행전

알지 못하는 신(행17:19-23)

by 똑똑이채널 2021. 10.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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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이 아테네의 아레오바고에서 철학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모습

 

(설교열기)(예화)영어로 유명한 말이 있지 않습니까?

“Boys be ambitious.”.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 하는 뜻입니다.

 

저도 중학교 1학년 때 시골 작은 방에 붓글씨로 써서 걸어 놓은 적이 있습니다.

그 명언은 일본의 삿포로 농업학교 교장으로 부임한 미국인 윌리엄 클라크가 한 말이죠.

1876년 일본은 명치유신 직후라 근대화를 추진하면서 서구의 근대 교육자들을 초청했습니다.

 

그때 일본의 삿포로농업학교에 매사추세츠 주립농과대학 학장인 윌리엄 클라크 교수가 교장으로 부임했습니다.

그런데 클라크 교장은 일본의 교육열에 불을 지피기보다 신앙교육에 오히려 열을 냈습니다.

그때부터 학생들은 삼삼오오 모여 성경책을 읽었고, 기도하는 모임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알지 못하는 신.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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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모습을 알게 된 일본 당국의 교육자들은 클라크 교장을 좋아할 리가 없었죠.

그 일로 클라크 교수는 2년 만에 일본에서 쫓겨나 본국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그때 배 위에서 학생들에게 한 말이 그 유명한 ‘Boys be ambitious.’였던 것이죠.

물론 그분이 말한 엠미셔스가 야망처럼 들리지만, 신앙인이었던 그는 야망이란 뜻보다 비전이란 뜻으로 전달했겠죠.

 

중요한 것은 그 무렵에 우치무라 간쪼도 주님을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찌무라 간쪼는 클라크 교장의 부임 이후 주님을 알기 전까지는 일본의 다른 학생들처럼 800만개가 넘는 신을 숭배하고 있었죠.

 

 

 

[전자책] 눈을 뜨면 볼 수 있어요

2020년 한 해 동안 코로나19로 인해 너무나 답답했다. 지금도 그게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앞이 보이지 않는 것 같고 모든 게 답답하기만 하다. 청년들도 꿈을 꿀 수 없는 상태다. 초등학생

www.aladin.co.kr

800만 개의 신이라면 어떤 신인지 다 알 수 있을까요?

이른바 해신, 달신, 수많은 별신, 집신, 바다신, 길신 등 말이죠.

그렇게 헤아린다고 해도 실은 알지 못하는 신들도 많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겠죠.

 

우찌무라 간쪼도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기 전까지는, 그가 다니는 골목골목마다 그 골목을 지키는 신게 빌고 또 빌었죠.

그러다가 어느 날 삼위일체 하나님을 알게 되면서부터, 그 하나님을 믿게 되면서, 수 많은 잡신을 청산하게 되었죠.

언제 어디서나 어떤 상황에서도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 지켜주시고 돌봐주신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우찌무라 간쪼안에 계시기 때문에, 그가 골목길을 다니든, 비행기를 타든, 배 위에 있든 두렵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그 하나님을 믿고 의지했던 우찌무라 간쪼 밑에서 배운 학생이 우리나라 김교신 선생이었고, 김교신 선생의 지도를 받은 학생이 손기정 선수였던 것이죠.

 

(깨달음) 어떻습니까?

그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시고, 우리 안에 성령님으로 내주하시는 분인 줄 믿습니다.

 

(예화2) 어제 암태에서 목회하는 목사님이 갑자기 목포에 나왔다면서 우리교회를 찾아오셨습니다.

나도 바쁜데, 교회가 작아서 시간이 많이 나는 줄 생각하고 허물없이 찾아왔을까, 하고 제 나름대로 생각을 했었죠.

그 분과 함께 점심을 먹고 교회에서 차를 마시는데,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당신이 섬기는 교회에 집사님 가정에 자녀가 둘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두 자녀가 해를 달리해서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안타깝고 괴로운 일이었겠습니까?

 

그런데 그 후에 자꾸 영적으로 짓눌리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심지어는 너무 아파서 서울에 있는 한의원에서 치료를 받기도 했고요.

그리고는 입에서 계속 헛소리까지 나오더라는 것입니다.

 

그때 그 목사님이 그렇게 권면을 해줬다고 합니다.

집사님. 집사님 안에 예수님이 계시나요? 안 계시나요?”

집사님, 집사님의 마음 속에 예수님께서 동행하고 계셔요.”

그러니 악한 영을 두려워하거나 짓눌리지 마시고 오히려 예수님의 이름으로 대적하며 기도하세요.”

수시로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령한다, 나를 유혹하고 나를 짓누르려하는 세력들은 다 떠나가라.”

 

그렇게 그 집사님과 함께 하신 예수님, 그 집사님과 24시간 동행하시는 예수님을 알려주고, 선포하도록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목사님도 기도할 때마다, 평상시에 뭔가를 할 때도, 계속 그 집사님을 위해 기도했다는 것이죠.

그로부터 몇 개월 뒤에 그 집사님이 자유케 되었고, 지금은 너무나도 좋아진 모습을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깨달음) 제가 그 목사님의 이야기를 들을 때, 저에게도 겹치는 것이 있었습니다.

요즘 들어 저도 먹든지, 마시든지, 잠을 자든지, 기도하든지 간에, 우리교회 집사님과 자녀를 위해 기도한다는 것이죠.

 

중요한 것은 내 안에 예수님이 계신다는 것, 24시간 나와 동행하심을 믿는다면, 나는 어떤 상황에서도 두렵지 않게 되는 것이죠.

설령 나를 유혹하고 나를 짓누르는 영적 세력이 찾아온다 할지라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선포하면 떠나가게 될 줄 믿습니다.

 

바로 그런 믿음이 참된 믿음 아니겠습니까?

바로 그런 믿음이 주님 앞에 산 제물로 드리며 살아가는 신앙인의 모습 아니겠습니까?

바로 그런 믿음이 800만개나 되는 일본의 신, 심지어 알지 못하는 신들까지 섬기며 두려워하는 이들과는 전혀 다른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신뢰하는 신앙인의 자세죠.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시는 주님의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역배)바울이 베뢰아에서 복음을 전하는데, 이전에 들린 데살로니가의 유대인들이 그곳까지 찾아와 난동을 피웠죠.

그일로 바울은 실라와 디모데를 베뢰아에 남겨두고, 그곳의 형제들과 함께 배를 타고 320km되는 아덴까지 왔죠.

바울이 아덴에 도착하자마자 함께 한 동료들은 다시금 바울을 남겨두고 떠났고, 머잖아 실라와 디모데를 보내달라고 했죠.

 

그때 바울이 아덴에 도착해 무엇을 했습니까?

아덴은 오늘날 아테네로서, 온갖 우상의 신전들이 즐비한 그곳을 둘러봤던 것이죠.

아테네라는 도시명 자체도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여신의 이름이었습니다.

아테나라는 여신의 이름을 로마식으로 부르면 미네르바라고 부르기도 하죠.

 

중요한 것은 그곳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 언덕빼기 위에 아테나 여신을 위해 만든 파르테논 신전이 있다는 점입니다.

지금은 기둥만 남아 있지만 2천년 전에는 직경 1.9m에 높이 10.4m에 달하는 기둥이 46개나 서 있었죠.

그런데 아크로폴리스 아래의 동남쪽에 서 있는 제우스 신전은 기둥만 무려 104개로, 그 당시 그리스에서 가장 큰 신전이었죠.

그 파르테논 신전 외에도 프로필라이아, 아테나니케 신전, 아테나 여신 옥조각상, 에레크테이온 신전, 아테나 제단 등 수많은 신전과 제단이 즐비했죠.

 

그걸 바라보는 바울의 심정이 어땠겠습니까?

지난 시간에 살펴본 것처럼 바울의 마음이 격분했다고 했죠.

바울의 마음 속에 분노가 치밀어 오른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때의 분노란 바울 자신의 분노가 아니라 바울 속에 함께 하고 계시는 예수님의 영, 곧 성령의 분노라고 했죠.

그렇다고 바울이 성령님의 분노에 이끌려 망치나 곡괭이를 들고 가서 그 신전들을 부순 것은 아니었죠.

왜냐하면 돌부처나 나무 조각상과 같은 형상은 사람의 마음을 표현한 것일 뿐 진정한 우상은 사람의 마음이기 때문이죠.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 시내광야에 있을 때 그들의 마음속에 있던 우상을 빚어만든 것이 금송아지 형상이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 우리가 더욱 격분해야 할 게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불가의 좌불상이나 와불상이 아니라, 산 위에 쌓아 올린 돌탑이 아니라, 내 마음 속에 깃든 우상이라고 했죠.

내 심령 속에 나와 동행하시는 주님을 제외시킨 채 내 욕심대로만 살아가려는 그런 마음 속에 우상이 있다면 말씀과 기도로 비워내는 것 말입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1:15)하고 말씀시는 이유도 그것이죠.

 

(본문) 그런데 아테네는 우상의 신전만 즐비한 곳이 아니라, 철학과 사상의 발상지이기도 합니다.

그 유명한 소크라테스도, 플라톤도, 아리스토텔레레스도 모두 아테네가 본고장이죠.

더욱이 역사의 아버지로 불리면서 역사를 집필한 헤로도토스도,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쓴 투키디데스도 그곳 출신이죠.

 

그런 철학과 사상의 계보를 이어받은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도 있었습니다.

주전 4세기에 에피쿠로스에 의해 시작된 에피쿠로스주의자들은 쾌락은 인간의 추구할 수 있는 최고의 신이라고 표방했죠.

에피쿠로스주의자들은 인간의 육욕은 물론, 모든 공포와 죽음의 염려까지도 벗어나는 마음의 평정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신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았지만 신이 인간의 삶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입장이죠.

그만큼 그들은 죽을지도 모를 내일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늘을 살라고 가르치는 것이었죠.

 

그렇다면 스토아 철학자들은 어떤 것을 주장했을까요?

제논에 의해 창시된 스토아주의는 인간의 이성을 절대시하면서 금욕주의를 내세웠고 자연과 조화로운 삶을 주장했죠

그들은 범신론을 믿는 자들로서 이 세상의 신은 어디에나 존재한다고 믿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만큼 창조주 하나님을 믿고 경배하는 대상으로 섬기는 게 아니라 그저 일반 사물 속에 깃든 신 중의 하나로 생각한 것이었죠.

 

사도 바울은 그런 에피쿠로스주의자들과 스토아주의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전했던 것입니다.

그때 그들이 어떻게 했는지 오늘 본문 19-21절을 다시 한 번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그를 붙들어 아레오바고로 가며 말하기를 네가 말하는 이 새로운 가르침이 무엇인지 우리가 알 수 있겠느냐

네가 어떤 이상한 것을 우리 귀에 들려 주니 그 무슨 뜻인지 알고자 하노라 하니

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것 이외에는 달리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

 

(원해) 여기에 아레오바고란 아크로폴리스 북서쪽에 위치한 넓은 바위 언덕을 가리키는 곳입니다.

아레오바고는 아테네 초창기에 귀족회의가 열린 곳으로 유명했죠.

그 후에는 재판 장소로 사용되면서 법정을 의미하는 곳으로 사용되었습니다.

트로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아가멤논 왕을 살해한 왕비와 왕비의 정부에게 복수한 아가멤논 딸이 재판을 받은 곳이 그곳 아레오바고였죠.

소크라테스가 재판을 받은 곳도 바로 그곳 아레오바고로 알려져 있습니다.

 

왜 그들이 바울을 붙들어 그곳으로 데려갔겠습니까?

바울의 가르침을 귀담아 듣기 위해서, 바울이 전한 예수 그리스도와 부활에 대해 더 깊이 집중해서 듣기 위함이었겠습니까? 아니죠.

본문 21절에서 말씀해 주듯이, 아테네 사람들은 외국인들이 새로운 학설을 말하면 그것에 대해 궁금하기 때문에 시간을 내서 들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때 바울이 에피쿠로스주의자들과 스토아주의자들에게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데, 그 첫머리가 본문 22-23절입니다.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원해) 바울은 자신을 통해 새로운 철학 풍조를 듣고 싶어했던 에피쿠로스주의자들과 스토아주의자들에게 맨 먼저 그걸 이야기한 것이죠.

아테네 사람들은 범사에 종교심이 많다고, 새로운 종교 자체에 대해서는 관심이 많다고 말이죠.

그런데 바울이 두루 다니면서 봤지만, 아네네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있듯이 그런 신도 섬긴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너희 에피쿠로스주의자들과 스토아주의자들도 실은 알지 못하는 신을 숭배하는 자들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죠.

바로 너희들이 알지못하는 신을 섬기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 진정으로 경배해야 할 참 신이 누구인지, 알게 해 주겠다는 뜻입니다.

 

여기에 알지 못하는 신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아그노스토스 데오’(ἄγνωστος θες)입니다.

알려지지 않은 잡신’(unknown a god), ‘잊혀진 잡신’(forgottena a god)이라는 뜻입니다.

그만큼 아무도 모르는 신을 섬기고, 후손에게 완전히 잊혀진 잡신을 섬긴다는 것이죠.

 

(깨달음) 왜 바울이 그들에게 주님의 복음을 전하면서, 서두에 그것을 꺼내는 것이겠습니까?

에피쿠로스주의자들이든 스토아주의자들이든, 너희들이 철학과 사상을 논한다면서도, 왜 그런 무의미한 신을 섬기느냐는 거죠.

왜 아무도 모르는 잡신을 섬기고, 조상들이 어떤 신을 섬겨왔는지도 모르는 그런 잡신을 믿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적용)그런 모습은 우찌무라 간쪼가 삼위일체 하나님을 모르던 시절에 800만 개나 되는 신을 섬기는 것과 같은 격이죠.

이 골목을 지나기 전에 그 골목을 지킨다는 신에게 빌고, 또 저 골목을 지나갈 때는 그 골목신에게 빌 듯이 말이죠.

해와 달과 별 신도 섬기고, 바다를 지나가는 길목마다 그 바다의 신을 섬기는 모습처럼 말입니다.

 

왜 그렇게 알지 못하는 신을 숭배하는 것입니까?

진정한 구원자, 진정한 절대자, 이 세상의 창조주요, 영원한 생명의 주님을 못 만났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그만큼 바울은 이 세상의 진정한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그들의 어리석음을 깨우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주문)그렇다면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고자 하시는 은혜가 무엇입니까?

(은혜)우리 주님은 저와 여러분들에게 알지 못하는 신을 섬기는 게 아니라 참 구원자 되시는 주님을 만날 수 있는 은혜를 베푸시고자 하시는 것이죠.

(주음성) 그래서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 아니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네가 주님을 몰랐다면 너도 우찌무라 간쪼처럼 알지 못하는 신에게 숭배하지 않았겠느냐?”

네가 영생의 주관자이신 하나님 아버지를 몰랐다면, 너도 아테네 사람들처럼 조상도 모르는 신을 숭배하고 있지 않았겠느냐?”

아테네 시민들은 물론이고 에피쿠로스주의자들도 스토아주의자들도 얼마나 어리석은 길을 좇아 살고 있는지 너는 알 수 있지 않느냐?”

심지어, 그 집사님처럼 주님이 네 안에 동행하고 계신데도 그것을 의식하지 못하면 영적인 짓눌림에 시달리는 영혼이 얼마나 많이 있더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네 마음 속에 진정한 구원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네 심령 안에 거하고 계시는지 점검해봐야 하지 않겠느냐?”

너는 세상 사람들처럼 자기 욕망을 좇아 잡신을 숭배하는 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예수님과 동행하는 자가 돼야 하지 않겠느냐?”

아무리 철학을 하고 사상을 깨우쳤어도, 그 심령 속에 생명의 주관자이신 주님이 계시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바울이 지금 아테네 철학자들에게 무의미한 신을 숭배하지 말고, 참 진리이신 주님을 믿도록 이야기하는 것도 그러지 않더냐?”

너는 오늘도 네 심령의 주관자이신 주님께서 너와 동행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미혹의 영과 악한 영이 다가올 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물리는 생명의 주님과 동행하고 있음을 잊지 말도록 해라.”

 

(찬양)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즐거이 부르며 기뻐, 기뻐하시리라

즐거이 부르며 기뻐, 기뻐하시리라 기뻐하시리라

 

(예화) 프랑스의 사상가 파스칼은 39세라는 짤막한 삶을 산 사람입니다.

그는 천재 수학자요 과학자요 유명한 철학 사상가였습니다.

그런데 그토록 이성적이고 철학적이고 사상적인 파스칼의 인생이 송두리째 바뀐 사건이 일어났죠.

하나님께서 불 가운데 그에게 찾아오신 불 체험이 그것이었습니다.

 

“16541123일 밤 1030분부터 1230분까지 불 불 불이 내렸다.

하나님은 철학자의 하나님, 수학자의 하나님이 아니었다.

그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었다.

이 확신 이 감격 이 기쁨 이 평화 이 환희의 눈물, 아멘!”

 

그가 겪은 체험을 자신의 쪽지에 써 놓은 감동적인 글입니다.

파스칼은 전혀 예상치도 못한 그 밤에 성령의 불, 부활의 주님께서 불로 찾아와 주신 것이었습니다.

그때 파스칼이 어떻게 했겠습니까?

지난날 자기 머리와 자기 지식과 자기 철학과 사상만을 믿고 살아온 자기 교만을 눈물로 회개했습니다.

그래서 그 귀중한 일생일대의 체험을 종이에 적어서 위쪽 안주머니에 넣고 다녔던 것이죠.

바로 그것이 훗날에 그 유명한 파스칼의 팡세곧 명상록이 된 것입니다.

 

(예화2) 존 쉐릴은 미국 뉴욕의 가이드 포스트잡지에 예리한 글을 쓰는 작가였습니다.

그 역시 파스칼처럼 이성적이고 사상적이고 논리적인 두뇌의 소유자였죠.

그런 그에게 1595년 어느 봄날에 성령님께서, 부활하신 주님께서 임재하신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는 2년 전 목에서 발견된 암을 수술한 후에 정기 검진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 전까지만 해도 아무렇지도 않았던 그에게 의사가 암이 재발했다는 소식을 전해줬죠.

그래서 다시금 고통 가운데 수술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수술을 마친 뒤 병실로 옮겨 온 그는 통증 완화제에 취해 누가 누군지 알아보지를 못했습니다.

밤이 되었을 때, 비로소 같은 병실에 누워 있는 환자들을 알아보게 됐습니다.

한 사람은 연세가 많은 할아버지였는데 천식으로 고생하는 분이었습니다.

또 다른 사람은 이제 수술을 마치고 회복실에 있다가 그 병실로 옮겨 온 젊은이였습니다.

 

그날 쉐릴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놓고 기도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함께 병실에 있는 그들을 위해서도 기도해 보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자신도 힘든 처지라 그들을 위한 기도가 쉽지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는 깊은 한 밤 중이었습니다.

그는 말똥말똥 눈을 뜨고 있었습니다.

그때 병원 복도와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희미한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간호사는 그 빛 사이로 바닥이 고무로 된 실내화를 끌면서 병실 앞을 왔다 갔다 하고 있었습니다.

같은 방에 누워 있는 두 명의 환자도 잠을 이루지 못한 채 뒤척이고 있는 듯 했습니다.

노인은 천식 때문에, 청년은 마취에서 깨어난 후라, 서로들 고통 가운데 잠을 자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습니다.

그 희미한 빛 하나가 자신에게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는 것이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그 빛이 인격체와 같은 중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때 쉐릴은 그 빛에 압도되어 자신도 모르게 그런 고백이 터져 나왔습니다.

예수님이세요? 예수님?”

그러자 그 빛이신 주님께서 쉐릴을 감싸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사도 바울에게 감싸셨던 그 빛처럼, 파스칼에게 찾아오셨던 그 성령님의 모습처럼 말이다.

 

(깨달음) 어떻습니까?

존 쉐릴에게 임한 그 빛이 무슨 빛인지 우리는 알고 있지 않습니까?

파스칼에게 임한 그 불이 어떤 불인지 우리는 알고 있지 않습니까?

제 아무리 똑똑한 철학자라고 할지라도, 아무리 사려 깊은 사상가라 할지라도, 그 심령에 진리와 생명이신 주님이 계시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아무리 볼품 없어 보여도, 그 심령 속에 생명의 주관자이신 주님이 거하시고 동행하시면, 가장 고귀한 주님의 자녀가 되는 줄 믿습니다.

그것이 존 쉐릴에게, 파스칼에게, 바울을 만나주신 주님의 사건이요, 그 주님께서 아네테 철학자들에게도 만나주길 바라는 심정으로 바울이 주님의 복음을 전한 것이죠.

 

(내음성) 그래서 우리가 주님께 기도할 때 어떤 기도를 기뻐 받으시겠습니까?

그래요, 주님. 저도 약하고 부족하지만, 주님의 영으로 충만하게 해 주세요.”

제가 주님을 의식하지 못할 때도 있지만, 그때도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시는 주님께서 성령으로 충만케 감싸주세요.”

파스칼에게 불로 임하신 성령님, 존 쉐릴에게 빛으로 임하신 주님, 저에게도 그 불과 빛으로 감싸주시고 충만케 해 주세요.”

그리하여 이 세상에 알지도 못하는 신을 숭배하고 절하는 자들과는 달리, 오직 주님을 의지하며 살게 해 주세요.”

제가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이 제 안에 계심을 바라보며, 악한 영들이 몰려올 때 주님의 이름으로 물리치며 살게 해 주세요.”

 

(찬양)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즐거이 부르며 기뻐, 기뻐하시리라

즐거이 부르며 기뻐, 기뻐하시리라 기뻐하시리라

 

(설교닫기)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께서 오늘 이 시간에 우리 각자에게 그렇게 격려하며 친히 말씀해주십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스바냐3:17)

 

그 하나님께서, 그 주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지금도 우리 심령에 임재하시고 우리와 함께 하시는 줄 믿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 자들은 이 세상에 알지도 못하는 신을 숭배하는 자들과는 천지 차이가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를 미혹하고 우리를 짓누르고자 하는 악한 영의 세력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꺼이 물리치며 승리하게 해 주신다는 사실이죠.

 

그 주님께서 우찌무라 간쪼에게 임하신 것처럼, 파스칼에게, 존 쉐릴에게, 그리고 본문의 바울에게 임한 것처럼, 우리에게도 충만하게 임해 계셔서, 승리하게 해 주실 줄 믿습니다.

그와 같은 은혜의 주인공들이 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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