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열기)(성화)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이유는 두 가지 차원입니다.
하나는 구원받기 위함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과 더 깊은 관계를 엮어 나가기 위함이죠.
주일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우리 스스로는 절대로 구원할 수 없는 존재들이죠.
아담의 원죄라는 죄의 굴레 속에서 태어난 우리들이기에, 우리의 죄를 대속해 주실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바로 그분의 십자가 대속을 통해서만 우리가 죄로부터, 사망으로부터, 지옥으로부터, 자유함을 얻을 수 있는 것이죠.
구원이란 죄로부터 자유함을 얻어 영생을 얻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이유는 구원받기 위함만이 아닙니다.
보다 본질적인 이유는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그 관계가 깊어지기 위함입니다.
“당신은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습니까?”하고 물어보면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아, 네. 저는 하나님을 만나 체험이 있어요.”
“네, 저는 기도할 때 몸이 떨고 뜨거워지는 체험을 했어요.”
그것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체험하는 신비로운 현상이지, 그것 자체가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것은 아니죠.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것은 그 분의 말씀으로 내 삶이 조금씩 달라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죠.
하나님의 말씀을 모를 때는 내 멋대로 살았지만 그 분의 말씀 앞에 나를 비추어 나의 어긋난 삶을 고쳐나가는 것 말이죠.
그것을 요즘 유행하는 말로 하면 ‘예수님과 24시간 동행하기’ 바로 그것이죠.
(깨달음)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면서 주님의 말씀으로 인격적인 관계를 맺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것은 구원만 받고 끝내버리는 것과 같은 격이죠.
그것은 마치 성전에 나와 제사드리고 성전 밖에서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겠다는 것과 똑같은 모습이죠.
예배당에 나와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기도를 드리고 헌금을 드리는데, 예배를 통해 주신 말씀대로는 살지 않겠다는 것과 같은 격이죠.
그런 모습은 하나님을 성전 안에, 하나님을 예배당 안에 제한하는 모습과 다를 바 없는 것이죠.
그런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을 수가 없는 것이죠.
그런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성전 안에 가두고 제한하는 모습일 뿐입니다.
(적용) 그렇다면 우리 자신은 어떻습니까?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은혜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임을 고백합니까?
나는 나를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그 은혜에 감사하며,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어가고 있습니까?
내 신앙의 모습과 삶의 모습이 5년 전에 비해 10년 전에 비해 말씀으로 조금씩 변화되고 있습니까?
그런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가 뭐라고 해도 그는 진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런 그리스도인은 24시간 주님과 동행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런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성전 안에 가둬두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매 순간순간 인격적인 주님과 동행하는 그리스도인이죠.
그런 그리스도인의 기도와 간구를 하나님께서 선하게 인도하시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역배) 실라와 디모데를 베뢰아에 남겨둔 바울은 홀로 아테네에 와서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 그 성채를 둘러봤죠.
그곳에는 크고 작은 신전들이 즐비했습니다.
아크로폴리스 언덕배기 위에는 아테나 여신을 위해 만든 파르테논 신전이 있었죠.
지금은 기둥만 남아 있지만 2천년 전에는 직경 1.9m에 높이 10.4m에 달하는 기둥이 46개나 서 있는 신전이죠.
아크로폴리스 아래의 동남쪽에는 제우스 신전이 있었는데 기둥만 무려 104개로 그리스에서 가장 큰 신전이었습니다.
파르테논 신전 외에도 프로필라이아, 아테나니케 신전, 아테나 여신 옥조각상, 에레크테이온 신전, 아테나 제단 등 수많은 신전과 제단이 즐비한 곳이었죠.
2천년 전 바울이 그곳 아테네를 방문했을 때, 아테네 전역에는 약 3만개의 크고 작은 신상들이 세워져 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3만 개의 신상들 가운데는 ‘알지 못하는 신’들의 이름이 너무나 많았던 것이죠.
마치 일본 사람들이 800만개나 되는 신을 숭배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아테네는 철학의 본산지였습니다.
그 유명한 소크라테스도, 플라톤도, 아리스토텔레레스도 모두 아테네가 본고장이죠.
‘역사의 아버지’로 불리는 〈역사〉의 집필한 헤로도토스도,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쓴 투키디데스도 그곳 출신이죠.
2천년 전 바울이 그곳 아테네에 들렀을 때는 아테네 철학자들의 사상을 이어받은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이 있었죠.
주전 4세기에 에피쿠로스에 의해 시작된 에피쿠로스주의자들은 쾌락은 인간의 추구할 수 있는 최고의 신이라고 표방했죠.
그들은 신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았지만 신이 인간의 삶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전했습니다.
제논에 의해 창시된 스토아주의자들은 인간의 이성을 절대시하면서 금욕주의를 내세웠고 자연과 조화로운 삶을 주장했죠
그들은 범신론을 믿는 자들로서, 신은 이 세상 어디에나 존재한다고 믿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신을 경배의 대상으로 섬기는 게 아니라 일반 사물 속에 깃든 신들이라고 여긴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그런 에피쿠로스주의자들과 스토아주의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전했습니다.
그런 바울의 이야기를 들은 그들은 바울이 전하는 게 처음 듣는 것이라 바울을 데리고 아레오바고로 데리고 갔죠.
‘아레오바고’란 아크로폴리스 북서쪽에 위치한 넓은 바위 언덕을 가리키는 곳입니다.
‘아레오바고’는 아테네 초창기에 귀족회의가 열린 곳으로 유명했습니다.
그 후에는 재판 장소로 사용되면서 ‘법정’을 의미하는 곳으로 사용되었죠.
트로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아가멤논 왕을 살해한 왕비와 왕비의 정부에게 복수한 아가멤논 딸이 그곳에서 재판을 받았죠.
소크라테스가 재판을 받은 곳도 바로 그곳 아레오바고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바울을 왜 그곳 아레오바고로 데리고 갔습니까?
그곳에서 바울의 가르침에 대해 더 깊이 듣고자 함이 아니라, 새로운 학설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한 차원이었습니다.
바로 그곳에서 바울은 에피쿠로스주의자들과 스토아주의자들에게 천지의 주재이신 하나님, 예수그리스도의 생명의 복음ㅂ을 전했던 것이죠.
그래서 지난 시간에 살펴본 말씀은 그 복음의 첫 운을 떼는 것이었죠.
이른바 아테네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3만개의 크고 작은 신상과 신들을 섬기는 것 같지만, 거기에는 알지 못하는 신들까지 숭배한다고 말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를, 너희들은 먼저 알아야 한다고, 첫 운을 뗀 것이었습니다.
(본문) 오늘 읽은 본문은 그 말씀에 이어서 바울이 그들이 앞에서 설교하는 내용입니다.
본문 24절 말씀을 다시 한 번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원해)여기에 ‘주재’라는 헬라어 단어는 ‘퀴리오스’(κύριος)입니다.
그 뜻은 인간과 모든 사물이 그에게 속한다는 뜻, 곧 ‘주인’(master)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지 곧 하늘과 땅의 모든 만물의 소유권과 통치권을 갖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그 소유권자와 통치권자인 하나님은 인간의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신다고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은 여러분들이 손을 빚어 만든 신전이나 신상에 제한받지 않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깨달음) 이것은 그 자리에 참석한 철학자들에게 대단한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키는 선포였습니다.
여태껏 그들이 믿고 섬기는 신에 대해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곳에 참석한 철학자들은 물론이요 아테네 모든 시민들은 자신들이 세운 신전과 신상안에 그 신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그런데 지금 바울이라는 사람이 나타나 자신들이 여태 숭배해 온 그 신전에 관한 관념이 얼마나 제한된 생각인지 깨트려주고 있는 것이죠.
자신들이 믿는 신, 자신들이 의지하는 신을, 그 신전 안에 가두고, 신전 밖에는 그 신의 뜻과는 별개로 살아온 그들이었던 것입니다.
오히려 그들이 아테네의 신전과 신상 앞에 절하고 경배했던 것은 그 신의 뜻을 좇는 게 아니라 자신들의 바람이었을 뿐이죠.
(성화) 이것은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솔로몬이 성전봉헌식 때 행한 기도 내용과 비슷한 관점입니다.
솔로몬은 길이 30m 너비 10m 높이 15m의 건물에, 맨 앞에 19m에 달하는 야긴과 보아스 놋기둥을 세웠습니다.
또 번제단과 물두멍과 분향단과 금촛대와 진설병을 세웠고, 법궤 위에 스랍 곧 천사모양의 기물도 만들었죠.
그 성전과 기물들을 역군 3만명, 짐꾼 7만명, 석공 8만명, 감독관 3천3백명, 연인원 18만3천300명을 동원해 7년 6개월간에 걸쳐 완공했습니다.
솔로몬이 왕이 된 때가 20대 초반이었고, 그가 왕이 된 지 4년만에 그 공사를 시작해, 7년 6개월만에 완공을 했습니다.
그때 솔로몬이 7일에 걸쳐 봉헌식을 거행했는데, 그때 어떤 기도를 드렸습니까?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하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성전이오리이까”(왕상8:27, 대하 6:18)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은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온 우주 자체도 모실 수 없는 크신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어찌 인간의 손으로 지은 이 성전 안에 하나님을 모실 수 있겠냐는 고백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은 이 성전 안에 제한받는 분이 아님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솔로몬은 다만 이 성전에 나와, 혹은 이 성전을 향해 기도할 때 들어주시옵소서, 하고 기도를 올렸죠.
저희들이 하나님께 범죄하여 재앙이나 전염병이나 전쟁이 일어날 때 저희가 기도를 할 때, 긍휼을 베풀어 달라고 간구했죠.
그것은 성전 안에 나와 기도할 때 깨닫게 하신 바를 저희의 삶 속에 실천하며 살겠습니다, 하는 고백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했습니까?
솔로몬이 7년 6개월에 걸쳐 성전을 건축했고, 이후 13년에 걸쳐 자기 궁궐을 지은 후에, 어떻게 변질되었습니까?
그가 60세에 죽었으니, 20대에 왕이 되어, 20년간 성전과 궁궐을 건축했다면, 나머지 20년간 타락한 삶을 살고 말았죠.
그만큼 솔로몬은 성전안에 나와 제사와 기도를 드렸지만, 삶 속에서 주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지는 못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아테네 시민들, 바울이 선포하는 그 자리에 참석한 철학자들과, 무엇이 다른 점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만큼 우리 주님은 우리가 예배당에 나와 예배하고 기도하는 모습을 받으실 뿐만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삶 속에 실천하는 인격적인 관계를 엮어나가길 원하시는 주님이심을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주문)그렇다면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고자 하시는 은혜가 무엇인지 알 수 있죠?
(은혜)주님은 저와 여러분이 예배당안에서 예배드리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예배를 통해 주신 말씀으로 인격적인 관계를 맺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주음성) 그래서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성령님의 음성으로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딸아, 사랑하는 아들아.”
“너는 아테네 시민들과 철학자들이 그들의 여러 신전 앞에 제사하는 것이 어떤 모습인지 알지 않겠느냐?”
“너는 솔로몬이 성전에서 봉헌식 기도를 드릴 때와 그 뒤 20년의 삶이 어떻게 변질됐는지 알고 있지 않느냐?”
“네가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성전과 예배당에 나와 예배드리고 기도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지 않느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네가 주님을 믿고 의지하는 것은 주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것임을 잊지 말도록 해라.”
“네가 예배당에 나와 주님께 경배하고 기도하듯이 그 모습 그대로를 삶 속에서도 동일하게 살았으면 좋겠구나.”
“네가 주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그 모습이 5년 전보다 10년 전보다 더 깊어지고 있다면 주님께서 너무나 기뻐하시겠구나”
(찬양) 신실하게 진실하게 거룩하게 살게하소서
신실하게 진실하게 거룩하게 살게하소서
하나님 나의 마음 만져주소서
하나님 나늬 영혼 새롭게 하소서
(본문) 바울은 아레오바고에 참석한 아테네 철학자들 곧 에피쿠로스주의자들과 스토아주의자들에게 연이어 그렇게 설교하죠.
본문 25절 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니라.”
(원해) 여기에서 ‘부족하다’는 단어는 ‘프로스데오마이’(προσδέομαι)입니다.
‘더 원하다’, ‘더 요구하다’(need in addition)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다른 신들이 인간에게 뭔가를 요구하듯이 더 원하고 요구하는 그런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로 그 단어와 대조되는 게 ‘주시다’는 단어죠.
하나님은 생명도 없고 인격도 없는 우상처럼 인간에게 뭔가를 자꾸 요구하는 분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인간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베푸시는 주님이라는 뜻입니다.
(깨달음) 바울이 왜 그렇게 대조되는 말을 그들 앞에서 선언하는 것입니까?
그들이 섬기는 3만개의 신상을 모신 신전에서 각각의 신에게 제물을 바치고 공물을 바치는 모습 때문이죠.
그들이 바치는 그 모습은 실은 그들이 믿는 신이 그렇게 요구하고 더 원한다는 뜻입니다.
인간이 다른 신을 섬기고 미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것도, 일종의 그 신을 얼레고 달래려는 뜻 아닙니까?
무당을 불러 굿을 한 판 해도 작게는 500만원에서 많게는 5천만원도 기꺼이 바치도록 귀신이 종용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 모두가 신에게 요구하고 더 요구하기 때문에 액땜을 면하고 화를 면하려면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을 하죠.
만약 하나님이 그런 하나님이라면 우리가 그런 하나님을 믿을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렇기에 우리가 하나님께 십일조와 감사와 주일예물과 소원예물을 드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다른 신들처럼 뭔가 부족해서, 뭔가 인간에게 더 원하고 또 원하기 위해서 그렇게 바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죠.
우리가 주님께 드리는 헌금은 우리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더욱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과 호흡을 주시고, 우리 각자에게 맡긴 것들 앞에 하나님의 소유권을 올려드리는 마음으로 헌금을 드리는 것이죠.
바울이 지금 그 사실을 그들에게 깊이 각안시켜 주는 것이죠.
아테네 시민들과 너희 철학자들이 믿는 신들은 그렇게 원하고 또 원할지 모르지만, 하나님 아버지는 천지의 주재시고, 모든 인간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주시는 분이라고 말입니다.
그 하나님을 섬기는 나는 진정으로 주님 안에서 자유하지만, 너희들은 그 신에게 구속당하고 너희들이 신을 얼래고 달래려고 하는 것 아니냐고 말이죠.
(적용) 그렇기에 주님께서 이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는 바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주님께 드리는 헌금이나 예물의 성격은 다른 이교도의 신이나 우상에게 드리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것이죠.
알지 못하는 신이나 세상의 미신이나 점을 보거나 굿을 할 때 그 귀신의 세력들이 원하는대로 그 신을 얼래고 달래야 하지만 하나님은 인격적인 신이시기에 전혀 다르다는 것이죠.
(내음성)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어떤 기도를 주님께 드리는 것을 기뻐받으실지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요. 주님. 제가 주님께 예배를 드리고 헌금을 드리는 것은 이방 신에게 드리는 것과 전혀 다른 차원이었네요.”
“제가 주님께 헌금을 드리는 것은 나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일입니다.”
“제가 주님께 드리는 헌금은 나에게 맡겨주신 주님의 소유권을 올려드리는 일입니다.”
“그 헌금으로 나를 자랑하거나 그 헌금으로 하나님을 얼래고 달래려는 그런 차원이 아님을 기억하게 해 주세요.”
“하나님은 천지의 소유권자요 통제자권자로서, 오늘도 저에게 영생을 주시고 제게 청지기로 맡겨주신 주관자임을 믿습니다.”
“그 은혜를 일평생 기억하며 주님께 나의 몸을 드리듯 저의 온 인격과 같은 예물을 드리며 살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주세요.”
(찬양) 신실하게 진실하게 거룩하게 살게하소서
신실하게 진실하게 거룩하게 살게하소서
하나님 나의 기도 들어주소서
하나님 주의 길로 인도 하소서
(설교닫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솔로몬은 20대 초반에 왕이 되어 40년간 나라를 다스렸고 60세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 40년 통치 중에 20년은 성전건축과 자기 왕궁을 짓는데 쏟아부었습니다.
그 기간은 그 누구보다도 성전중심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왜 나머지 20년 기간은 그토록 타락하여 이방의 천명이나 되는 처첩을 거느리면서 그녀들이 가져온 우상 신전을 세우도록 허락해버렸습니까?
그가 성전봉헌식 때 그토록 간절히 기도했던 바를 그의 삶으로 엮어나가지 못한 까닭이었습니다.
성전에서 제사하고 분향하며 기도할 때 깨닫게 해 주신 주님의 말씀과 감동을 삶 속에 인격적인 관계로 깊이 있게 맺지 못한 삶 말입니다.
그것은 아테네 시민들과 바울의 설교를 듣고 있는 철학자들도 전혀 다르지 않는 모습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우리를 구원해 주신 그 하나님을 믿는 것이요, 그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깊이 있게 엮어나가는 삶입니다.
하나님은 예배당에 나와 예배드리고 찬양과 기도를 드리는 그 모습과 함께 예배당에서 주신 말씀을 삶 속에 실천해나가는 자를 통해 인격적인 관계를 맺어가시는 분입니다.
그 주님은 다른 신들을 얼래고 달리는 그런 성격을 드리는 예물을 기뻐받으시는 분이 아니라, 나를 구원해주신 은혜를 기억하고, 내게 이 땅의 것을 맡겨주신 그 모든 소유권이 주님께 있음을 기억하여드리는, 그런 자녀들과 더욱 깊이 있는 인격적인 관계를 맺어가는 아버지이신 줄 믿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의탁하며 간구하는 자에게 어찌 더욱 선한 은혜를 베풀어주지 않으시겠습니까?
그와 같은 은혜의 주인공들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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