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열기)(성화) 요즘 새벽에 에스더서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에스더서는 유대 민족이 멸문지화 될 위기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부림절’의 기원이 담겨 있는 말씀이죠.
본래 아하수에로 왕의 왕비인 와스디가 있었지만, 그녀의 오만함으로 인해 폐위되었고, 그 대신 에스더가 왕후가 되었죠.
다만 그 무렵에 왕은 아말렉 족속의 후예인 하만이라는 자를 페르시아의 2인자로 삼았죠.
그러니 온 백성들은 하만에게 절을 하고 굽신거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유다 민족의 출신, 더 정확히는 베냐민 지파의 후손이자 유다 민족에 흡수된 모르드개는 하만에게 절하지 않았죠.
그 일을 괴씸하게 여긴 하만은 왕 다음 가는 자기 권력으로 왕에게 청을 넣어 유다민족을 몰살시키는 계획을 세웠죠.
그때가 아달월 13일로, 인도로부터 구스까지 전국 127개 지방의 유다 민족을 도말시킬 계획이었죠.
그 계획은 포로귀환한 유다 민족이 성전을 재건하고 30년의 세월이 흐른 뒤라, 예루살렘의 유다 민족도 몰살당할 처지였죠.
그때 어떻게 합니까?
모르드개는 왕후 에스더를 향해 “네가 왕후가 된 것이 이 때를 위함이지 않더냐?”하고 왕 앞에 나아가도록 하죠.
그때 에스더는 왕 앞에 나아가지 못한 지 30일이 되었지만 “죽으면 죽으리이다”하면서 왕 앞에 나아가겠다고 하죠.
다만 자신은 물론 모든 유다 민족이 하나님을 향해 3일간 금식을 하면서 같이 기도하자고 하죠.
그렇게 금식기도를 하고 드디어 에스더가 왕 앞에 나아갔죠.
만일 왕이 에스더에게 자신의 금홀을 내밀지 않으면 에스더는 죽게 되는 것이었지만, 그날 왕은 에스더에게 금홀을 내밀었죠.
그 일은 에스더가 사랑스러워보인 것도 없지 않지만 궁극적으로 에스더 속에 역사하신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였죠.
그때 어떻게 했습니까?
에스더는 이때가 그 기회다 싶은 마음에, ‘왕이시여, 저 하만이라는 자가 나와 내 민족을 도륙내고자 한 것입니다’하고 말했나요?
아니죠.
에스더는 자신이 주관하는 때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때를 바라보며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다렸습니다.
그래서 그날 왕이 ‘너의 청이 무엇이냐?’할 때도 ‘내일 다시 오시면 그때 말하겠나이다’하고 고백했던 것이죠.
그 후에 하나님께서는 에스더와 모르드개는 물론 모든 유다 민족을 사망에서 건져주시는 역사, 역전시키는 역사를 보여주셨죠.
물론 모르드개와 유다 민족을 몰살시키려는 하만은 도리어 그가 장대에 매달려 죽고 그의 가족이 모두 몰살당하고 말죠.
(깨달음) 이상과 같은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는 바가 무엇입니까?
믿음은 용기라는 것입니다.
에스더에게 믿음의 용기가 없었다면 결코 왕 앞에 나아갈 수 없었다는 것이죠.
다만 그 믿음의 출처가 자기 자신에게 비롯된 것이라면 남용이 되겠지만, 하나님께 금식하고 나간 용기이기에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용기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천사 가브리엘이 처녀 마리아에게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할 때와 같은 격이죠.
그때 가브리엘 천사는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하고 전했죠.
그러자 마리아는 어떻게 대답합니까?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하고 말했죠.
그 말은 곧 사내와 잠자리를 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냐는 뜻이죠.
더욱이 사내와 잠자리를 하지 않은 상태인데 아이를 갖게 된다면, 바꿔 말해 결혼도 하지 않은 상태인데, 아이를 갖게 된다면 돌팔매질 당해서 죽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라, 그렇게 대답한 것이었죠.
그때 천사 가브리엘이 그렇게 전하죠.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본래 임신하지 못한다고 알려진 이가 이미 여섯 달이 되었느니라.”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
그러자 비로소 마리아는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기를 바랍니다.”하고 대답하죠.
마리아가 대답한 그 말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권능으로 덮으신다면 충분히 그렇게 되기를 믿습니다, 하는 뜻 아닙니까?
그래서 설령 돌팔매질을 당해 죽는다 할지라도, 죽으면 죽으리는 심정으로, 마리아는 하나님의 뜻을 받들었던 것이죠.
그것이 바로 믿음의 용기죠.
(적용)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그런 믿음의 용기가 있는지 돌아보게 되지 않습니까?
엊그제 새벽녘에 일어나기 전에 기도하는데, 환상을 보게 되었죠.
1주일 넘게 체하는 것 같아 배가 아파서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날 새벽녘에 두 개의 불이 제 배에 떨어지는 모습을 봤죠.
그때 드는 생각은 ‘와우, 내게 능력을 부어주시는가 보다.’했죠.
그런데 꿈 속에서도 방언으로 기도하는 모습이 보였는데, 그 능력이 나를 덮는가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능력은 모르겠고, 아팠던 배가 편한 모습을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믿음의 용기와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상관은 없지만 그때 그 불덩이가 내게 임할 때, 그 담대한 마음, 세상에 남부러울 게 없는 마음을 느꼈죠.
그 불덩이만 있으면 모든 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담대한 용기가 생기더라는 것이죠.
믿음은 확실히 용기인데, 그 용기의 출처가 내게로부터 나오면 만용이 되고 맙니다.
하지만 그 믿음의 출처, 믿음의 용기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면 하나님께서 선한 역사를 이루게 되는 것이죠.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그런 믿음의 용기를 하나님께서 불어넣어주시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주님께서 말씀하고자 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이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역배) 고린도에서 1년 6개월간 복음을 전한 바울은 2차 전도여행을 끝내고 안디옥교회로 돌아오고자 했죠.
그때 바울을 따라 나선 인물이 바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였습니다.
그들은 본토 출신의 유대인으로서 로마에서 천막을 만들다 쫓겨나 고린도로 오게 되었고, 그곳에서 바울을 만났죠.
1년 넘는 기간 동안 바울과 함께 평일에는 천막을 만들었고, 안식일이면 함께 주님을 경배하는 삶을 살게 되었죠.
바로 그 믿음의 끈 때문에 바울이 안디옥으로 돌아오는 그 시점에 그 부부도 함께 따라나선 것이었죠.
다만 바울은 고린도에서 곧바로 안디옥교회로 돌아온 게 아니라 에베소에 잠시 들렀죠.
더욱이 그곳 에베소에서 배편을 알아보는 동안 유대인 회당에 들어가 주님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자 유대인 회당의 유대인과 이방인들 중에 주님을 영접한 사람들이 꽤 생겨났죠.
하지만 바울은 그곳에 더 이상 머물 수 없어서 떠나려고 하는데,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가 그곳에 남아 새신자를 섬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배를 타고 안디옥교회로 돌아갔고, 그곳 에베소에는 브리스길라 부부만 남는 상황이었습니다.
바로 그때 즈음에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아볼로라는 유대인 대학자가 에베소에 오지 않았습니까?
그는 파피루스의 원산지요 수많은 장서를 소유한 알렉산들이 도서관 출신답게 구약성경에 능통한 대학자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세례 요한의 세례를 알고 있었고, 예수님이 소식도 알고 있는 자였죠.
세례 요한이 “보라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하고 고백했던 그 예수님에 대해서 말입니다.
하지만 아볼로가 알고 있던 주님의 소식은 거기까지였죠.
그야말로 반쪽자리 복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세례 요한의 세례는 회개를 외치긴 했지만 실제로 변화된 사람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외칠 때, 주님의 복음 앞에 수많은 사람들이 변화되었죠.
더욱이 세례 요한은 주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목격하지 못한 채, 일찍 참수형 당한 인물이죠.
그 때문에 세례 요한이 전한 복음도 세례 요한이 전한 세례도 반쪽자리 복음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그 까닭에 아볼로 대학자가 에베소에 와서 무엇을 했습니까?
그는 유대인 회당에 들어가 구약의 두루마리 성경을 읽으면서 세례 요한이 전한 복음, 곧 주님의 복음을 전했죠.
하지만 그 자리에서 듣던 브리스길라 부부는 무엇을 생각하게 되겠습니까?
왠지 어설픈 복음, 반쪽자리 복음을 전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겠죠.
왜냐하면 브리스길라 부부는 고린도에서부터 1년 6개월 넘게 바울과 함께 지내면서 온전한 복음이 무엇인지 듣고 깨달았기 때문에 말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했습니까?
지난 시간에 살펴 본 것처럼 브리스길라 부부는 그 회당 모퉁이에서 아보로 대학자에게 면박을 준 게 아니었죠.
오히려 그 대학자를 자기들 집으로 초청하여 발도 닦아주고 진수성찬을 대접해줬죠.
그리고는 그때 차분하게 주님의 복음 곧 온전한 복음,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충만하게 전하여 가르칠 수 있었던 것이죠.
그때 아볼로 대학자도 자신을 향해 주님의 사랑과 섬김으로 대접한 그 부부의 복음을 통해 온전히 변화될 수 있었던 것이죠.
그것도 하루 한 번 그런 게 아니라 계속해서 그 복음을 듣고 배우고 깨우쳤고 그를 통해 성령의 임재도 경험한 아볼로였겠죠.
(깨달음) 그러니 그런 브리스길라 부부의 모습을 통해 무엇을 깨닫게 되었습니까?
아무리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이라고 해도 온 정성을 다한 섬김과 사랑의 수고를 통해 한 영혼이 복음에 물들게 된다는 것입니다.
내 능력 내 자랑거리로는 누군가를 온전한 복음으로 물들게 하지 못하지만 주님의 섬김과 사랑을 통해서는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이죠.
그 사람이 대학자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본문) 오늘 본문은 그 이후의 상황을 전해주는 말씀인데 본문 27-28절 말씀을 다시 한 번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아볼로가 아가야로 건너가고자 함으로 형제들이 그를 격려하며 제자들에게 편지를 써 영접하라 하였더니
그가 가매 은혜로 말미암아 믿은 자들에게 많은 유익을 주니
이는 성경으로써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언하여 공중 앞에서 힘있게 유대인의 말을 이김이러라”
(사본) 브리스길라 부부로부터 섬김과 사랑을 통해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전해 듣고 깨달은 아볼로가 어디로 향합니까?
고린도로 향하죠.
고린도는 앞서 바울과 브리스길라가 1년 6개월 넘게 머물려 복음을 전한 곳이요, 이제는 복음의 기반을 다졌다고 생각해 떠나온 곳이죠.
그런데 아볼로는 왜 소아시의 중심지요 대도시인 에베소를 제쳐놓고 마게도냐 아랫 지역인 아가야 지역 고린도로 향한 것일까요?
오늘 본문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신약성경의 사본 가운데 5세기경에 쓰인 것으로 추정되는 ‘베자 사본’(Codex Bezae)에는 27절이 이렇게 기록돼 있습니다.
“에베소에 머물고 있던 어떤 고린도인들이 아볼로의 말을 듣고 그에게 자기들과 함께 자기들의 고향으로 건너가고자 강권하므로,
이에 아볼로가 허락하자 에베소 사람들이 고린도에 잇는 제자들에게 편지하여 이르기를 그 사람을 영접하라 하여,
그가 아가야에 자리를 잡고 각 교회들에게 큰 도움을 주니라.”
(깨달음) 무엇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까?
왜 아볼로가 아가야 곧 고린도로 간 것인지 알 수 있게 되죠.
에베소에 와 있는 고린도 사람들이 아볼로가 전한 복음, 이제는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온전한 복음을 듣고, 청을 넣은 거죠.
자신들과 함께 고린도로 건너가서 그곳에서 주님의 복음을 전해달라고 말이죠.
그때 아볼로가 그들의 강권함을 허락했고, 곧바로 그들과 함께 고린도로 떠날 때, 에베소의 성도들이 편지를 써 준 것이죠.
‘이 사람 아볼로를 잘 영접하여 주시오’하고 말이죠.
그래서 아볼로가 아가야의 각 교회, 고린도에 있는 각 가정과 회당의 교회들을 돌아보며 주님의 마음으로 섬겼던 것이죠.
(원성)그래서 고린도전서 3장 6-7절에 바울이 훗날 3차 전도여행때 고린도교회를 향해 그런 편지를 써 보냈던 것이죠.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깨달음)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바울은 최초 복음의 씨앗을 심은 자요 아볼로는 그 후에 물을 주는 역할을 했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진정으로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믿음이 자라게 된 것은 하나님의 역사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통해 더욱 중요한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게 있습니다.
바로 믿음의 용기가 그것입니다.
아볼로는 브리스길라 부부로부터 온갖 섬김과 정성을 통해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온전히 깨닫고 받아들였죠.
그렇다면 그 상태로 그냥 대도시 에베소에 눌러 앉아 주님의 복음을 전하면 될 일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에베소에 온 고린도의 사람들이 자신들과 함께 자기들 고향으로 가서 전해달라고 했습니다.
그때 아볼로는 그 위대한 믿음의 결단, 곧 용기 있는 믿음의 결단을 내린 것이죠.
다만 그 결단의 주체는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불어넣어주신 용기였다는 점입니다.
그것이 바로 에스더에게 있던 믿음의 용기요, 마리아에게 있던 믿음의 용기였던 것이죠.
(주문)그렇기에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고자 하시는 은혜가 무엇인지 알수 있죠.
(은혜)주님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믿음의 용기를 불어넣고자 하시는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주음성)그래서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성령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아볼로가 고린도로 떠날 결단을 한 것은 오직 성령님께서 불어넣으신 믿음의 용기지 않더냐?”
“에스더가 죽으면 죽으리라 하고 3일 금식하면서 왕 앞에 나아간 것도 주님께서 불어넣은 믿음의 용기이지 않더냐?”
“마리아가 ‘주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지길 원하나이다.’하고 수태고지를 받아들인 것도 믿음의 용기이지 않더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세상이 힘들고 고달플지라도 때로 성령님께서 너에게 큰 용기, 믿음의 담대한 용기를 불어넣을 때 순종하면 좋겠구나.”
“순종이 힘들고 어렵지만 순종하고 나면 하나님께서 크신 능력과 은총의 복을 부어주시는 것처럼 말이다.”
“너를 통해서도 순종케 하는 믿음의 용기를 불어넣을 때 에스더처럼 마리아처럼 그리고 아볼로처럼 큰 결단을 하면 좋겠구나.”
“그것이 너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기 때문이요, 그 일을 통해 하나님께서 귀한 상급을 베풀어주실 테니 말이다.”
(찬양) 주 하나님 독생자 예수 날 위하여 오시었네
내 모든 죄 다 사하시고 무덤에서 부활하신 나의 구세주
살아계신 주 나의 참된 소망 걱정 근심 전혀 없네
사랑의 주 내 갈 길 인도하니 내 모든 삶의 기쁨 늘 충만하네
(예화)이동원 목사님의 〈처음 복음〉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미국에 같은 고등학교에 근무하는 빌과 글로리아라는 선생님이 사랑에 빠졌습니다.
빌은 음악을 좋아했고 글로리아는 영어 전공으로 글 쓰는 것을 좋아했죠.
그들은 결혼해서 빌은 음악을 만들고 글로리아는 가사를 쓰는 환상의 커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환상적인 커플의 삶에 혹독한 시련이 찾아왔습니다.
남편 빌이 단핵구증이라는 전염병에 걸려 무력감에 시달려 모든 일을 포기했습니다.
아내 글로리아는 셋째 아이를 임신한 몸으로 병든 남편을 돌보아야 했습니다.
이때 이들 가족을 둘러싼 억울한 루머로 마음 둘 곳이 없었습니다.
이제 한 해가 저물고 새해를 맞이하던 시간에 글로리아는 거실에서 말씀을 묵상하고 있었죠.
그때 글로리아에게 하나님의 살아계신 임재의 터치가 임했습니다.
그때 가슴에 두려움이 사라지고 주님의 임재가 평화로 밀려들었죠.
그러자 그녀는 붓을 들어 노래 가사를 만들고 남편에게 소리를 쳤습니다.
“여보 주님이 말씀을 주셨어요. 곡을 만들어 봐요.”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게 불멸의 가스펠 ‘살아계신 주’였습니다.
(찬양) 살아계신 주 나의 참된 소망 걱정 근심 전혀 없네
사랑의 주 내 갈 길 인도하니 내 모든 삶의 기쁨 늘 충만하네.
(해설) 그 찬양의 원문 가사는 이렇습니다.
Because He lives, I can face tomorrow.
(그가 살아계시기 때문에, 나는 내일을 마주할 수 있다)
Because He lives, all fear is gone.
(그가 살아계시기 때문에, 모든 두려움이 지나간다)
Because I know, I know, He holds the future.
(나는 알고 있다, 나는 확신한다, 그가 그 미래를 붙잡고 있다는 것을)
And life is worth the living, just because He lives.
(인생은 살아 있는 가치다, 그가 살아 있음으로 인해서 말이다)
(깨달음) 무엇을 깨닫게 해 주는 것 같습니까?
믿음의 용기를 북돋아주신 성령님의 임재 곧 성령님의 터치였습니다.
남편이 단핵구증이라는 전염병으로 무기력증에 빠져 있었지만, 성령님의 임재 속에서 곡을 쓰고 노래를 부르며 인생의 내일을 꿈꾸게 해 준 용기 말입니다.
(내음성) 그렇기에 우리가 기도할 때 어떤 기도를 주님께서 기뻐받으시겠습니까?
“주님, 저에게도 믿음의 용기를 주시옵소서.”
“아볼로가 에베소에서 고린도로 나아가는 게 두렵고 떨리는 일이지만 주님께서 믿음의 용기를 불어넣어주셨잖아요.”
“주님, 에스더에도, 마리아에게도 불어넣어주신 그 담대한 믿음의 용기를 저에게도 불어넣어주세요.”
“단핵구증이라는 전염병으로 무기력증에 걸린 남편을 바라보며 아내가 고통속에 살았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그 부부를 성령으로 충만케 하셨고 감싸주셔서 이 세상을 살아갈 믿음의 용기를 불어넣어주셨어요.”
“오늘 저에게도 이 세상의 모든 환경을 이겨낼 수 있도록 믿음의 용기를 불어넣어주세요.”
“그리하여 주님 재림하실때까지 제게 부여한 소명과 삶을 완주할 수 있도록 성령으로 터치해 주세요.”
(찬양)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나는 일어나 달려 가리라
주의 영광 온 땅 덮을 때 나는 일어나 노래하리
내 사모하는 주님 온세상 구주시라
내 사모하는 주님 영광의 왕이시라
(설교닫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은 용기를 필요로 합니다.
아볼로가 브리스길라 부부를 통해 반쪽 자리 복음을 벗어나 완전한 복음 곧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듣고 깨닫게 되었죠.
그 후에 고린도에서 온 사람들의 부탁을 받아 에베소에서 아가야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은 주님께서 믿음의 용기를 불어넣어주신 까닭이었습니다.
그 용기는 에스더에게도 마리아에게도 불어넣어주셨고 무기력증에 시달리는 빌에게도 불어넣주신 믿음의 용기였습니다.
이 세상에 절망적인 상황과 고통스런 상황이 우리 앞에 놓일 때도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은 성령님께서 불어넣어주시는 믿음의 용기 뿐입니다.
주님의 그 은혜가 저와 여러분들에게 충만하게 임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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