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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열기)(예화)무한공항 참사로 인한 희생자 179명의 시신이 모두 유족에게 인계되었다고 합니다.
너무나도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사는 지역은 무안과 가깝고 동남아나 제주도로 가는 분들도 대부분 무한공항을 이용하죠.
그런 차원에서 볼 때 내가 있어야 할 자리에 그 분들이 있어서 나를 대신해 그 분이 참사를 당하지 않았나 싶은 생각입니다.
제 주변에 광주에 사는 성도님은 자기 가족이 참사를 당했는데 남은 것은 턱뼈 조각뿐이었다고 합니다.
또 어떤 분은 이빨만 남아 있는 상태라고 하죠.
어떤 잔해가 남아 있든지 그것으로 신원을 확인하고 장례를 치를 수 있어서 그나마 다행스런 일이지 않나 싶습니다.
(깨달음)우리도 실은 언제 어느 때 죽음을 맞이할지 모르는 연약한 존재들 아닙니까?
제가 아는 어떤 분이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땅에서 나는 사고는 많이 나지만 그나마 대형사고는 아닐 수 있지만 하늘에서 나는 사고는 아주 적지만 한 번 나면 대형사고가 터진다고 말이죠.
우리도 그 자리에 있다면 그런 대형사고로 이 세상을 떠나야 할지 모릅니다.
다만 장례식장에서 시신이나 유품이나 유해를 모시고 장례를 치를 때 그 슬픔을 가눌 길은 없을 것입니다.
그래도 하나님의 자녀들은 영원한 예루살렘 성이 있음을 믿고 그 나라에 안식할 것을 믿기에 소망을 품을 수 있는 것이죠.
그것이 예수님께서 친히 제자들에게 곧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말씀하신 언약(요14:2)입니다.
(적용)실은 요셉이 죽었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다.
요셉은 자기 죽음을 앞에 두고 그 자녀들에게 당부한 바 있습니다.
내가 죽거든 내 뼈를 애굽에서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메고 가라고 말이죠.
그래서 모세의 시신을 입관할 때 그 후손들은 가나안 땅을 늘 염두에 무며 모세의 시신을 입관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의 ‘관’이 히브리어로 ‘아론’(אָרוֹן)이고 영어로 Ark 곧 ‘궤’라는 말입니다.
‘궤’라는 말은 보통 ‘언약궤’를 말할 때 쓰이는 말인데 요셉의 ‘관’에도 그 단어가 쓰였습니다.
그만큼 요셉의 죽음이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셉의 죽음은 죽음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약속의 땅을 바라보는 언약궤와 같았다는 것입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 자신들도 마찬가지죠.
언제 어느 때에 죽음을 맞이할지라도 그 상황은 힘들지만 요셉의 언약궤처럼 영원한 하나님나라를 소망하며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안공항 사고사를 맞이한 희생자들의 유족을 향한 하나님의 위로요 우리를 향해 하나님께서 선포하고자 하시는 메시지인 줄 믿습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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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배)애굽 땅에서 400년간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유월절을 맞아 애굽에서 해방되어 나왔습니다.
출애굽은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해방일지입니다.
그들은 애굽의 고센 땅에서 숙곳을 거쳐 에담 끝에 당도해서 처음으로 텐트를 치면서 편안하게 잠을 잘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앞서 가시는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이 낮에는 뜨거운 열기에 타죽지 않도록 구름 기둥을 만들어 그늘 속에서 시원케 해 주셨습니다.
밤에는 불 기둥을 세워서 그 백성이 사막의 한기에 얼어죽지 않도록 보호해주셨습니다.
더욱이 광야의 도적떼나 이방 세력들의 약탈로부터 천군천사를 보내서 지켜주신 하나님이셨습니다.
그것이 애굽에서 빠져나와 1주일만에 당도한 에담 끝에서 일어난 일이요, 그것은 40년 광야길의 예비화면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한 번 앞서 가신 분이 아니라 광야인생 40년 동안 끊임없이 앞서 가시면서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밤에는 불 기둥으로 인도하시는 분이란 사실입니다.
그때 이스라엘 백성은 에담 끝에서 곧장 북진하면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는 거리였습니다.
하지만 북쪽으로 이동하면 분명코 블레셋과 전투를 치러야 했기 때문에 전쟁경험이 없는 그들로서는 다시금 애굽으로 돌아가지고 할 게 뻔했습니다.
그걸 미리 내다보신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을 에담 끝에서 홍해 앞 비하히롯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리고는 폭 32km의 홍해를 건너 수르협곡으로, 수르협곡에서 마라로, 마라에서 엘림으로, 엘림에서 신광야로, 신광야에서 르비딤으로, 르비딤에서 시내광야로 당도케 하셨습니다.
그 과정에서 바다를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고 빈 하늘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이시는 하나님 곧 하늘의 주관자도 하나님이시고, 반석을 쳐서 생수를 공급하시는 하나님 곧 땅의 주관자도 하나님 이심을 만 천하에 알게 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출애굽한 지 3개월째 되는 날 정확히 50일째 되는 날에 이스라엘 백성을 대표하는 장로들을 불러 시내산에서 짐승의 피로 언약식을 체결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시내산으로 불러 십계명이 기록된 두 돌판과 레위기의 율법서와 성막설계도를 주셨습니다.
그 후에 금송아지 사건을 통해 다시금 재 언약을 체결했고 또 다시 십계명이 기록된 돌판을 주셨죠.
그로부터 7개월에 걸쳐 성막설계도 대로 브살렐과 오홀리압을 필두로 성막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출애굽한 지 1년이 되던 시점, 다시 말해 2년 1월 1일에 성막을 펼쳐 세웠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성막을 불러들여 시내산에서 주신 레위기의 율법서 곧 레위기 1-27장의 내용을 1개월에 걸쳐 하나씩 가르쳐주셨습니다.
드디어 2월 1일이 됐을 때 광야행진을 시작합니다.
그 행진에 앞서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수를 헤아리게 합니다.
20세 이상으로 싸움에 나갈 만한 모든 자의 수가 60만 3550명이었습니다.
그것도 제사장 지파로서 하나님께 속한 레위지파의 숫는 뺀 숫자였습니다.
그러니 여자와 아이들까지 250만 명 이상이 광야 행진을 준비한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각 지파의 수를 헤아린 다음에 동서남북의 진영을 편성해 줍니다.
성막 바깥의 동쪽 진영엔 유다 지파를 필두로 잇사갈과 스불론 지파가 한 군단을 이뤄 야영토록 합니다.
성막 바깥 서쪽 진영엔 에브라임 지파를 필두로 므낫세와 베냐민 지파가 한 군단을 이뤄 야영토록 합니다.
성막 바깥 남쪽 진영엔 르우벤 지파를 필두로 시므온과 갓 지파가 한 군단을 이뤄 야영하게 하죠.
성막 바깥 북쪽 진영엔 단 지파를 필두로 아셀과 납달리 지파가 한 군단을 이뤄 야영하도록 하죠.
그리고 성막을 중심으로 한 레위지파들의 후손을 향해서도 동서남북의 진영을 꾸리도록 합니다.
성막의 동쪽 진영엔 모세와 아론의 자손들이 진영을 꾸려 야영토록 했습니다.
성막의 서쪽 진영엔 게르손 종족들이 야영토록 했습니다.
성막의 남쪽 진영엔 고핫 종족들이 야영토록 했습니다.
성막의 북쪽 진영엔 므라리 종족들이 야영토록 했죠.
그리고 행진할 때는 맨 앞에 여호와의 언약궤를 앞세우도록 했습니다.
그 다음에 유다와 잇사갈과 스불론 지파가 한 군단을 이뤄 그 뒤를 행진하도록 했습니다.
그 다음에 성막을 담당한 게르손과 므라리 종족들이 성막의 기둥과 널빤과 같은 부품을 수레에 싣고 행진토록 했습니다.
그 다음에 르우벤과 시므온과 갓 지파가 한 군단을 이뤄 행진하도록 했죠.
그 다음에 성막의 지성물을 담당한 고핫 종족들이 지성물을 어깨에 매고 행진토록 했습니다.
그 뒤를 이어 에브라임과 므낫세와 베냐민 지파가 뒤를 이어 행진하도록 했습니다.
마지막 행진대열에는 단과 아셀과 납달리 지파가 한 군단을 이뤄 병약한 자와 연약한 자를 다독이면서 행진토록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각종 제사와 정결법과 나실인과 레위인의 책무와 유월절과 같은 절기를 지키도록 햇죠.
(깨달음)그것이 민수기 1∼9장까지 나와 있는 전체적인 내용으로 광야행진을 위한 준비사항입니다.
그렇다면 가나안을 향한 광야 여정길에서 왜 그 백성의 수를 세도록 했겠습니까?
광야 38년 여정길에서 그들의 인구수가 어떻게 변했는지 그걸 통해 깨닫게 하시는 바가 있습니다.
처음 출발할 때 60만3천550명이었는데 가나안을 목전에 둔 요단강 앞 모압 평지에서 그 수를 셌을 때 60만1천730명이었습니다.
그 수에 큰 변화가 없지만 38년의 과정 속에 출애굽 1세대는 대부분 죽었고 출애굽 1.5세대와 광야에서 태어난 출애굽 2세대의 수가 60만1천730명이었습니다.
그렇기에 민수기는 광야 여정길에서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훈련시킨 훈련일지입니다.
출애굽기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해방일지’요 레위기는 ‘훈련교본’이요 민수기는 ‘훈련일지’입니다.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백성은 저절로 언약의 자녀가 되는 게 아니라는 훈련을 통해 온전한 언약이 백성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의 스데반 집사도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40년 인생을 ‘광야교회’라고 표현했습니다.
광야같은 세상에서 저절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게 아니라 광야교회에서 훈련을 통과해야 한다는 것이죠.
(원성)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히6:4-6)
(깨달음)하나님의 은혜로 선택받은 구원받은 자녀라 할지라도 세상의 유혹 앞에 타락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들은 십자가의 은혜를 욕되게 하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만큼 구원받고 선택받은 하나님의 자녀는 이 세상의 죄와 유혹을 이겨내는 광야교회의 훈련된 삶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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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성2)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2:12)
(깨달음)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로 대속 받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받았다면 정말로 두렵고 떠림으로 구원을 이루어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두렵고 떨림이란 끊임없이 하나님을 온전히 경외하고 구원을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 앞에 겸손한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를 위해 광야교회와 같은 훈련된 삶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귀한 보물이 보물섬에 있어도 저절로 보물을 취하는 법은 없습니다.
그 보물을 취하기 위해 배로 항해하고 때로는 파도와 맞서야 하는 훈련이 필요한 법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원받은 우리가 하나님의 온전한 언약의 자녀가 되기 위해서도 광야교회와 같은 훈련된 삶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본문)오늘 본문은 행진대열을 따라 행진하는데 3일 만에 바란 광야에 당도한 모습입니다.
“그들이 여호와의 산에서 떠나 삼 일 길을 갈 때에 여호와의 언약궤가 그 삼 일 길에 앞서 가며 그들의 쉴 곳을 찾았고”(민10:33)
(깨달음)‘여호와의 산’이란 시내산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산 아래가 시내광야요 그 시내광야에서 7개월에 걸쳐 성막을 만들어 펼쳐보였고, 그 성막에 모세를 불러 1개월에 걸쳐 레위기의 율법을 다 설명해 준 것입니다.
그때 광야의 야영방법과 행진대열을 알려주고 나팔을 만들어 불게 했습니다.
그리고는 출애굽한 지 2년 2월 20일(민10:11)에 행진을 시작해 3일째 되는 날 바란 광야(민10:12)에 당도한 것이죠.
그런데 ‘여호와의 언약궤가 그 3일 길에 앞서 가며 그들의 쉴 곳을 찾았다’는 말씀이 모호합니다.
(역본)새번역 성경은 보다 명확하게 본문을 이해할 수 있도록 번역해 놓고 있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산을 떠나 사흘 길을 갔다. 주님의 언약궤를 앞세우고 사흘 길을 가면서, 쉴 곳을 찾았다.”
(원해)이스라엘 백성이 행진대열을 갖춰 3일 길을 갔는데 제사장들이 어깨에 맨 언약궤가 맨 앞에 갔다는 것입니다.
왜 이 말씀이 중요하겠습니까?
이 말씀 전에 모세의 장인의 아들 곧 모세의 처남 호밥이 모세와 함께 있는데 모세가 청을 넣죠.
너는 우리의 눈이 되어 광야의 길을 인도하고 우리와 동행하자고 말이죠.
그런데 호밥은 모세의 제안을 거절하고 자기 길로 가버립니다.
그러면서 이어진 말씀이 본문 말씀입니다.
그만큼 광야에 눈이 밝다고 해서 호밥을 의지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언약궤를 붙들고 나아가라는 거죠.
그런데 우리말 ‘언약궤’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בְּרִית אָרוֹן’(베리트 아론)입니다.
‘베리트’는 언약(covenant)을 말하는 것이고 ‘아론’이 ‘궤’(Ark)입니다.
모세의 형 이름도 아론인데 그 아론은 ‘에하론’(אַהֲרוֹן)입니다.
그런데 아론(אָרוֹן, Ark)은 ‘궤’나 ‘상자’ 그리고 ‘관’으로 쓰인 바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그 상자 그 궤를 언약궤라고 칭하는 것이겠습니까?
그 궤 안에 언약의 증표인 뭔가를 담고 있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히브리서 9장 4절에 보면 언약궤 안에 ‘십계명이 기록된 돌판과 만나가 든 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를 넣었다고 말씀합니다.
물론 솔로몬이 성전을 짓고 난 뒤에는 만나가 든 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는 보이지 않습니다.
적어도 붙박이 성전이 짓기 전인 이동식 성막 시절에는 그 세 가지 것이 중요한 증표요 지침이 되었기 때문에 항상 넣도록 한 것이죠.
(깨달음)그렇다면 십계명이 기록된 돌판을 왜 언약궤 속에 넣도록 한 것입니까?
십계명이 기록된 돌판은 시내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식을 체결한 후에 모세를 시내산에 불러 하나님께서 친수로 써 주신 것이죠.
물론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 있는 동안 이스라엘 백성은 황금송아지를 만들어 하나님이라고 부르며 굿판을 벌였죠.
그때 주동자 3천명을 처단했고 다시금 모세를 시내산에 불러 새로운 돌판에 써 주셨습니다.
앞으로는 눈에 보이는 것만을 좇지 말고 언약의 말씀을 좇아 살도록 하라는 긍휼의 돌판입니다.
또 하나 언약궤 안에 넣도록 한 게 ‘만나가 든 항아리’인데 무슨 뜻에서 넣도록 한 것일까요?
출애굽기 16장에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배고파 죽겠다면서 원망하는데, 하나님을 불신한 죄악이죠.
400년간 노예로 살면서 노예근성에서 나온 불평과 원망의 언어습관이었죠.
그런 불평과 원망을 없애기 위해 하나님께서 갓씨 같고 꿀 섞은 과자 같은 만나를 공급해주시죠.
앞으로도 광야 인생길에서 하나님께서 앞서 가시면서 너희들의 배고픔을 해결해 줄 것이라는 증표로 그것을 주셨고 그걸 언약궤 안에 넣도록 한 것입니다.
세 번째 언약궤 안에 넣은 것은 ‘아론의 싹 난 지팡이’였습니다.
민수기 16장을 보면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이 250명을 내세워 모세와 아론을 대적하고 거역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그걸 죄악으로 여겼고 그들과 관련된 1만4천700명을 지진으로 심판하시죠.
그 후 하나님께서 각지파별로 나무 지팡이 하나씩 가져오게 했는데 아론의 지팡이에서만 싹이 나게 하셨죠.
하나님에 대한 불신과 교만은 거두어 들이고 이제부터는 앞서 가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라는 뜻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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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성)그런데 ‘궤’라는 말이 구약성경에 202번 등장하는데 ‘궤’가 ‘관’으로 쓰인 경우가 있습니다.
요셉이 110세에 죽었는데 그때 그 몸에 향료를 넣고 입관했습니다.
그 ‘관’으로 번역된 히브리 단어가 ‘아론’(אָרוֹן)’(창50:26) 곧 본문의 ‘궤’와 히브리어가 같습니다.
(깨달음)그 사실을 통해 무엇을 깨달을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죽음을 통해서도 그 자녀들에게 소망을 불어넣는 분이란 사실입니다.
어떻게 죽음의 ‘관’ 앞에 그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창세기의 기록은 인간의 죄악과 죽음으로 끝을 맺습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도구로 쓰인 요셉은 죽고 새로운 파라오가 등장해 이스라엘 백성을 노예로 삼죠.
그것으로 끝날 것 같은 그 백성의 운명은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으로 해방시켜 주심으로 바뀝니다.
그것이 출애굽기 말씀입니다.
그때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빠져나오면서 요셉의 관도 메고 나아갔다(출13:19)는 사실입니다.
요셉의 자손은 요셉의 유언을 받들어 그 유골이 담긴 관을 메고 나갔습니다.
가나안 땅에 도착해서는 요셉의 유언대로 약속의 땅인 가나안의 세겜(수24:32)에 묻죠.
(적용)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성도들, 주님 안에서 죽음을 맞이한 이들을 향한 영적 메시지입니다.
우리가 죽게 되면 시신이든 화장이든 모두 관과 유골함에 들어갑니다.
그 관과 유골함이 실은 ‘궤’와 다를 바 없다는 사실입니다.
요셉의 뼈를 언약의 땅으로 메고 간 것처럼 우리도 죽으면 흙에 묻지만 하늘나라의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안공항 참사 가운데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언약의 자녀들을 향한 약속이자 오늘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언약인 줄 믿습니다.
그만큼 하루하루 살아가는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무엇을 붙들고 무엇을 앞세우며 살아가야 하는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저와 여러분 모두는 오직 하나님의 언약궤, 곧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보여주는 말씀을 붙들고 하루하루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2025년 1월 첫달부터 광야교회를 향해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붙들고 살아야 것이 바로 그것인 줄 믿습니다.
(주문)그렇기에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혜가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은혜)주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이 언약궤를 붙들고 사는 2025년 한 해가 되길 바라시는 은혜입니다.
(주음성)그래서 성령님의 음성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그렇게 말씀하지 않겠습니가?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무안공항참사로 희생당한 이들과 유족들에게 너무나도 큰 아픔이요 오늘 너를 대신해 그들이 고통을 겪은 것 아니겠느냐?”
“하지만 그들의 유골이 요셉의 언약궤처럼 하나님의 언약의 자녀들에게는 영원한 하나님나라의 안식처로 들어가는 증표이지 않겠느냐?”
“출애굽하는 요셉의 자손들이 요셉의 유골을 메고 가나안 땅으로 올라간 것도 영원한 언약의 소망을 성취하기 위함이지 않더냐?”
“출애굽한지 2년 2월 20일이 됐을 때 광야로 행진하던 그들이 그 무엇보다도 언약궤를 앞세우며 나아가도록 했던 것도 같은 이치이지 않더냐?”
“모세의 처남 호밥이 광야 지리에 익숙할지라도 오직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붙들고 훈련받으며 나아가도록 말이다.”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2025년 한 해를 시작하면서 네가 무엇을 붙들고 살아야 할지 너무나도 명확하지 않느냐?”
“광야에 익숙한 호밥을 좇아 살 것도 아니고 세상의 방식이나 너의 능력을 붙들고 살게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잠16:9) 말이다.”
“빠른 경주자라고 먼저 도착하는 것도 아니고 용사라고 전쟁에 승리하는 것도 아니고 지혜자라고 음식물을 얻는 것도 아니요 오직 하나님의 언약의 자녀들에게 그 시기와 때를 정해주지 않겠느냐(전9:11)?”
“그러니 2025년 한 해 동안 네 명철이나 네 지헤나 네 경험보다 오직 하나님의 언약궤 말씀을 붙들고 네가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
“그 하나님께서 광야교회를 통해 훈련시킬 때에 두렵고 떨림으로 그 구원을 이루기 위해 훈련을 통과할 때 너를 향한 영원한 예루살렘 성이 기다리고 있을테니 말이다.”
(찬양)주님 말씀하시면 내가 나아가리다 주님 뜻이 아니면 내가 멈춰서리다
나의 가고 서는 것 주님 뜻에 있으니 오 주님 나를 이끄소서
뜻하신 그 곳에 나 있기 원합니다 이끄시는 대로 순종하며 살리니
연약한 내 영혼 통하여 일하소서 주님 나라와 그 뜻을 위하여 오 주님 나를 이끄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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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고등학교를 졸업하는 아들이 아버지에게 졸업 기념으로 자동차를 한 대 사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아들이 졸업을 하고 대학에 입학해 개학을 했지만 아버지는 자동차를 사주지 않았습니다.
기숙사로 들어가는 아들에게 아버지는 성경을 한 권을 주면서 틈나는 대로 성경을 읽으라고 했습니다.
특별히 빌립보서 4장 19절은 네 인생에 큰 도움이 될 테니 꼭 펴서 읽어보라고 했죠.
그러나 자동차 때문에 속이 뒤틀린 아들은 성경책을 구석에 처박아 둔 채 읽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를 만날 때마다 자동차를 사 달라고 졸랐습니다.
그때마다 아버지는 성경을 읽었느냐?
빌립보 4장 19절을 읽었느냐 하면서 응수할 뿐 자동차는 사주지 않았습니다.
이제 4년이 지나고 졸업하는 날 부모가 아들을 향해 축하하러 왔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에게 있어야 할 성경책이 먼지 속에 처박혀 있는 걸 봤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다시금 성경책을 주면서 빌립보서 4장 19절을 읽어보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아들은 마지못해 그곳을 폈습니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빌4:19)
그 말씀과 함께 그 성경책 갈피 속에 자동차 한 대 값에 해당하는 수표가 들어 있는 걸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깨달음)2025년 우리는 금송아지를 만들고 하나님이라고 경배한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눈에 보이는 현금이나 수표를 원할지 모릅니다.
2025년 경제적으로 외줄타기 인생과 같은 상황에서는 더더욱 그럴지 모릅니다.
하지만 앞서 가시는 하나님은 눈에 보이는 것보다 언약궤를 붙들고 살아가는 언약의 자녀들에게 필요한 것을 친히 공급해주시는 아바 아버지이신 줄 믿습니다.
(내기도)그렇기에 우리가 주님 앞에 기도를 드릴 때 어떤 기도를 기뻐받으시겠습니까?
“그래요 주님. 2025년 한 해 동안 앞서 가시는 하나님의 언약궤를 붙들고 살게 해 주세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나와 메추라기를 생수를 그 필요한 것들을 앞서 공급해주셨는데도 눈에 보이는 것만을 좇던 그들이었습니다.”
“2025년 한 해 동안 하나님의 언약궤인 말씀을 붙들고 살아갈 때 저의 쓸 것을 미리 채워주시는 은혜를 누리게 해 주실 줄 믿습니다.”
“눈에 보이는 황금송아지를 쫓기보다 오직 만나와 메추라기와 생수를 공급해주시는 앞서 가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사는 한 해로 삼길 원합니다.”
(찬양)나 비로소 이제 깊고 넓은 바다간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내 손을
주는 결코 놓치지 않으셨다 나 비로소 이제 폭풍우를 뚫고 간다
비바람에 흔들리는 나약한 나를 잡아 주시는 그분은 나의 주님
주 나를 놓지 마소서 이 깊고 넓은 바다에 홀로
내 삶의 향해의 끝이 되는 주님이시여 난 의지합니다.
날 포기하지 마소서 나 잠시 나를 의지하여도 내 삶에 항해의 방향을 잡아 주시옵소서
이 깊은 바다에 날 홀로 버려두지 마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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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닫기)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2025년 한 해 동안 무엇을 앞세우며 살기를 원하십니까?
눈에 보이는 힘과 능력과 경험보다 오직 하나님의 언약궤를 붙들고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요셉의 관을 매고 출애굽한 것도 실은 언약의 궤를 매고 간 것이요 출애굽한지 2년 2월 20일에 광야로 행진할 때 그 백성은 언약궤를 앞세우고 나아갔습니다.
그 모두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증거로 삼고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대학을 졸업할때까지 빌립보서의 성경을 펼쳤다면 아들은 자동차를 살 수 있는 수표를 얻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빠른 경주자라고 선착하는 것도 아니고 용사라고 승리하는 것도 아니고 지혜자라고 음식물을 먼저 먹는 게 아니라 오직 앞서 가시는 하나님께서 때와 시기를 정해주시는 줄 믿습니다.
그렇기에 2025년 한 해 동안 그 하나님의 언약궤 곧 말씀을 붙들고 살아갈 때 주님께서 베푸시는 은혜의 주인공으로 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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