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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열기)(성화)창세기 1장은 하나님께서 창조주이심을 선포한 말씀입니다.
다만 첫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 창조하신 걸 알려주는 것은 창조 방법이나 창조순서를 과학적으로 알려주고자 한 게 아니죠.
각각의 날과 그날 속에 깃든 신들까지도 통치하시는 우주적인 하나님에 대한 선언입니다.
고대 근동 사람들이 여러 신을 숭배하고 있었는데 그 신들을 신화 속에서 벗겨내고 하나님만이 유일하신 창조주임을 선포한 것이죠.
물론 첫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 창조하신 모습은 참으로 독특합니다.
첫날부터 셋째 날까지는 뭔가 발판이나 기둥을 만드는 모습과 같습니다.
극장으로 치면 무대를 만든 모습이라 할 수 있죠.
넷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는 그 발판과 기둥 위에 뭔가를 채우는 모습입니다.
첫째 날은 혼돈과 공허와 흑암을 몰아내는 빛을 지으셨죠.
그 빛은 밤과 대조되는 빛이기도 하지만 이 땅에 생명을 주려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시고 바울에게 진리와 생명을 준 빛입니다.
둘째 날은 물과 물 아래 곧 대기(atmosphere)와 대양(oceans)을 만드셨습니다.
셋째 날은 마른 땅과 식물을 만드셨죠.
그렇게 첫째 날부터 셋째 날까지는 모든 무대와 기둥을 셋팅하신 것입니다.
이제 넷째날부터는 그 발판과 기둥과 무대 위에 뭔가를 하나씩 채워넣는 형국입니다.
넷째 날에 하나님께서는 해와 달과 별을 지어서 채워넣으셨죠.
다섯째 날에는 물 아래의 물고기와 물 위에 새들을 지어서 채워넣으셨습니다.
여섯째 날에는 마른 땅 위에 동물과 그것들을 다스릴 사람을 각각 지어서 채워 넣으셨습니다.
(깨달음)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데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 하니시 그 빛이 생겨났습니다.
그 빛으로 인해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물러갔습니다.
그 빛으로 인해 우리나라의 건진법사와 천공과 미륵과 보살 등 수많은 어둠의 영들이 다 물러갔으면 좋겠습니다.
그 빛으로 인해 하늘의 공중권세 잡은 사단의 세력들도 다 떠나가고 이 땅에 진리와 생명이 임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만일 첫째 날에 사람을 먼저 만드셨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발판도 만들어 놓지 않고, 기둥도 세워놓지 않고, 무대도 마련해놓지 않고, 배우부터 만들었다면 말입니다.
그야말로 혼돈과 공허와 흑암 속에서 떨고 두려움과 공포에 시달리지 않았겠습니까?
그만큼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삶을 친히 예비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이 두려움과 공포에 떨지 않도록, 배고픔에 허기지다 죽지 않도록, 모든 환경을 조성하신 후에에 인간을 지으신 것입니다.
건물로 치자면 밑에 터파기를 한 다진 다음에 파일 곧 기둥을 박은 것과 같습니다.
기둥을 잘 박아야 그 건물이 흔들리지 않고 한 층 한 층 건물을 위로 올릴 수 있는 것이죠.
건물의 기둥이 중요하듯, 극장의 무대가 중요하듯, 인간을 위한 발판은 너무나도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걸 미리 아시고 우리를 위해 그 모든 것들을 셋팅해 놓으신 것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은 창세기 1장에서부터 진리와 생명되신 하나님께서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알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적용)국립재활원에 김종배 박사가 있습니다.
일찍이 공학도를 꿈꾸며 카이스트에 재학하던 전도유망한 청년이었죠.
그런데 어느 날 사고를 당해 목 아래가 전신 마비가 되었습니다.
혼자 힘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였고 불구 상태라 절망이 밀려들었습니다.
그 절망의 맨 밑바닥에 떨어진 그 순간 누나가 와서 성경책을 주고 말씀을 읽고 용기를 갖고 희망을 품으라고 했습니다.
그때부터 그 절망의 자리에서 그는 말씀을 묵상했습니다.
성경을 읽고 또 읽는 가운데 주님이 주신 진리와 생명의 자유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때 비로소 자기 장애를 바라보지 않고 주님을 바라보며 꿈과 희망을 갖고 미국의 피츠버그 대학원을 졸업을 하고 교수가 된 것입니다.
미국에서 공부한 그는 우리나라의 장애인 복지를 위해서 국내로 돌아왔습니다.
그후 국립재활원에서 장애인을 위해 여러 사역을 하고 있는데 그는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움직일 수 없는 몸이 되어 꼼짝없이 집안에 갇힌 저는 그야말로 종신형 선고를 받은 기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다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말씀 앞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성경을 읽는 것이 너무 좋아 매일 매일 성경을 읽었습니다.”
“그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나니 ‘아! 정말 자유라는 게 이런 거구나!’ 하는 자유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전에는 장애인이 되어버린 제 모습을 사람들 앞에 보이기 싫어 나서는 것도 꺼렸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이 생기니까 사람들 앞에 담대히 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떻습니까?
전도유명한 청년이 카이스트에 들어갔을 때만 해도 얼마나 많은 꿈을 품고 들어갔겠습니까?
하지만 갑작스런 사고 앞에 전신마비 불구자가 되었을 때 모든 절망이 한꺼번에 밀려든 것 아닙니까?
하지만 누나가 전해 준 성경책을 통해 말씀을 읽을 때 그의 어두운 심령에 빛이 임한 것 아닙니까?
그 말씀을 통해 무너진 삶의 기둥을 다시금 세울 수 있었던 것이죠.
창조주 하나님께서 혼돈과 공허와 흑암과 두려움과 추위와 굶주림에 허덕일 인간을 위해 그 모든 걸 셋팅한 후에 인간을 지으신 앞서가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절망에 빠진 김종배 박사에게 말씀으로 인생의 기둥을 삼아 새 인생을 살게 하신 앞서가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이 오늘 저와 여러분들의 하나님이시고 2024년 신년주일인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에게 선포하고자 하시는 메시지인 줄 믿습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역배)애굽 땅에서 400년간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 그 절망과 탄식 가운데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해방과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만큼 출애굽기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해방일지입니다.
그때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의 고센 땅을 빠져나와 숙곳을 거쳐 에담 끝에 장막을 쳤습니다.
그 길이 짧게는 3일 길게는 1주일 정도 걸리는 거리였습니다.
그곳에 장막을 치기까지 여자와 아이들을 합한 250만 명 이상이 걷고 또 걸어서 그곳까지 도착한 셈이었습니다.
그때 그들이 에담 끝에 장막을 칠 수 있었던 것은 ‘앞서 가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사막의 한복판에 있는 그들을 시원케 해 주셨고 밤에는 불 기둥으로 사막의 한기를 따뜻하게 해 주신 것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막에 출현하는 수많은 도적떼와 이방 세력들조차도 앞서 가시는 하나님께서 천군 천사를 보내서 모두 몰아내주신 것이었습니다.
그 까닭에 1주일만에 에담 끝에 도착한 그들이 모두가 텐트를 치고 편안한 밤을 맞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그 1주일의 모습은 광야 40년 여정길의 시작점에 서 있는 모습입니다.
그 시작점에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름 기둥 불 기둥으로 인도하신 것은 앞으로 40년 동안도 그렇게 인도하실 것을 미리 보여주신 예비화면과 같은 격입니다.
실제로 모세가 그 40년 광야 끝지점인 요단강 앞 모압 평지에서 고별설교를 할 때 모세는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너희보다 먼저 가시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 목전에서 모든 일을 행하신 것 같이 이제도 너희를 위하여 싸우실 것이며
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의 아들을 안는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걸어온 길에서 너희를 안으사 이 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 하나
이 일에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믿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너희보다 먼저 그 길을 가시며 장막 칠 곳을 찾으시고 밤에는 불로, 낮에는 구름으로 너희가 갈 길을 지시하신 자이시니라”(신1:30-33)
(깨달음)출애굽의 출발선상인 에담 끝에 그 백성이 장막을 펼치고 편안하게 잠잘 수 있었던 것은 앞서 가시는 하나님께서 구름 기둥 불기둥으로 인도하신 까닭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는 광야 40년 동안도 구름 기둥 불 기둥으로 그 백성들을 위해 앞서 가시는 하나님으로 역사하셨다는 것입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은 한결같이 그 백성을 인도하신 하나님이요 매사에 앞서 가시는 은혜로 그들을 보살펴주셨다는 것이죠.
(본문)그런데 구름 기둥 불 기둥이 구체적을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오늘 본문 21-22절을 다시 한 번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서 가시며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 기둥을 그들에게 비추사 낮이나 밤이나 진행하게 하시니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 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
(원해)여기에 ‘구름 기둥’과 ‘불 기둥’할 때 ‘기둥’은 히브리어로 ‘아무드’(עַמּוּד)인데 말 그대로 ‘기둥’(pillar)입니다.
그런데 기둥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아무드’의 원형은 ‘아메드’(עָמַד)로 ‘세우다’는 뜻입니다.
건물의 기둥도 아래에서 위로 세우지 않습니까?
그것이 그 건물을 지탱하는 근원적인 힘이기 때문입니다.
기둥을 잘못 세우면 모든 건물을 허물어지기 마련이죠.
(깨달음)그런데 ‘기둥’하면 떠오르는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삼손의 기둥(삿16:25-26)도 그렇고 성전의 기둥(왕상7:3-20)도 그렇습니다.
삼손은 나실인으로 태어났는데 맨손으로 사자도 찢어 죽였고 나귀 턱뼈로 블레셋 사람 천 명을 죽인 장사 중의 장사였죠.
하지만 들릴라는 여인의 유혹에 빠져 힘의 근원이 머리카락에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말았습니다.
그때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이 잠든 사이에 머리카락을 다 밀어버렸고 밧줄로 결박했습니다.
예전과 달리 더는 힘을 발휘할 수 없는 삼손임을 알자 그들은 두 눈을 뺀 채 감옥에서 맷돌을 돌리게 했습니다.
그리고는 블레셋 사람들이 믿는 그들의 신 다곤의 신전 앞에서 하나님의 사람을 잡아왔다면서 축제를 벌였죠.
그때 삼손은 마지막 회개하는 심정으로 기둥을 붙잡고 기도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삼손에게 긍휼을 베풀어주셔서 예전과 같은 힘을 마지막으로 부어주셔서 그 기둥이 무너지게 하셨고 그곳에 있는 모든 블레셋 족속들이 몰살당한 일이 일어났죠.
그때 그 기둥도 히브리어로 ‘아무드’입니다.
삼손이 붙잡은 그 기둥은 단순한 건물의 기둥이라기 보다는 어쩌면 하나님의 기둥을 붙잡는 심정이지 않았겠습니까?
자신에게 힘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셨는데 자기 인생의 기둥 되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은 채 교만 속에 살아온 삶을 마지막에 회개했고 그때 하나님께서는 다시금 그 인생의 기둥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깨닫게 하신 것 말입니다.
우리도 우리 인생의 참된 기둥은 오직 하나님 아버지이신 줄 믿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이 성전을 지을 때 세운 기둥도 실은 ‘아무드’입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지을 때 여러 기둥을 세웠고 그 위에 들보를 얹었습니다.
또 여러 기둥을 세우고 주랑까지 지었습니다.
더욱이 그 성전 앞에 두 개의 큰 기둥을 세웠는데 오른쪽 기둥을 이름하여 야긴이라 불렀고 왼쪽 기둥을 보아스라고 불렀죠.
‘야긴’(יָכִין)이란 기둥의 의미는 ‘하나님이 세우신다’는 뜻이고 ‘보아스’(בֹּעַז)란 기둥은 ‘하나님에게 능력이 있다’는 뜻입니다.
대부분의 모든 교회의 예배당 건물을 지을 때 밖에도 두 개의 큰 기둥 모양을 하고 안쪽 강대상에도 두 개의 큰 기둥 모양을 세우는 것도 그 뜻을 세기기 위함입니다.
그만큼 인생의 집도, 교회도, 나라와 민족도, 야긴과 보아스의 기둥 되시는 하나님께서 세우주셔야 온전하게 세워지는 줄 믿습니다.
왜냐하면 그 하나님에게만 인생의 집도, 교회도, 나라와 민족도, 온전하게 세울 힘과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전개)그렇다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은 자연현상으로 만들어진 뭉게구름 같은 게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특별하게 준비하신 구름 기둥이요 불 기둥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이 땅에서부터 하늘 위로 뻗어 있는 기둥이라는 사실입니다.
뜨거운 뙤약볕에 일하는 농부들과 공사현장에 있는 분들은 알 수 있습니다.
그토록 힘들게 일하다가도 쉼을 얻을 때나 간식을 먹을 때 나무 옆으로 가면 자연스레 그늘에서 쉴 수 있다는 걸 말입니다.
그 나무가 실은 그늘을 만들어주는 기둥과 같은 역할을 하기 때문이죠.
구름 기둥이 바로 그런 모습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불 기둥은 왜 세워주신 것이겠습니까?
그 기둥 근처에 있으면 사막의 한기가 사라지고 따뜻한 체온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죠.
그 기둥이 있으면 사막의 맹수나 이방의 도적떼나 적군들이 함부로 쳐들어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앞서 가시는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구름 기둥으로 불 기둥으로 당신의 살아계심을 나타내 주신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에담 끝에 장막을 칠 때까지 1주일만 앞서 가셨다 사라진 분이 아니라 광야 40년 인생길에 늘 앞서서 인도하신 아바 아버지셨습니다.
그러니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을 볼 때마다 그들의 마음에 얼마나 큰 힘이요 버팀목이 되었을지 짐작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적용)어린 자식에게 아버지나 어머니가 사실 기둥과 같은 존재입니다.
제 동기 목사님 가운데 김대운 목사님이 있는데 언젠가 아버님이 돌아가셨는데 나이 많은 상태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때 장례식장에서 위로해 드리면서 제가 그런 말씀을 했습니다.
“목사님은 그래도 아버님이 나이 많이 드셔서 천국에서 가서 좋으시겠어요.”
“권 목사는 어떤데?”
“저는 중학교 2학년 때 아버님이 돌아가셨죠.”
“그래? 몰랐네.”
“지금 생각해 보면 아프더라도 목사님 아버님처럼 오래도록 살았다면 기둥처럼 든든한 버팀목이 되지 않았을까 싶어요.”
이것은 저만 그렇게 느끼는 바는 아닐 것입니다.
부모님 가운데 나이 많아 연로하시고 거동이 불편하시더라도 살아계신 것 자체가 왠지 버팀목처럼 든든하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땅 아래에서 하늘 위로 세워주신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이 꼭 그와 같다는 사실입니다.
앞서 가시는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위한 버팀목처럼 광야에서 굳건하게 서 계서서 그들을 친히 인도하신 아바 아버지라는 사실 말입니다.
앞서 가시는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위해 그 버팀목과 같은 기둥을 세워주셨고 그 기둥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걷기만 가나안 땅에 당도할 수 있도록 역사하신 것이었습니다.
(주문)그렇기에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혜가 무엇인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은혜)주님께서는 저와 여러분들에게 구름 기둥 불 기둥과 같은 든든한 버팀목을 세워주셔서 우리 인생에 앞서 가시는 은헤를 베푸신다는 사실입니다.
(주음성)성령님의 음성을 통해 우리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그렇게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혼돈과 공허와 흑암과 두려움과 굶주림에 처할지도 모를 인간을 위해 앞서 가시는 하나님께서 미리 모든 걸 셋팅해 놓으신 분 아니더냐?”
“장래유망한 청년 김종배가 카이스트에 다니다 사고로 전신마미가 왔을 때 절망뿐이었지만 성경 말씀으로 진리와 참 생명을 깨닫고 인생의 참된 기둥이 하나님이심을 알게 된 것 아니더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 1주일만에 에담 끝에 장막을 칠 때 구름 기둥 불 기둥으로 앞서 인도하신 분이지 않더냐?”
“광야 40년 인생의 시작점에서도 그렇게 구름 기둥 불 기둥으로 인도하신 하나님께서는 광야 40년 마지막지점까지도 그렇게 인도하신 기둥과 같은 분이지 않더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삼손이 나귀 턱뼈로 블레셋 족속 천명을 죽이는 능력을 발휘했지만 죽을 때에 비로소 그 힘의 기둥이 하나님께 있음을 고백했던 것 아니더냐?”
“솔로몬도 그 사실을 알기에 성전 기둥을 야긴으로 명명하며 하나님께서 세우실 것을 믿었고 보아스로 명명하며 하나님께만 그 힘이 있음을 믿고 고백했던 것 아니더냐?”
“2025년 새 출발을 하는 너도 네 인생도 네 가정도 네 자녀들도 네 일터와 사업장도 오직 앞서 가시는 하나님의 그 기둥을 붙잡고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
“때론 무더위에 지칠 때 하나님을 구름 기둥 삼아 쉼을 얻고, 춥고 줆주리고 두려움에 처할 때 하나님을 불 기둥 삼아 기대어 살아가야 하지 않겠느냐?”
“2025년 1월 첫 달부터 야긴과 보아스의 하나님을 네 인생의 기둥으로 삼을 때 12월 마지막까지도 그 힘과 능력을 불어 넣어주지 않겠느냐?”
(찬양)나 비로소 이제 깊고 넓은 바다간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내 손을
주는 결코 놓치지 않으셨다 나 비로소 이제 폭풍우를 뚫고 간다
비바람에 흔들리는 나약한 나를 잡아 주시는 그분은 나의 주님
주 나를 놓지 마소서 이 깊고 넓은 바다에 홀로
내 삶의 향해의 끝이 되는 주님이시여
난 의지합니다 날 포기하지 마소서 나 잠시 나를 의지하여도
내 삶에 항해의 방향을 잡아 주시옵소서 이 깊은 바다에 날 홀로 버려두지 마소서
(원해)본문의 ‘기둥’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아무드’의 헬라어는 ‘스튤로스’(στῦλος)입니다.
그 단어는 실제 ‘기둥’으로 번역되기도 하고 사람을 ‘의인화한 표현’으로 사용된 바 있습니다.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지를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니라”(딤전3:15)
“내가 또 보니 힘 센 다른 천사가 구름을 입고 하늘에서 내려오는데 그 머리 위에 무지개가 있고 그 얼굴은 해 같고 그 발은 불기둥 같으며”(계10:1)
(깨달음)진리의 기둥이라고 할 때 그 기둥이 ‘스튤로스’이고 불기둥이 ‘스튤로스’입니다.
그런데 사람을 가리켜 기둥과 같다고 표현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집안의 장손을 기둥이라고 말하는데, 성경에도 그런 말씀이 나옵니다.
“또 기둥 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나와 바나바에게 친교의 악수를 하였으니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그들은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갈2:9)
(깨달음)이 말씀은 바울과 바나바가 생각하기에 예루살렘교회에 기둥과 같은 존재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친동생이자 예루살렘교회의 수장인 야고보도 그렇고 베드로와 요한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비록 예수님의 살아생전엔 믿지 않았지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후로 구주로 영접했고 누구보다 성실을 다해 예루살렘교회의 수장이 된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을 할 때부터 3년간 따라다녔고 예수님 부활 승천 이후엔 사도로 활약을 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산헤드린 의원들이 복음을 전하지 말라고 할 때도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면서 담대하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과정 중에서 예루살렘 성전의 미문에 앉아 있는 나면서부터 앉은뱅인 그 사람까지 주님의 능력을 고치게 하는 도구가 되었죠.
(적용)바울과 바나바가 보기에 그들은 예루살렘교회의 기둥과 같은 존재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둥 같은 이들은 어디 그들뿐이겠습니까?
바울이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웠는데, 훗날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그곳에 들렀을 때 로마서를 써보냈습니다.
그때 그 편지를 전달한 이가 겐그레아 항구에 사는 여집사 뵈뵈였습니다.
바울은 그녀를 향해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롬16:1)이라고 소개했습니다.
일꾼이란 일하는 사람을 뜻하기도 하지만 맡은 일을 충성스럽게 감당할 때 사용하는 표현이죠.
그만큼 뵈뵈라는 분은 바울이 보기에 하나님의 교회에 기둥과 같은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 까닭에 바울은 뵈뵈를 가리켜서 ‘나의 보호자’(로16:2)라고 부를 정도였습니다.
(적용)어떻습니까?
여러분들은 하나님의교회에 일당백의 역할을 감당하시는 분들인 줄 믿습니다.
여러분들은 제가 생각하기에 하나님의교회에 야고보와 베드로와 요한과 같은 기둥이요 뵈뵈와 같은 기둥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앞서 가시는 하나님, 구름 기둥 불 기둥으로 인도하시는 그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받을 때 하나님나라의 큰 기둥으로 삼아주실 줄 믿습니다.
(내기도)그래서 우리가 주님께 기도를 드릴 때 그런 기도를 기뻐받으시지 않겠습니까?
“그래요. 주님. 2025년 한 해에 앞서 가시는 하나님의교회에 기둥과 같은 존재로 살게 해 주세요.”
“예루살렘교회의 야고보처럼 베드로와 요한처럼, 겐그레아 교회의 뵈뵈처럼 하나님나라의 기둥으로 살게 해 주세요.”
“앞서 가시는 하나님께서 구름 기둥으로 불 기둥으로 인도하신 것처럼, 저도 하나님나라의 기둥으로 살게 해 주세요.”
“부족하고 연약하지만 하나님께서 저를 사용하고자 하실 때 기꺼이 저를 내어드릴 수 있게 해 주세요.”
“2025년 한 해 그런 한 해로 앞서 가시는 하나님 앞에 하나님나라의 기둥으로 살 때 축복의 통로로 사용해 주실 줄 믿습니다.”
(찬양)나 비로소 이제 깊고 넓은 바다간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내 손을
주는 결코 놓치지 않으셨다 나 비로소 이제 폭풍우를 뚫고 간다
비바람에 흔들리는 나약한 나를 잡아 주시는 그분은 나의 주님
주 나를 놓지 마소서 이 깊고 넓은 바다에 홀로
내 삶의 향해의 끝이 되는 주님이시여
난 의지합니다 날 포기하지 마소서 나 잠시 나를 의지하여도
내 삶에 항해의 방향을 잡아 주시옵소서 이 깊은 바다에 날 홀로 버려두지 마소서
(설교닫기)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앞서 가시면서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밤에는 불 기둥을 친히 보호하시고 인도해주셨습니다.
애굽의 고센 땅에서 빠져나와 첫 야영지인 에담 끝에 장막을 칠 때가 그 시작점이요 광야 40년 동안에도 친히 구름 기둥 불 기둥으로 인도하신 앞서 가신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렇기에 2025년 한 해 동안 내 인생의 근원되시는 하나님을 내 힘의 기둥으로 삼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야긴의 하나님께서 내 인생의 기둥이 되셔야 내가 바로 설 수 있고 보아스의 하나님께서 내 인생의 기둥이 되셔야 온전한 능력을 발휘하며 살 수 있습니다.
2025년 한 해 동안 야고보처럼 베드로와 요한처럼 뵈뵈처럼 저와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의나라의 기둥으로 쓰임받는 복된 한 해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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