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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주제는 35절이 밝혀주고 있습니다.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 오늘의 주제는 정말로 부활이 있는가? 부활이 있다면 어떤 몸으로 부활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부활이 있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옛날 헬라 사람들은 육체를 몹쓸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육체를 영혼의 감옥으로 생각했죠. 죽음은 영혼이 육체에서 해방되는 것으로 봤습니다. 그런데 부활한다면 영혼이 그 감옥 속으로 다시 돌아간다고 생각해서, 말이 안된다고 여겼습니다. 더욱이 육체는 죽으면 흙 속에서 썩어 해체되죠. 그런데 어떻게 해체된 육체가 다시 부활한단 말인가? 그들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바로 그 점을 바울이 예를 들면서 바르게 일깨워주고 있는 것입니다.
36절에 “어리석은 자여 네가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부활이 없다는 자를 향해 어리석다고 하는 것이죠. 이를테면 씨를 뿌렸는데 씨가 죽어야 꽃이 핀다는 것입니다. 씨를 심으면 씨가 죽지만, 그것은 죽는 게 아니라 생명이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죠. 부활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37절에 “또 네가 뿌리는 것은 장래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맹이 뿐이로되.” 일례로 나팔꽃 씨가 나팔꽃 자체의 모양과 같은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38절에 “하나님이 그 뜻대로 그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 나팔꽃 씨를 심을 때 전혀 다른 모양의 형체가 올라오듯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죽을 때 육체는 죽지만, 죽은 뒤에는 전혀 다른 형체로 변화된다는 것입니다.
39-40절,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니 하나는 사람의 육체요 하나는 짐승의 육체요 하나는 새의 육체요 하나는 물고기의 육체라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해의 영광이 다르고 달의 영광이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사람의 몸, 짐승의 몸, 새의 몸, 물고기의 몸, 그 모양은 다 다릅니다. 어떤 사람도 물고기의 모양을 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처럼 하나님께서 생명체의 형체를 다 다양하게 만들어 주셨듯이, 죽음 이후의 우리 몸의 형체도 하나님께서 고유하게 만들어 주셨다는 것이죠. 그래서 일월성신과 같은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사람, 짐승, 새, 물고기 등의 땅의 형체도 있는데, 저마다의 특성과 영광이 다르다는 것이죠. 바울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그렇게 말하는 겁니까? 이 땅에서 사는 몸의 형체와 죽은 뒤의 몸의 영광이 다르다는 것이죠. 그래서 42-43절에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죄의 삯이 사망이기 때문에 육체는 욕된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부활 할 때는 더 이상 죄의 지배를 받지 않기 때문에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화된다는 것이죠.
44절,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 우리는 육체의 몸이 썩어 없어지지만 신령한 몸으로 다시 부활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죽기 이전과 죽기 이후에는 변함이 없지만, 이 땅에서 지녔던 몸과 죽고 난 뒤의 몸은 본질적으로 다른 몸이 된다는 거죠. 그래서 45절에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하나님께서 제일 처음 지은 사람이 아담이었습니다. ‘생령’이란 것은 살아 있는 존재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 곧 그리스도시죠. 주님은 생명을 주는 영입니다. 첫 번째 아담에게도 ‘영’, 마지막 아담도 ‘영’인데, 헬라어는 다릅니다. 첫 번째 아담의 영은 프쉬케, 두 번째 영은 ‘프뉴마’입니다. 첫 번째 아담은 생명이 있는 존재에 불과하지만 두 번째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모두에게 생명을 주시는 영입니다.
46절,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사람이 아니요 육의 사람이요 그 다음에 신령한 사람이니라” ‘육의 사람’이란 아담을 말하는 것이고 ‘프쉬키코스’(ψυχικός)로서 육의 몸입니다. 그러나 신령한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 곧 ‘프뉴마티코스’(πνευματικός)로서 ‘영적인 사람’ 곧 생명을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왜 그런 차이가 있습니까? 47절에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첫 번째 사람은 흙으로 지음받아 흙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에서 나셨고 부활하셨기 때문이죠.
48절, “무릇 흙에 속한 자들은 저 흙에 속한 자와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들은 저 하늘에 속한 이와 같으니.” 여기에서 ‘흙에 속한 자’는 우리 자신들을 말하는 것이고, ‘하늘에 속한 자’는 곧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49절에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으리라.” 우리가 이 땅에 살 때는 이 땅에 필요한 흙에 속한 옷을 입지만, 하늘에 살 때는 하나님의 형상의 옷을 입는다는 것입니다.
50절,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혈과 육은 살과 피입니다. 이 살과 피로는 하나님의 유업을 이을 수가 없죠. 살과 피는 지상에 살 때 필요하기 때문이죠. 하나님 나라에 가서는 이런 살과 피가 필요 없게 됩니다.
51절,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여기에서 ‘비밀’ ‘유스테리온’(μυστήριον)은 마지막 종말에 대해서 감추어져 있는 진리입니다. ‘잠잔다’는 것은 ‘죽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마지막 나팔 부는 그 순식간에 영화로운 본질적인 몸으로 모두가 변화된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이미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신령한 몸으로 다시 부활할 뿐만 아니라 이 땅에 살과 피를 지니고 있는 우리 자신들도 신령한 몸을 입어 변화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만큼 자기 생애에 있어서 주님의 재림이 올 줄 믿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53-54절에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 썩을 몸이 썩지 아니한 몸으로 부활케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썩지 아니할 신령한 몸으로 변화된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죠.
55절,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에 모든 육체는 죽음과 함께 흙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마지막 날 신령한 몸을 입고 부활할 때에는 사망이 이길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요? 56절에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사망이 겨냥한 것은 죄라는 것입니다. 또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고 말합니다. 죄를 죄로 정죄하는 것은 율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율법으로는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지만, 율법 그 자체로는 구원을 얻지 못합니다. 우리가 신령으로 몸으로 죄와 죽음을 이길 수 있는 길은 율법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기 때문이죠. rfo서 57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렇게 우리에게 이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바울이 58절에서 마지막 결론을 맺습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사도 바울이 왜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견실하라고, 흔들리지 말라고, 항상 주의 일에 힘쓰는 자들이 되라고 권면하는 것입니까? 결코 이 세상이 끝이 아니기 때문이죠. 만약 이 세상이 끝이라고 생각한다면 더 마시고, 더 놀고, 더 흥청망청 살자고 하지 않았겠냐는 것이죠. 하지만 바울은 분명코 이 육신의 삶을 벗는 부활의 세계, 영화로운 나라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수고가 헛되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날 재림의 날에, 심판의 날에 심은 대로 상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 나라에서 받을 상급을 바라보며 주어진 삶에 충성되게 사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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