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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로서 고린도전서의 마지막 장 마지막 절을 읽게 됩니다. 13절부터 마지막 절까지는 마지막 권면과 인사말에 대한 내용입니다.
우선 13-14절을 통해 바울은 다섯 가지를 권면합니다.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라.” 첫째로 ‘깨어라’인데 이는 ‘그레고레오’(γρηγορέω)는 ‘에게이로’ 곧 ‘일어나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과연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어디에서 일어나고 깨어나라는 것일까요? 자기 우물에서 깨어나고 일어나도록 하는 것이죠. 자신들의 파벌, 은사 문제 등의 우물에서 말이죠. 모든 인간은 실은 자기 우물 속에 갇혀 있습니다. 그것을 깨고 일어나서 영원을 보도록 하라는 것이죠.
두 번째로 ‘믿음에 굳게 서라.’입니다. 어느 자리에서 믿음을 굳게 서라는 것입니까? 너의 삶의 자리에서죠. 내가 영원을 보고 나면, 내 삶에서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내가 영원을 보고 나면, 내 삶에서 아무 의미 없는 것이 무엇인지 분별하게 되죠. 그래서 영원을 보고 내 삶을 지키는 것으로부터 생명의 역사는 흘러가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남자답게 강건하라’. 우리말은 ‘남자답게’가 ‘강건하라’는 동사를 수식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헬라말은 ‘남자다워라.’는 ‘안드리조마이’(ἀνδρίζομαι)로서 별도의 명령형입니다. 그러면 남자들만을 향한 권면일까요? 신앙이란 남성스러움만을 원하는 것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안드리조마이’란 동사는 사람을 뜻하는 ‘안드로포스’(ἄνθρωπος)에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그 당시에는 남성이 우월한 가부장적인 사회였기에 표현상 남성을 의미한 것이지, 결코 의미까지도 남성만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남성이든 여성이든 사람 전체를 향한 권면입니다. 하나님은 그만큼 대통령을 만들지도, 아버지도 만들지도, 선생을 만들지도 않았습니다. 오직 사람을 만들었습니다. 사람다운 사람이 되면 좋은 대통령, 좋은 아버지, 좋은 선생님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람이 되면 좋은 사업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다움을 상실하면 어떤 자리에서 있어도 안 되는 것이죠. 그래서 믿음이란 나의 영혼을 영원에 고정하고 나의 삶을 사람답게 살아가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네 번째로 ‘강건하라’입니다. 이것은 ‘강해라’ 하는 능동태형 명령형이 아니고 수동태 명령형입니다. 따라서 너의 의지를 키우고 운동을 많이 해서 체력적으로 강하게 되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을 떠나지 말고 하나님에 의해서, 강하게 되라는 것입니다. 종이 한 장은 연약하지만, 그 종이를 벽에 붙이면 정말로 뗄 수 없이 강하게 됩니다. 그런 뜻과 같은 셈입니다. 그것을 잊지 않을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늘 강하게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다섯 번째는 14절에 나옵니다.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사랑으로 하면 결국 생명의 열매가 맺혀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으면 모든 말이 흉기가 될 수 있죠. 그래서 사랑으로 행하라는 것입니다. 고린도교회의 분열과 다툼이 있고, 영적 은사의 우월주의에 도취돼 있어서, 사랑으로 품다보면 바른 생명의 열매가 맺혀진다는 것입니다.
이제 15-20절은 문안이 나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세우고 그분들과 신앙생활을 하고 친분을 나눴겠죠. 물론 바울이 에베소에 있을 때에도 그들과 넓은 교분을 나눴겠죠. 다만 그들의 직업이 무엇이고 나이가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왜 그들의 이름을 기록하고 있는지, 그 단서가 나옵니다.
15절에 “형제들아 스데바나의 집은 곧 아가야의 첫 열매요 또 성도 섬기기로 작정한 줄을 너희가 아는지라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아가야의 수도가 고린도인데 그곳에서 처음 예수님을 믿고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이 스데바나였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스데바나’가 바울을 잘 섬겼기 때문에 그를 언급한 것일까요? 한국교회에는 그럴 수 있죠. 하지만 바울은 ‘성도를 섬기기로 결단했기’ 때문에 쓴 것입니다. 그렇기에 성숙한 성도란, 존경받는 성도란 누구겠습니까? 내 곁에 있는 성도를 섬기는 자입니다. 성도를 향해 섬김을 베풀 때 그가 존경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17절에 “내가 스데바나와 브드나도와 아가이고가 온 것을 기뻐하노니 그들이 너희의 부족한 것을 채웠음이라” 여기에 나오는 세 사람은 성도들의 부족함을 채웠기 때문에 언급된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채운 게 물질인지 영적인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남이 할 수 없는 부족함을 채운 사람들입니다.
18절, “그들이 나와 너희 마음을 시원하게 하였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이런 사람들을 알아 주라.” 여기에서 ‘마음을 시원케 했다’ 할 때 ‘마음’은 ‘퓨뉴마’(πνεῦμα) 곧 ‘영’입니다. 그 사람을 만나면 마음과 영이 평안하고 시원해지는 걸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그들의 이름을 기록한 것입니다.
19절에 “아시아의 교회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그 집에 있는 교회가 주 안에서 너희에게 간절히 문안하고.” 이것은 보내는 쪽에서 고린도교회에 문안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에베소에서 이 편지를 쓰는데, 아시아에 흩어진 교인들 중에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의 이름을 밝힙니다. 왜죠? 그들은 우리가 아는 대로 텐트 짜는 기술자였고, 선교사역을 한 사람들입니다. 자기 생존을 위해 직업을 가진 게 아니라 그 직업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 사람들입니다. 내가 어떤 직업을 갖고 있든지 간에 그 직업으로 주님의 영광을 드러낸다면 그 모두가 성직자라는 사실이죠.
2천 년 전 광활한 로마제국 내에 부자가 많았고, 권세가와 정치가들이 넘쳐났겠죠? 하지만 그들의 이름은 성경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 오직 성도를 섬기는 자, 남의 부족을 채워주는 자, 남의 마음과 영혼을 시원케 하는 자, 자기 직업을 성직으로 승화시키는 이들은 성경에 기록되었습니다. 머잖아 하나님께서 그런 자들을 저 천국에서 그와 똑같은 방법으로 기억해주지 않으시겠습니까?
20절 “모든 형제도 너희에게 문안하니 너희는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2천 년 전에 그렇게 입맞춤하면서 인사했다면 지금도 그렇게 해야 할까요? 그 당시에 귀족들은 자기네들끼리 입맞춤하고, 예배당에 들어온 노예들은 거들떠보지 않던 시대였죠. 바울은 그래서 예배당 안에 들어온 노예든 귀족이든 상관없이 똑같은 지체로 똑같은 형태로 인사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요즘 시대에 대입한다면 내가 교회에서 누구를 보든지 악수하면서 인사하는 정신을 이어가라는 뜻이겠죠.
21절 “나 바울은 친필로 너희에게 문안하노니.” 이 당시의 사람들은 젊은이들로 하여금 대필하게 했습니다. 마지막에 옳게 쓰였는지 확인하고 자기서명을 했습니다. 이제까지 쓴 것은 ‘내가 쓴 것이다’한 것입니다. 바울이 지금 그런 것입니다.
22절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가 있다고 해서, 바울이 저주받으라고 했겠습니까? 그렇지 않겠죠. 이것은 사무엘상 2장 30절 하반절 말씀처럼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하는 말씀의 뜻이죠.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는 거짓과 불의의 씨를 뿌릴 수밖에 없으니 하나님께서 경멸하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주여 오시옵소서”하는데 이것이 ‘마라나 타’(μαράνα θά)입니다. 이 땅이 좋다고 하는 자, 뿌린 게 없는 자는 ‘늦게 오시옵소서’하겠죠. 대신 진리 안에서 뿌린 자가 많은 이들은 ‘어서 오시옵소서’하는 것이죠. 그 바탕이 바로 부활신앙입니다. ‘마라나타’의 신앙은 부활신앙에 기초한 것입니다.
마지막 23-24절은 축도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와 함께 하고 나의 사랑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무리와 함께 할지어다.” 24절에서 ‘할지어다’로 끝났지만 헬라어는 ‘크리스토 이에수스’(Χριστῷ Ἰησοῦ) 곧 ‘그리스도 예수’로 끝납니다. 1장 1절에서 바울의 이름이 제일 먼저 등장했지만 24장 마지막절은 ‘예수 그리스도’로 끝맺는 것이죠. 본래 사울이란 이름은 ‘큰 자’였는데, 예수그리스도를 만나고 난 뒤에 ‘바울’ 곧 ‘작은 자’로 바뀌었습니다. 그만큼 바울은 자기 전 인생이 예수님에게 집중돼 있음을 알린 것이 고린도전서입니다. 왜냐하면 그 분을 통해 구원받고 그 분안에서 부활할 것을 내다보며 복음을 뿌리며 살아왔기 때문이죠. 그래서 바울은 ‘마라나타’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고백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기에 바울로 시작해서 예수로 끝나는 이 내용이야 말로 내가 벌레처럼 미미해도, 내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생을 살아가면 그 분께서 나를 통해서도 빛을 발하게 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위대해서가 아니라 그분께서 나를 도구 삼을 때 가능하게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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