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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우리는 고린도전서 1장에서 15장까지 읽어왔습니다. 15장까지 크게 세 부분으로 분류했었죠. 1장1-9절까지는 고린도교회 교인에 대한 감사와 안부, 1장 10절-6장까지는 고린도교회의 대립과 파당 곧 도덕적 해이와 무질서에 대한 바울의 질책과 권면이 담겨 있었습니다. 이제 7장-15장까지는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가지고 있던 신앙의 문제에 대한 질문과 바울의 목회적 답변이었습니다.
오늘 고린도전서 16장은 그야말로 고린도전서의 종결부 곧 최종부분입니다. 1절-4절은 연보에 대한 바울의 언급입니다. “성도를 위하는 연보에 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것 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 헬라말로 ‘연보’는 ‘로게이아’(λογεία)인데 전체 성경에서 이 부분이 유일합니다. 그만큼 특수한 단어죠. 그래서 2-3절에 “매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수입에 따라 모아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 내가 이를 때에 너희가 인정한 사람에게 편지를 주어 너희의 은혜를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가게 하리니.” 당시 예루살렘에 혹독한 재난이 임했는데,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예루살렘교회 교인들을 구제하기 위해 구제헌금을 한 것입니다. 그것을 연보로 표기한 것이죠. 그런데 바울은 1절에서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한 것 같이 하라”고 권면합니다. 물론 갈라디아서 어디에도 예루살렘교회 교인들을 향해 구제했다는 게 기록돼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갈라디아에 직접 갔을 때 그 교회 교인들에게 말로 구제하라고 했던 그 일을 떠올린 것임을 알 수 있죠.
그런데 그 구제 연보를 어떻게 하라고 합니까? “매주 첫날에” 곧 안식 후 첫날이죠. 요즘으로 치면 주일입니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들이 안식일 날 모였을 때 복음을 전하기 위해 회당을 찾았는데, 시간이 흘러서는 주일에 모여서 함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래서 “너희 각 사람이 수입에 따라 모아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 수입에 따라서 하라, 절대적인 규정을 둔 것은 아닙니다. 매 주일마다 따로 떼어서 하려고 하지, 한꺼번에 하려고는 하지 말라는 것이죠. 구제헌금 자체에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함인 것입니다.
3절, “내가 이를 때에”, 곧 고린도에 갈 때를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를 때에 너희가 인정한 사람에게 편지를 주어 너희의 은혜를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가게 하리니.” 너희들이 모은 헌금을 나한테 주라고 하는 게 아니라, 너희들이 인정하는 사람을 통해 가지고 갈 수 있도록 결정하라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입니까? 만약 바울이 직접 돈을 들고 가면 투명하지 않다고 오해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죠. 그만큼 교회 제정을 맡은 사람은 투명해야 함을 일깨워주는 것이죠. 그런데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예루살렘교회 교인들을 구제하기 위해 모은 돈을 사도 바울은 ‘너희의 은혜’라고 불렀습니다. 우리가 은혜를 끼치며 살아야 하는데, 누군가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주고 일깨워 주는 것도 은혜입니다. 더욱이 물질을 나누는 것도 은혜를 끼치는 일이라는 것이죠. 예수님께서도 누가복음 6장 38절을 통해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그 말씀은 당대의 부자가 아닌 갈릴리 빈민들에게 하셨죠. 많이 누리는 자만 구제하라는 게 아니라 없으면 없는 대로 그것을 나누며 살라는 당부였습니다.
4절에 “만일 나도 가는 것이 합당하면 그들이 나와 함께 가리라.” 내가 고린도에 가서, 로마나 스페인이 아닌 예루살렘으로 간다면, 너희들이 인정한 그 헌금의 전달자도 나와 함께 갈 수 있다는 거죠. 그래서 적지 않는 분들이 고린도전서 16장 1-4절을 근거로, 더 이상 헌금을 헌금으로 부르지 말고 연보로 불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헌금은 더 이상 필요치 않다고 말이죠. 하지만 그것은 이 구절을 확대해석한 경우입니다. 이것은 예루살렘교회의 재난을 당한 이재민을 위한 연보의 차원입니다. 분명한 것은 이것이 특별한 상황 속에서 행한 구제의 연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본문의 중요성은 다른 데 있습니다. 1절의 ‘성도의 연보에 관하여서는’ 이 중요합니다. 이것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그 연보를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하는 이야기죠. 바울이 쭉 이야기를 하다가 마지막 부분에 와서 구제헌금에 관한 부분을 이야기한 꼴입니다. 왜요? 믿음이 있는 성도들은 내게 주어진 물질은 모두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고 그 속에는 나 자신만을 위한 게 아니라 반드시 타인을 위한 몫도 포함돼 있다는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구제헌금을 하죠. 하지만 성숙하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은 그렇지 못하는 것이죠. 그런 점들을 마지막 부분에 써 내려간 거죠.
본문 5-9절은 사도 바울이 마게도냐로 갈 계획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내가 마게도냐를 지날 터이니 마게도냐를 지난 후에 너희에게 가서” 바울이 지금 에베소에 있는데, 마게도냐란 로마의 행정 구역상 마게도냐죠. 그곳을 거쳐 고린도에 있는 너희들에게 가겠다는 것입니다.
6절에 “혹 너희와 함께 머물며 겨울을 지낼 듯도 하니 이는 너희가 나를 내가 갈 곳으로 보내어 주게 하려 함이라.” 바울이 지금 가면 ‘겨울을 지낼 듯도 한다’ 말합니다. 지중해 바다는 겨울이 되면 파도가 심해서 배를 못 띄우고, 그리스 반도 북쪽은 날씨가 추워서 움직이는 것도 상당히 어렵죠. 그런데 “너희가 나의 갈 곳으로 보내어 줄 수 있기 때문이다.”하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지금 에베소에서 로마를 거쳐 고린도로 갈 수도 있고, 스페인으로 갈 수도 있고, 또 예루살렘으로 되돌아 갈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확정된 곳이 없는데, 초대교회는 복음 전도자들이 머무는 것은 물론이고 그 다음 복음 전도지까지 갈 생필품을 모두 챙겨 주었듯이, 너희들이 그렇게 나의 필요를 준비해줄 수 있을 것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바울은 고린도전서 1-15장까지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얼마나 잘 못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그들을 향한 신뢰의 끈을 놓지 않고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어떤 상황 속에서 상대가 잘못을 하더라도, 신뢰의 끈을 놓지 않는 게 중요합니다. 인간 자체에 대한 신뢰의 끈을 놓지 않을 때, 내가 더 깊어질 수 있기 때문이죠. 물론 상대방이 나의 호의만 이용하려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도 그를 향한 신뢰와 이해의 끈을 놓치 않는 게 중요하다는 것을 요즘은 더 깊이 깨닫고 있습니다. 영적으로 병든 영혼은 그저 품는 게 상책이기 때문이죠.
7절에 “이제는 지나는 길에 너희 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만일 주께서 허락하시면 얼마 동안 너희와 함께 머물기를 바람이라.” 바울은 주님의 허락 속에서 주후 57년부터 58년 겨울 사이에 약 3개월을 고린도에 머물렀습니다. 그곳에서 복음의 진수인 로마서를 쓰게 하신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래서 8절, “내가 오순절까지 에베소에 머물려 함은.” 지금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서 이 편지를 쓰는 계절이 언제인지, 몇 월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합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내가 고린도에 가기 전 오순절까지는 반드시 에베소에 머물려 한다는 것이죠. 그 이유는 9절에 “내게 광대하고 유효한 문이 열렸으나 대적하는 자가 많음이라” 오순절 때 유대인들이 모이면 전도의 문을 많이 얻겠지만 또 대적자들도 그만큼 많다는 것이죠. 그런데 바울은 그 대적들을 뚫고 나가는 길을 택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일임을 해석하고 나아갔던 것입니다.
10-12절까지는 디모데를 보내면서 “너희는 조심하여 저로 두려움이 없이 너희 가운데 있게 하라”고 권면합니다. ‘두려움이 없다’는 말은 거리낌이 없이 일하도록 배려하라는 것입니다. 교인들이 목회자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목회자가 주님의 일을 거리낌 없이 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목회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10절 하반절처럼 ‘주의 일을 힘쓰는 자’가 되어야 하죠.
그리고 12절에서 “형제 아볼로에 대하여는 그에게 형제들과 함께 너희에게 가라고 내가 많이 권하였으되 지금은 갈 뜻이 전혀 없으나 기회가 있으면 가리라.”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질문한 가운데에 아볼로에 관한 사항도 있었는데, 아볼로는 지금 고린도교회에 가지 않겠다는 것이죠. 왜죠? 파당 싸움만 더 나기 때문이죠. 그래서 ‘기회가 되면’, 그 파벌싸움이 멎고, 예수 안에서 하나가 되면 그때 가겠다는 것이죠. 아볼로 역시도 무엇을 하든 주님의 영광을 위해 행하는 자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무쪼록 저와 여러분들도 주님이 주신 분깃 중에 구제하며 사는 것, 그것이 은혜의 삶이라는 사실이죠. 아울러 목회자가 거리낌 없이 주님의 일에 힘쓸 수 있도록 배려하고, 누군가 영적으로 연약한 자가 있다면 주님이 주신 기간 동안 품고 돌보는 자로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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