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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고린도전서 11장-14장을 통해 공적예배에 대한 목회적 답변을 제시해 주었습니다. 11장에서 여자들의 예배포 문제와 성찬식에 대해서, 12장-14장은 성령의 은사에 대한 다양성과 통일성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었죠. 그러면서 13장에서는 모든 은사에 앞서는 사랑에 대해, 14장은 방언에 대해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14장 1-19절은 방언이 개인적으로 유익하지만 아무도 알지 못하는 일만 마디 방언은 대립과 분열을 낳기에, 모두가 깨닫는 다섯마디 말이 권면과 위로와 덕이 된다고 했죠.
그 연장선상에서 20절이 시작됩니다.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 아이가 되라 지혜에는 장성한 사람이 되라.” ‘지혜에 아이가 되지 말라’는 말은 지혜로워야 할 때 어리석지 말고, 악에는 순진무구한 어린아이가 되라는 뜻입니다. 이른바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로 자기 자신을 과시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한 어린 아이와 같다는 뜻이죠. 그런데 여기에 ‘지혜’로 기록된 헬라어 ‘프레엔’(φρήν)은 ‘생각하는 것’, ‘깨닫는 것’, ‘마음가짐을 성숙하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어른과 어린 아이의 차이는 바로 생각과 깨달음, 그 마음가짐의 차이죠.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21절에 “율법에 기록된 바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방언을 말하는 자와 다른 입술로 이 백성에게 말할지라도 그들이 여전히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여기에 밝힌 ‘율법’이란 구약성경입니다. 바울은 21절에서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이스라엘과 다른 말을 쓰는 이들이 지배할 것이라고 했는데, 앗수르 제국이 그랬죠. 그들이 이스라엘을 지배할 때 말이 통하지 않았는데, 지금 고린도교회가 그렇게 서로 소통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22절에 “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아니하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이니라.” 방언은 믿지 않는 자들 곧 불신자들을 위한 표적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바울의 역설이죠.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한 것이지만, 아무리 백 번 방언을 한다 해도 믿지 않는 자들을 믿는 자로 옮겨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언 곧 말씀을 맡아 해석하는 것은 믿지 않는 자들이 아니라 믿는 자들을 주님께 돌아오게 한다는 것이죠. 그래서 23절에서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알지 못하는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 공적인 예배 때 너희들이 방언으로 말하면 믿지 않는 자들이 ‘미쳤다’고 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미쳤다’는 말이 본래 ‘발광한다’ 또는 ‘헛소리한다’는 뜻입니다. 모두가 방언으로 하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렇게 여기지 않겠냐는 것이죠.
그래서 24절에 “그러나 다 예언을 하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나 알지 못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모든 사람에게 책망을 들으며 모든 사람에게 판단을 받고.” ‘다 예언을 한다’ 곧 말씀을 바르게 깨달아 전하면 믿지 않는 자들이 교회에 와서 하나님의 책망 속에서 변화되지 않겠느냐는 것이죠. 또 ‘판단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 심령에 떨어져서 옳은지 그른지를 분별한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이해하지도 못하는 방언보다 훨씬 낫다는 뜻이죠.
그래서 25절에 “그 마음의 숨은 일들이 드러나게 되므로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신다 전파하리라.” 하나님의 말씀이 심령에 임하면 자기 마음속의 비밀도 고백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방언보다 예언 곧 말씀을 맡은 자의 말씀이 그 심령에 역사하면 진심으로 하나님께 엎드려 경배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26절,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까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여기에서 ‘모일 때’란 초대교회의 예배모임을 말하는 것이죠. 그때 ‘찬송시’ 곧 곡조 없는 시편을 노래했고, ‘가르치는 말씀’ 사도 바울로부터 배운 교리도 있었고, ‘계시’ 곧 하나님께로부터 내려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도 있었고, 그리고 ‘방언’과 ‘통역’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들은 예배모임 때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죠.
어떻게요? 27절에 “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많아야 세 사람이 차례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 그 모든 것들을 동시에 하지 말고 차례대로 하라는 것이죠. 그리고 통역에 은사가 있는 사람이 통역을 하라는 것입니다. 28절에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 통역해주는 자가 없으면 공적 예배때는 공개적인 방언을 하지 말고, ‘자기와 하나님께 말하라’ 곧 골방에 들어가 하나님 앞에 그가 방언으로 기도하라는 뜻이죠. 그래서 29절에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별할 것이요.” 누가 예언을 하면 둘이나 셋이 돌아가며 예언을 하되, 그 예언이 맞는지 맞지 않는지 분별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30절에 “만일 곁에 앉아 있는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있으면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할지니라.” 이 말씀을 오늘날에도 그대로 적용하려는 교회와 선교단체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때는 말씀이 없는 시대라 예언이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기록된 말씀으로 분별하면 됩니다. 그래서 31절에 “너희는 다 모든 사람으로 배우게 하고 모든 사람으로 권면을 받게 하기 위하여 하나씩 하나씩 예언할 수 있느니라.” 너희들도 한 사람 한 사람이 말씀을 해석하고 가르치는 자가 되라는 뜻입니다. 그때 비로소 그 말씀이 자신을 향한 말씀이 되기 때문이죠.
32절입니다. “예언하는 자들의 영은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나니.” 말씀을 가르치는 자들의 영은 말씀을 가르치는 자들의 제재를 받는다, 이것은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칠 때 말씀이신 주님의 말씀에 내가 제재를 받는다는 뜻입니다. 자기 절제력, 자기 통제력을 얻는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33절에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모든 성도가 교회에서 함과 같이”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분의 말씀에 통제력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34-35절입니다.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그들에게는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 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라” 고린도교회에 성령의 은사를 자랑하는 자들 가운데 여자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 교회 안에 말싸움을 많이 했다는 것이죠. 그런 여자들은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것이죠. 그런 여자들이 교회 안에서 다툰다면 믿지 않는 자들이 나오고 싶어 하겠느냐는 것이죠. 그런 교회에는 덕보다도 부끄러움만 남게 된다는 뜻입니다.
36절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로부터 난 것이냐 또는 너희에게만 임한 것이냐”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자기들에게만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다고 여겼다는 것입니다. 그릇된 자기 독점력이죠. 우리가 자기 통제력을 잃지 않는 것은 그릇된 자기 독점력을 내려놓을 때 가능합니다.
그래서 37절에 “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혹은 신령한 자로 생각하거든 내가 너희에게 편지하는 이 글이 주의 명령인 줄 알라” 너희들이 진짜 신령하다고 생각한다면, 내가 너희에게 전한 주님의 복음을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 내가 너희에게 권하는 이 편지도 주님의 명령이지 않겠느냐는 뜻입니다. 그만큼 그릇된 자기 독점력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이죠. 그래서 38절에 “만일 누구든지 알지 못하면 그는 알지 못한 자니라.” 원문을 직역하면 “내가 지금 너희에게 이야기하는 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지 않는 자는 그 역시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 뜻입니다.
결론적으로 39절에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 예언하기를 사모하라 곧 말씀의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물론 방언도 개인적인 유익을 위해 하라고 하죠. 다만 40절에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 믿는 사람이든 믿지 않는 사람이든지 간에, 그들이 보기에 품위 있고 질서 있게 하라는 것입니다. 너희들의 심령이 진리로 정렬된 상태에서 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는 게 무엇입니까? 공적예배때 무질서한 방언보다도 품위와 질서를 좇는 말씀이 낫다는 거죠. 진리에 장성한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자기 통제력을 지니는 사람 말이죠. 그 사람의 예배가 살아 있는 예배요, 그 사람이 교회의 덕을 세우는 사람이요, 그런 사람이 모인 교회가 세상을 밝히는 진리의 등불이 된다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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