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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묵상DewSermon/고린도전서

내게 보이셨느니라(고전15:3-11)

by 똑똑이채널 2024. 1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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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5장은 부활에 대한 사도 바울의 답변이라고 했습니다. 물론 이전과 달리, 어떤 질문도 하지 않았음에도 바울이 부활의 내용을 편지로 썼다고 했죠. 이는 고린도교회 성도들 중에 부활신앙이 없는 사람들이 있었고, 부활의 참신앙을 모른채 교회내에 잡다한 것들로 다투고 있었기 때문에 바르게 세워주고자 함이었다고 했습니다.

 

본문 3절에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여기에서 ‘내가 받았다’는 것은 바울이 복음을 받아들였다는 것이고, 또 ‘전했다는 거’ 역시 복음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복음의 시발점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복음을 받게 되면 ‘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복음이 살아 있기 때문이죠. 그렇다면 복음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것이죠. 그것은 당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 나의 죄 때문에 죽으신 것입니다. 다만 임의대로 죽은 게 아니라 ‘성경대로’ 죽으셨다는 것이죠. 헬라어 ‘그라파스’(γραφάς)는 복수입니다. ‘성경들대로’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실 것에 대해서는 여러 성경에 기록돼 있다는 뜻입니다.

4절에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주님은 죽으셨지만, 그 죽음을 깨트리고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사흘만에’라는 표현을 쓴 이유가 뭘까요? 가사상태가 아닌 확실하게 죽으셨음을 밝히기 위함이죠. 예수님은 시체 가운데서 살아나신 분임을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나의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마지막날 육체까지 영화로운 몸으로 부활할 수 있도록, 새로운 생명의 길을 열어주셨다는 것이죠. 그게 복음의 핵심입니다.

 

5절,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게바란 베드로의 히브리식 이름이죠. 예수님은 맨 먼저 여자들에게 보여주셨죠. 그런데 바울은 여자를 거론하지 않고 ‘게바’를 먼저 언급합니다. 왜죠? 이름없는 여자들에게가 보이셨다는 것보다 지금 부활을 믿지 않는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영향력 있는 베드로를 언급한 것입니다. 그리고 열두 제자를 말하죠. 그렇다면 베드로와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는 증거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그들의 달라진 삶의 태도에 있죠. 그 전까지는 숨어 지내던 그들이었는데,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그들은 죽음을 당하면서까지 복음을 전했습니다. 진짜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그들의 삶입니다.

6절,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여기에 나오는 ‘오백여 형제’가 구체적으로 누구인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게바와 같은 한 개인이나 혹은 제자들 소그룹뿐만 아니라 일시에 ‘오백명’이나 되는 큰 무리에게 당신의 부활을 보여주셨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이 편지를 바울이 에베소에서 쓸 때도 그들 중에 절대다수의 사람들은 살아 있었다는 점이죠.

우리는 2천 년 전 그들이 누구인지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후서를 쓴 직후에 네로 황제의 박해가 곧바로 시작되었고, 그로 인해 그들 중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화형을 당하고, 참수형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왜죠? 부활하신 주님 안에서 부활을 바라봤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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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절,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야고보’는 열두 제자에 속하는 야고보가 아니라 ‘예수님의 동생’을 말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3장 55-56절에 나오는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그들이죠. 마리아가 예수님을 낳을 때에는 동정녀의 상태에서 성령으로 잉태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동생들은 요셉의 정분을 통해 태어났죠. 가톨릭에서는 마리아가 예수님을 낳고서도 동침을 하지 않았다고 보면서, 예수님의 동생들을 친동생이 아닌 사촌으로 보죠. 우리 개신교는 그렇게 보지 않고 친동생들로 보죠. 중요한 사실은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된 신령한 분이시고, 동생들은 육적인 사람들이란 사실이죠. 그런데도 예수님은 사랑하는 동생 야고보를 찾아가 당신의 부활하심을 보여주셨습니다. 본래 그 동생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않았고, 똘마니들을 데리고 왕노릇하는 정신병자로 여길 정도였죠. 그런데 그 동생들 중 야고보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고, 초대예루살렘교회의 의장 역할을 맡게 되었습니다. 왜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에게 나타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여기에서 모든 사도란 이미 5절에 나와 있는 ‘열두 제자’와는 다른 이들입니다. 누구일까요? 예수님과 3년 동안 동거했던 제자들이 아니라, 복음에 빚진 자로서 복음을 전하는 모든 사람들을 일컫는 말씀입니다.

8절,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맨 나중이란’ 시간적으로 ‘맨 나중’을 말하기도 하고, 또 가장 보잘 것 없는 자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왜 바울은 자기를 만삭되지 못한 자로 표현합니까? 다른 제자들은 예수님과 3년 동안이나 같이 살았죠. 그러나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느닷없이 부활하신 주님께 사로잡혔죠. 그것을 ‘만삭되지 못한 자’라 표현한 것입니다.

9절,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던 이유는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옥에 쳐 넣기 위함이었죠. 그런 그를 부활하신 주님께서 건져주셨기 때문에, 감히 자신은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부족하다고 겸손하게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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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부활하신 주님께서 왜 이렇게 여러 사람들에게 나타나 주셨다고 밝힌 것입니까? 게바에게 12제자에게 이름을 알지 못하는 500여 형제들에게 예수님의 혈육 야고보에게 심지어 복음을 핍박하던 자기 자신에게까지 말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특정 그룹만을 위해 부활하신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위한 부활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함입니다.

10절,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그가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던 때는 과거형이고, ‘나의 나 된 것’은 현재형입니다. 과거의 관점으로 현재의 자신을 조명할 때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죠. 이것은 사도 바울만의 고백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신앙고백이기도 하죠. 다만 사도 바울과 우리의 차이가 있다면 뭘까요? 바울은 늘 그 고백을 새기면서 살고 있지만 우리는 종종 잊고 지낼 때가 있다는 거죠.

그런데 ‘은혜’란 단어가 두 번이나 나왔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은혜가 헛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헛되다’는 말은 ‘케네’(κενὴ)인데 하나님의 은혜의 본질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본래 헛된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은혜를 아는 자는 수고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죠. 왜요? 나의 나 된 것은 그 분의 은혜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 분을 위해 내 생을 바치지 않을 도리가 없는 것 말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나의 수고가 크다 한들 주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11절입니다. 부활장을 다루는 고린도전서 15장의 첫 결론입니다. “그러므로 나나 그들이나 이같이 전파하매 너희도 이같이 믿었느니라.” 나나 그들이나, 곧 바울이나 다른 사도들이나 500여 형제들이나 예수님의 혈육 야고보나, 그리고 부활에 빚진 모든 자들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복음을 전파하지 않았냐는 것이죠. 그리고 너희들도 그 복음 때문에 주님을 믿고 있는 것 아니냐는 말이죠. 중요한 것은 헬라어 원문에 ‘전파했다’는 ‘케루소’(κηρύσσω)는 현재형이란 사실입니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예수께서 부활하신 복음은 항상 현재형으로 남아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은 아무리 세월이 흐르고 시간이 지나도 늘 현재형으로 역사하시는 복음의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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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이와 같은 말씀을 통해 성령님께서 무엇을 깨닫게 하십니까?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은 언제나 현재형이란 사실입니다. 그만큼 우리의 믿음도 늘 현재형이 돼야 한다는 것이죠. 과거의 어느 한 시점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것으로 끝낼 게 아니라 지금도 앞으로도 그 분은 내 삶에 언제나 현재형으로 부활의 역사를 베풀어주신다는 것 말입니다. 그것이 살아 있는 신앙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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