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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장1-9절은 도입부로서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문안인사와 하나님의 감사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었죠. 1장 10절-6장까지는 고린도교회의 분열과 다툼에 대한 사도 바울의 훈계와 책망과 권면이 담겨 있었죠. 7장-15장까지는 고린도교회 교인들의 신앙적인 문제에 대한 바울의 답변이 담겨 있었는데, 7장에서는 결혼에 대한 부분, 8장과 9장과 10장은 우상의 음식에 관한 부분, 11장-15장까지는 공적예배와 관련된 부분으로 11장에는 예배시간의 예배포 부분과 성찬식의 본질에 관한 부분, 그리고 12장-14장까지는 은사의 사용에 대한 목회적인 답변을 밝혀주었습니다.
사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가장 큰 다툼은 각자 받은 은사를 가장 큰 것으로 여기며 다투는 것, 그 중에서도 방언이었죠. 문제는 그 방언을 공적 예배시간에 서슴지 않았다는 것이죠. 거기에 온전한 예배가 드려질 수 없었죠.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은사의 다양성과 통일성에 대해서, 13장에서 모든 은사에 우선하는 사랑에 대해서, 오늘 14장에서 방언에 대해 다시금 짚어주죠.
우선 14장 1-5절까지는 방언에 대한 예언의 상대적인 유익한 점을 말해줍니다. 1절에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그리스도인들은 세속적인 것이 아니라 신령한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이죠. 우리의 언행도 마찬가지죠. 하지만 대 전제 곧 사랑을 좇아 신령한 것을 사모하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독선적이 되기가 쉽기 때문이죠. 그래서 사랑을 좇아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그 중에서도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 권합니다. 앞에서 말씀드렸지만 예언이란 점쟁이를 말하는 게 아니죠. 하나님의 말씀으로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통찰하라는 거죠.
이유가 무엇일까요? 2절에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 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 왜 말씀의 사람이 돼야 하나면 방언과 관련돼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방언이 하나님께 하는 것인데 방언만 하면 자신도 모르기 때문이라는 거죠.
그러나 3절에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위로하는 것이요.” 예언 곧 ‘말씀을 맡은 자’는 사람에게 하는 자로서 궁극적으로 덕과 권면과 위로를 전하는 자라는 뜻이죠. 여기에서 ‘덕을 세운다’는 말은 ‘오이코도메’(οἰκοδομή)로서 집을 세운다는 뜻입니다. 의미를 부여하자면 인생의 집을 세우는 것이죠. 말씀이 없어서 욕망만 좇던 사람이 말씀으로 빛을 좇아가니, 그것 자체가 덕과 권면과 위로가 된다는 것입니다.
4절에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방언에 덕이 전혀 없다고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방언에도 덕이 있는데, 갑자기 이해할 수 없는 방언을 하면 성령님께서 내 속에 들어와 계심을 알게 되죠. 그것이 개인적인 덕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개인적으로 끝나는 것이기 때문에 예언하는 자 곧 말씀을 맡은 자는 신앙공동체의 덕을 세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5절에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만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통역하여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 방언도 좋지만 특별히 예언하라고 곧 말씀을 맡은 자로서 잘 전달하여 교회공동체에 덕과 권면과 유익을 끼쳤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만약 예배시간에서 방언을 한다면 어찌 교회에 덕을 끼칠 수 있겠느냐는 것이죠.
그래서 6절에 “그런즉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방언으로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으로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바울이 만약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 곧 말씀으로 복음을 전하지 않고 알아듣지 못한 방언으로 했다면 너희들이 어찌 복음을 받아들이고 주님이 제자가 될 수 있었겠냐는 뜻이죠.
7절에 “혹 피리나 거문고와 같이 생명 없는 것이 소리를 낼 때에 그 음의 분별을 나타내지 아니하면 피리 부는 것인지 거문고 타는 것인지 어찌 알게 되리요.” 관악기는 관악기로서, 현악기는 현악기로서 고유의 소리가 있는데, 피리소리를 내야 하는데 거문고소리를 낸다면 알아듣겠냐는 것이죠.
또 8절에 “만일 나팔이 분명하지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투를 준비하리요.” 2천 년 전 나팔은 악기용이 아니라 전쟁용이었는데, 전쟁을 대비해서 불어야 할 나팔을 일상용으로 불어대면 어찌 전쟁을 준비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죠. 영적 전투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9절에 “이와 같이 너희도 혀로써 알아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그 말하는 것을 어찌 알리요 이는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라.” 피리나 거문고가 정확한 소리를 내지 못한다면, 너희들이 바른 소리를 내지 못한다면 허공에다 말하는 게 아니겠냐는 뜻이죠. ‘허공’이란 ‘쓸데없는 것’, 곧 시간 낭비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10절에 “이같이 세상에 소리의 종류가 많으나 뜻 없는 소리는 없나니.” 세상의 소리가 똑같은 것 같지만 저마다 다르다는 것입니다. 아이가 우는 소리도, 배고플 때나 설사할 때도 다 다르듯이 말이죠. 그래서 11절에 “그러므로 내가 그 소리의 뜻을 알지 못하면 내가 말하는 자에게 외국인이 되고 말하는 자도 내게 외국인이 되리니.” 만약 너희들이 영적으로 굉장히 높은 방언을 한다 할지라도, 남이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만 한다면 너희들과 관계 맺은 동료를 외국인 취급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12-17절은 방언의 제한성에 관한 말씀입니다. 12절에 “그러므로 너희도 영적인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그것이 풍성하기를 구하라.” 영적인 것을 사모하되,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 풍성하도록 구하라는 것이죠. 그래서 13절에서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지니.” 그만큼 통역이 필요하다면 굳이 공개적인 장소에서는 하지 말라는 것이죠.
왜냐하면 14절에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내가 방언으로 하는 것은 분명 영적인 것이긴 하지만 그렇게 기도해도 마음이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마음’은 헬라어로 ‘이성’을 뜻하는 말인데, 방언으로 기도하면 이성이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왜요? 내가 아무리 방언으로 기도해도 이성이 알지 못하기에 인격적인 삶의 변화가 있겠느냐는 것이죠.
15절에 “그러면 어떻게 할까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송하고 또 마음으로 찬송하리라.” 기도할 때 영과 이성이 함께 묻어나는 기도를 하라는 것입니다. 왜죠? 이성이 깨어서 하는 기도라야 삶에 변화를 수반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진정으로 영적인 기도라는 것이죠. 마치 내가 부르는 찬양의 가사가 무엇인지 음미하지 못한 채 감정만 좇는 찬양이라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는 것이죠. 기도와 찬양에 이성을 수반해야 할 이유가 그것이죠.
그래서 16절에 “그렇지 아니하면 네가 영으로 축복할 때에 알지 못하는 처지에 있는 자가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네 감사에 어찌 아멘 하리요.” 공적인 기도를 하는데 대표자가 혼자 방언으로 한다면 어떻게 되겠느냐는 뜻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지 못하는데 어찌 ‘아멘’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17절에 “너는 감사를 잘하였으나 그러나 다른 사람은 덕 세움을 받지 못하리라.” 혼자서 대표기도 할 때 방언으로 하는 사람은 집에 가서 감사하면서 뿌듯할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하나도 덕이 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이제 18-19절은 예언의 유익성을 재강조하는 말씀입니다. 18절에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여태껏 바울이 방언을 경계하는 것 같지만 방언을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누구보다 더 잘 한다는 것이죠. 그런데도 굳이 이렇게 밝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누구보다 잘하지만 이것은 개인적으로 골방에서 해야 할 일이라는 걸 드러내는 것이죠. 그래서 19절에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남을 가르치기 위해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를 하는 것, 곧 예언,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의 다섯 마디가 일만 마디 방언보다 낫다는 거죠. 아무리 일만 마디 방언으로 기도해도 누구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대립과 분열만 낳지만, 깨달은 다섯 마디 말로 말씀을 나누면 권면이 되고 위로가 되고 덕이 된다는 것이죠. 때로 여러 말보다 ‘주님께서 당신을 사랑하세요’하는 그 한마디에 인생에 위로가 되고 인생이 바뀌는 경우가 있죠.
오늘 저와 여러분들은 영적 은사가 공동체의 유익한 열매로 나타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찬양이나 대표기도를 할 때 어떤 경우에도 나를 드러내기보다 하나님과 그곳에 참여한 사람들을 위한 도구가 돼야 하죠. 그리고 하나님의 다섯 마디 말씀이라도 제대로 깨닫고 전해주기 위해 이성을 사용하는 하나님의 도구가 되도록 기도하며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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