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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은사 중에 가장 좋은 은사는 ‘사랑의 은사’라고 했습니다. 비록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 몰라도, 예언하는 능력과 모든 비밀과 지식을 알고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없어도, 내 몸을 불사르게 구제한다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수많은 기적을 행하고, 병든 자를 고치고, 하늘의 신비로운 역사를 볼지라도, 사랑이 없다면 ‘you are nothing’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래서 1-3절까지 사랑의 필수성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오늘 읽은 4-7절까지는 ‘사랑의 특성’에 관한 말씀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여기에서 바울은 사랑을 두 갈래의 형식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소극적인 정의로서 ‘사랑은 –하는 것이 아니다’는 부정문입니다. 이를테면 ‘시기하지 않는다’, ‘자랑하지 않는다’는 등의 이야기 말입니다. 그러나 그 반대의 갈래도 있죠. 적극적인 정의 곧 긍정문입니다. ‘오래 참는다’, ‘온유한다’ 는 등의 이야기 말입니다.
먼저 소극적인 정의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는다’하는 말 중에서 ‘않는다’는 말을 빼고, 본래 말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시기하다’는 단어는 헬라말로 ‘젤로오’(ζηλόω)입니다. 사람과의 관계가 어그러지는 첫 단계가 바로 시기에서부터 비롯되는 것입니다. ‘시기’란 그릇된 경쟁의식에서 파생된 것입니다. 그래서 시기하면 반드시 우월의식에 사로잡히거나 월등의식에 사로잡히게 돼 있죠. 시기가 생기면 그것이 사람에 따라 달라지게 나타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우월의식으로, 또 다른 사람에게는 열등의식으로 말이죠. 그래서 다툴 수밖에 없는 현실이 생깁니다.
‘시기’ 다음에 나오는 게 뭡니까? ‘자랑’입니다. 시기 다음의 단계가 자랑으로 넘어가는 것이죠. ‘자랑하다’는 헬라어 ‘페르페류오마이’(περπερεύομαι)는 ‘과장하다’는 뜻입니다. 자랑이 무엇입니까? ‘과장하는 것’, ‘남으로부터 칭찬받기를 열망하는 것’이죠. 그 과장으로 자기 우월감을 더 크게 드러내거나, 아니면 열등감에 빠져버리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겸손과 반대되는 이 자랑의 단계에 들어가게 되면 결코 사람을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든지 자기를 돋보이게 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죠.
시기하고, 그 다음 자랑하면, 그 다음 단계 어디로 넘어갑니까? 그 다음에 나오는 게 ‘교만’입니다. ‘교만하다’는 헬라어 ‘프쉬오오’(φυσιόω)는 ‘풀무질을 한다’는 뜻입니다. 마구 부풀리는 걸 말하죠. 교만이란 실은 자기 자신을 부풀리는 걸 말합니다. 그래서 실제의 자기보다 더 높은 자리에 자기 자신을 올려놓게 되죠. 왜 그렇습니까? 자꾸 자기를 과장하다보니까, 높은 자리에 앉고는, 그것이 자기 자리라고 착각하게 되는 것이죠. 그때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하죠. 교만의 자리에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지배와 굴림의 대상으로 보기 때문이죠.
‘교만’의 다음 단계는 ‘무례’입니다. 무례는 헬라어 ‘아스케모네오’(ἀσχημονέω)는 상대에게 돌아가야 할 존경과 예의를 무시해 버리는 걸 말합니다. 바꿔 말해 ‘이치에 합당하게 대하지 않는 태도’입니다. 가령 상대방이 힘들게 수고했는데 그걸 인정하지 않는 태도죠. 왜 그렇습니까? 나는 지금 높은 자리에 앉아 있기 때문에 그렇죠. 저 사람이 저렇게 하는 것은 저 사람이 잘 나서가 아니라, 저 사람을 내가 뽑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실은 나 때문에 가능해졌다는 것이죠. 그만큼 그에게 돌아가야 할 명예와 존중의 몫을 인정치 않는 것이죠. 그것이 무례입니다.
‘무례’ 다음에 나오는 단계는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유익을 구하다’는 헬라어 말이 ‘타 헤우테스’(τὰ ἑαυτῆς)입니다. 이른바 ‘자기의 것’을 말하는 뜻입니다. 무례하면 반드시 남의 유익을 구하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의 것만 집요하게 구하게 된다는 것이죠. 남의 기분, 남의 마음 따위는 생각하지 않고 오직 자기 기분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 기분이 좋으면 상대의 마음이 아프든 실족하든 상관치 않는 것이죠. 반대로 내가 기분이 나쁘면 상대가 축하받는 자리에서 상대를 오히려 비난하는 모습을 보이게 되죠. 바로 그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무례’ 다음의 순서는 ‘성내다’입니다. ‘성내다’는 헬라어 ‘파록수노’(παροξύνω)는 ‘일상사에서 내는 화’입니다. 바로 ‘파록수노’에서 감정을 폭발하듯 발작하는 ‘패록시즘’(Paroxysm)이란 영어 단어가 파생이 되었습니다. 자기 뜻대로 안 되면 발작하는 상태죠. 여기에 ‘파록수노’는 ‘날카롭게 한다’는 뜻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화를 내는데 단순하게 내는 게 아니라 날카롭게 상대방의 존재를 부정하면서 화를 내는 걸 말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속이 시원치 않기 때문이죠. 우리가 살아가면서 화를 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도 성전 장사치들을 보고서 거룩한 분노, 정당한 분노를 냈죠. 우리도 그럴 수 있죠. 하지만 중요한 건 에베소서 4장 26절 말씀입니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는 것이죠. 분을 내다보면 그 분에 못 이겨 발악을 하고 타인의 자존심을 찌르는 흉기가 됩니다. 그런데 아침에 화를 냈다가 일을 마무리할 즈음, 또 집에 와서도 분을 풀지 못했다면 한 번도 주님을 바라보지 않았다는 뜻이 되죠. 그것이 분을 내서 사탄에게 틈을 주는 꼴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악한 것을 생각한다’인데, ‘생각한다’는 말은 ‘로기조마이’(λογίζομαι)입니다. ‘계산하다’, ‘심사숙고한다’는 뜻입니다. 악을 셈하듯이 심사숙고하는 것이죠. 왜 그렇게 계산하고 심사숙고할까요? 개인에게 이득이 되기 때문이죠.
그래서 다음 단계가 ‘불의를 기뻐하다’인데 ‘기뻐하다’의 헬라어 ‘카이로’(χαίρω는 어쩔 줄 몰라하면서 즐거워한다는 뜻입니다. 불의를 기뻐하면 기뻐할수록 내 사리사욕을 챙길 수 있기 때문이죠. 이 모든 소극적인 사랑의 시작이 ‘시기’에서 비롯된다는 걸 기억해야 합니다 .
이번에는 사랑의 적극적 정의입니다. 첫 번째로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이죠. 헬라어 ‘마크로튀메오’(μακροθυμέω)는 한 번 혹은 잠시 참는 게 아니라 오래도록 참는 걸 말합니다. 이것은 내가 저항할 수 없어서 체념하는 의미의 소극적인 인내에서부터, 내가 보복을 가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발적으로 포기하는 적극적인 인내에 이르기까지, 모든 인내를 포함하는 것입니다. 또 ‘온유’가 나옵니다. 헬라어 ‘크레스튀오마이’(χρηστεύομαι)는 ‘친절’을 뜻합니다. 내 속에서 뭔가 올라오지만 주님을 바라보고 꾹 참고 다음날 그를 보며 너그럽게 대하는 태도를 말하죠.
그 다음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입니다. 돈이나 명예나 직책 때문이 아니라 진리로 인해 기뻐한다는 것이죠. 그 사람이 보기도 싫어서 같은 울타리에 있기조차 싫지만 내게 명령하시는 진리 때문에, 주님 때문에 함께 한다는 것이죠. 진리와 함께 하는 삶 자체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 모든 것을 ‘참는다’인데 헬라어 ‘스테고’(στέγω는 ‘덮어준다’는 뜻입니다. 비도 폭풍우도 이른바 상대의 허물과 약점과 추함도 완전하게 덮어주는 걸 말하죠. 노아의 세 아들 중 두 아들은 아버지가 하체를 덮어주었지만 한 아들은 공개해 버렸죠. 사랑하면 덮어준다는 것입니다.
또 모든 것을 ‘믿는다’, ‘피스튀오’(πιστεύω)입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믿는데서 시작이 됩니다. 저 사람이 미흡하고 껄끄러워보여도 저를 통해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이루어질 걸 믿는 걸 말합니다. 또 모든 것을 ‘바란다’, ‘엘피조’(ἐλπίζω)인데 ‘소망한다’는 뜻입니다. 지금은 미흡하지만 저 사람의 미래가 바람직하게 될 것을 소망하는 것입니다. 부부지간에도, 부모자식간에도, 친구지간에도 말이죠. 또 모든 것을 ‘견딘다’는 ‘휘포메노’(ὑπομένω)는 ‘-의 아래에 거한다’는 뜻입니다. 영어로 ‘understand’와 같습니다. 그 사람의 입장에 선다는 뜻이죠. 그때 그 사람에 대한 이해심이 생기게 되죠. 이와 같은 적극적인 사랑의 시작은 ‘오래참는다’에서 비롯된다는 점이죠. 그런데 ‘오래 참는다’는 ‘마크로튀메오’(μακροθυμέω)는 ‘오래’(long)를 뜻하는 ‘마크로스’(μακρός)와 ‘튀모스’(θυμός)의 합성어입니다. 튀모스는 ‘희생한다’는 뜻이죠. 오래 참는다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희생 제물로 드린다는 뜻입니다. 그 사람만 주님 안에서 제물이 되듯 오래 참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사랑하며 살 수 있다는 것이죠.
오늘도 주님 안에서 나 자신을 희생제물로 드리는 사랑의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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