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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장입니다. 중요한 것은 사도 바울이 이 고린도전서 13장을 어떤 특정 개인에게 쓴 게 아닙니다. 만약 그랬다면 그 개인만 이 내용대로 살아야 했겠죠. 그런 게 아니라 고린도교회 공동체에게 쓴 것입니다. 따라서 13장의 대전제는 한 개인이 아닌 교회공동체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1-3절은 사랑의 필수성, 사랑의 절대성을 밝혀주었죠. 천사의 방언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밖에 안 된다고 말이죠. 모든 지식을 알고 산을 들어 바다에 빠지는 믿음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Nothing 곧 아무 것도 아니라고 했죠. 내가 가진 모든 것을 팔아 구제하고 내 몸으로 헌신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다고 말이죠.
왜 그렇습니까? 모든 지체는 서로 돌아보고 사랑해야 하는 것이죠. 따라서 내가 아무리 방언을 하고 헌신을 해도 주님의 몸된 교우들과 서로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주님의 몸된 교회의 지체가 아님을 말하기 때문이죠. 그래서 소용이 없다는 것이었죠.
4-7절은 사랑의 정의에 대해서 밝혀주었습니다. 두 가지 정의가 있었죠. 하나는 소극적인 사랑의 정의, 다른 하나는 적극적인 사랑의 정의였습니다. 소극적인 사랑은 그 모든 것이 ‘시기’로부터 시작된다고 했고, 적극적인 사랑은 오래 참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했죠.
오늘은 ‘사랑의 영원성’에 대해서 8-13절까지 밝혀줍니다. 8절에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여기에서 ‘떨어진다’는 말은 ‘에크핍토’(ἐκπίπτω)인데 ‘소멸한다’, ‘실패한다’는 뜻입니다. 사랑은 언제까지나 소멸하지도 않고 실패하지도 않는다는 것이죠. 그만큼 사랑은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왜 사랑이 영원하겠습니까?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 4장 7-8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내가 사랑하면 사랑이신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이죠. 내가 말씀대로 상대를 사랑했는데 열매가 없다면 실패한 것입니까? 그렇지 않죠. 실패한 것은 상대방입니다. 그가 사랑을 거부했기 때문에 말입니다. 비록 그는 거부했지만 그 기간 동안 내가 사랑이신 하나님과 더 깊어졌기에 나는 실패한 게 아니죠.
여기에서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이것은 사랑과 대비되는 은사들입니다. 예언, 방언, 지식의 유한함을 말해 주는 것이죠. 그것들은 폐한다는 것입니다. 언젠가 사라지고 소멸된다는 것이죠.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서 하나님 앞에 갔을 때, 우리는 사랑이신 하나님 앞에 서게 되죠. 사랑이신 하나님이 말씀의 주인이신데 무슨 예언이 필요하겠습니까? 무슨 방언이 필요하겠습니까? 무슨 지식이 필요하겠습니까? 그러나 그때에도 사랑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사랑이시고, 사랑만이 하나님 나라에서 존재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 목적이자 동기이기 때문이죠.
9절에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우리는 다 아는 것 같지만 실은 부분적으로 아는 것뿐이라는 점입니다. 오래 전에 미국의 부시가 이라크를 공격할 때, 그 동기가 이라크의 대량살상 무기를 폐기시키기 위함이었죠. 미중앙정보국의 막강한 정보를 통해 거기에 대량살상무기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전쟁을 하고 보니까 살상무기는 없었습니다. 그만큼 인간이 알고 있다는 것은 부분적인 것투성입니다. 내가 자식을 다 알고 있는 것 같아도 부분적으로만 아는 것들 뿐이죠. 유한한 육체를 지니고 있는 우리는 주님 나라 갈때까지 부분적으로 알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에 예언이라는 것도 실은 부분적인 것들 밖에 알 수 없는 것들이죠. 오늘은 이 조각의 말씀, 내일은 저 조각의 말씀, 그렇게 평생 몇 조각의 말씀을 붙잡고 살기 쉽죠.
10절에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온전한 것이 올 때’란 종말을 말하는 것이죠. 역사적인 종말과 개인적인 종말 두 가지 다 말입니다. 그 종말이 올 때 우리는 육체로부터 벗어나게 되죠. 그때는 우리가 부분적으로 아는 것들로부터 자유해서 온전하게 알게 되죠. 그 예가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죠. 둘이 다 죽었을 때 나사로는 하나님 나라에 갔죠. 그때 부자는 그 나사로가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있는 것을 보게 되죠. 그런데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부자가 아브라함을 어떻게 알아 볼 수 있죠. 육신을 벗어나서 자유하기 때문이죠. 뿐만 아니라 마태복음 17장의 변화산에서 일어난 사건도 똑같죠. 그때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가셨죠. 그 순간 예수님께서 변화돼서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이야기를 했죠. 그때 세 제자가 모세와 엘리야를 즉각적으로 알아보죠.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는데 말입니다. 그들의 영적인 세계를 주님께서 열어 주셨기에 한 순간 알아본 것이죠. 그렇기에 이 땅에 사는 날 동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겸손입니다. 내가 안다는 게 부분적인 것뿐임을 인정하면서 겸손하게 사는 게 필요하죠. 그만큼 성숙한 자란 전체적인 틀을 항상 마음속에 품고, 반대편의 부분도 생각하며 남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삶이 성숙한 자죠.
11절에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사람이 장성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전의 것을 버리는 걸 말하는 것이죠. 나이가 20살 30살이 되면 어린 아이의 상태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이죠. 사도 바울이 지금 말하는 것은 인간의 육체와 지식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죠. 사랑입니다. 어릴 때는 사람에 대한 사랑이 유치했지만 장성해서는 어린 아이의 유치함을 벗어나야 한다는 뜻이죠. 장성하면 장성할수록 자기 중심적인 틀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을 수용할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걸 말하죠. 사람들 가운데는 60세가 되었는데도 마음만은 20이라는 사람이 있죠. 그것은 사실 위험한 생각이죠. 마음이 20대란 아직도 자기 중심적인 마음을 뜻하기 때문이죠. 몸이 60이 되었다면 그 마음도 60대처럼 너 후덕한 마음을 지니는 것이 중요하죠.
12절에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바울이 지금은 거울을 보는 것처럼 희미하다고 했습니다. 거울이란 그 당시의 ‘동으로 만든 거울’을 말하는 것입니다.고린도가 실은 가장 유명한 동을 캐내는 산지였습니다. 다만 그때 당시에 가장 멋진 동경은 일반인들은 못 가졌고 여유 있는 사람만 가졌죠. 그런데 그 비싼 거울을 사서 본다 한들 다 볼 수 있었겠습니까? 아니죠. 여전히 희미할 뿐이죠. 요즘은 유리에 수은을 발라서 거울을 만듭니다. 그런데 그것 역시 전체를 볼 수 있는 게 아니라 보이는 일부분만 보는 것이죠. 환한 거울을 보지만 내 속에 무슨 병이 퍼지는지 알 수 없습니다. 거울을 본다 해도 내 본성까지 들여다볼 수 있는 것도 아니죠. 그만큼 2천 년 전의 동경이나 현재의 겨울이나 불완전하기는 똑같습니다. 그래서 육체를 벗는 순간 영이신 하나님을 뚜렷하게 보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결론이 13절입니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믿음, 소망, 사랑은, 항상 있는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말하죠. 왜 사랑이 제일이라는 것입니까?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 곧 하나님이 사랑이십니다. 그렇다면 믿음은 무엇에 대한 믿음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이죠. 소망도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소망입니다. 따라서 믿음과 소망의 근거와 목적은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 중의 제일을 사랑이라고 결론 내린 것입니다.
이 결론이 시사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살리셨다는 것이죠. 그 사랑을 믿는다면, 몸 된 지체로서 서로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절대로 하나님은 혼자 사랑하라고 말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랑이신고로 너희가 주님의 몸을 이루고 있다면 그 사랑의 원동력 속에서 너희들도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죠. 성숙한 교회는 사랑이신 하나님의 통로가 되어 서로 사랑하며 사는 데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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