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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성령의 은사를 자랑하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우선 그 관점부터 바르게 일깨워주고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받은 은사를 서로 크고 높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실은 하나님을 모르던 시절의우상숭배할 때 했던 것이라고 말이죠. 그 점을 상기시면서 성령의 사람이라면 자신이 받은 은사를 결코 자랑치 않는다고 했죠. 성령의 사람은 결코 성령님 위에 서려고 하지 않는 자라고 말이죠.
본문 4절부터 바울은 성령의 은사에 대해 본격적으로 설명을 합니다. 4절에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사실 1절에서 ‘신령한 것’에 대해서 설명을 했습니다. ‘신령한 것’이란 헬라어로 ‘프뉴마티코스’(πνευματικός)인데, 4절의 ‘은사’는 ‘카리스마’(χάρισμα)로 썼습니다. ‘카리스마’란 본래 선물을 뜻하는 말입니다. 우리말 ‘은사’도 본래 ‘은혜 은자’에 ‘베풀 사’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선물이 곧 은사요 카리스마라는 것입니다.
그 은사를 가리켜서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부른 까닭이 무엇일까요? 은사를 주시는 주체자가 성령 하나님이시기 때문이죠. 옛날 임금이 신하에게 선물을 하사할 때 불평할 수 없었죠. 어린 아이의 생일날 선물을 줄때도 부모에게 결정권이 있죠. 은사의 주체자는 철저히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그런데 “은사는 여러 가지다” 곧 다양성(diversty)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근본 뿌리마저 다양한 것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칠순 잔치를 하는 아버지에게 자식들이 선물할 때 다양한 걸 드릴 수 있죠. 하지만 성령의 은사는 다양하긴 하지만 근본 뿌리 자체가 다른 게 아니라는 점입니다. 한 성령 안에서 나온 다양성(distribution)을 말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님은 당신의 뿌리로 당신의 은사를 분할해주시지만 우리에게는 다른 형태로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은사는 인간의 자랑거리가 될 수 없는 것이죠. 왜죠? 그 은사는 은사를 주시는 성령님에 의해 분배되기 때문입니다.
5절에 “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직분’이란 말은 ‘디아코니아’(διακονία)입니다. 이것은 ‘봉사’를 뜻하는 말이죠. 왜 봉사라는 말을 ‘직분’과 동일시할까요? ‘디아코니아’는 ‘디아코노스’에서 파생된 말입니다. 그 뜻이 ‘봉사자’ 혹은 ‘봉사하는 사람’입니다. 이 단어가 신약성경에 20회 정도 나오는데 집사라고 번역된 3번을 제외하면 나머지 17회는 모두 종, 사환으로 번역돼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직분은 여러 가지고, 그 모든 직분은 봉사를 위한 것이라는 점이죠. 그 직분이 자기 신분의 높낮이를 나타내는 것도, 자기 과시용으로 삼는 것도 아니라는 점입니다. 직분은 주님께서 봉사자로 살도록 주셨다는 점입니다. 봉사자로서 내가 다른 사람보다 높고 크고 더 중요한 봉사를 한다는 교만한 마음을 품을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6절에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그리스도인의 사역과 그 모양새는 다르지만 그 사역을 통해 모든 것을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 아버지란 사실입니다. 목사는 목회로서, 선교사는 선교사로서, 예술가는 예술의 도구로서, 그리고 동네 가게 주인이 그 가게를 선교지로 삼아서 사역할 수 있죠. 어떤 사역을 하든지, 그 사역으로 어떤 열매를 맺든지, 결코 자랑의 근거나 교만의 도구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7절에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성령의 유익에 대해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각 개인을 유익케도 하지만 교회 공동체의 유익을 위함이라는 사실입니다. 나와 더불어 사는 사람들을 위해 유익하게 사용하도록 개별적으로 은사를 주셨다는 것이죠. 그렇기에 내가 신령한 사람인지 아닌지는 어떻게 진단할 수 있겠습니까? 공동체 속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유익이 되고 있는가, 하는 것이죠.
이제 8절부터 은사의 종류에 대해 바울이 설명해 줍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여기에서 지혜의 말씀과 지식의 말씀이 있습니다. 지혜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은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똑같이 읽는데 그 감추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것이죠. 그리고 지식의 말씀이란 그 깨달은 말씀을 내 삶에 적용하고 다른 사람에게 적용토록 해 주는 걸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은사도 중요하고, 그걸 삶 속에 적용하는 은사도 중요하죠.
9절에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믿음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더 큰 믿음을 갖기 위해서 의지적으로 노력을 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항상 어느 시점에서 뒤를 돌아보면 믿음이 선물이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죠. 그 때 내가 더 큰 믿음을 가지려고 하나님 앞에 기도했고, 그만큼 씨름했던 것은, 실은 하나님께서 내게 믿음을 주셨기에 가능했다는 것이죠. 그래서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주신다고 하죠. 신유의 은사를 말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병고침’이 말은 헬라어로 복수형입니다. 병고침이란 육체의 질병만 말한 게 아니라 영적인 치유까지 일컫는 것입니다.
10절에 “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능력 행함’이란 이미 앞에서 병 고치는 능력을 말했기 때문에 여기서는 어떤 초월적인 능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이 구브로에 가서 박수 엘루마의 눈을 멀게 한 능력으로 이해할 수 있죠.
또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주신다고 합니다. 이 예언이란 미리 예자가 아닙니다. ‘맡길 예’자로서 점쟁이처럼 미래를 예언하는 은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로 그 말씀으로 세상을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말씀으로 과거를 해석하고, 말씀으로 오늘의 현재를 측량하고, 말씀으로 미래를 내다보는 자입니다. 바로 그것이 예언의 은사죠.
또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지금 누군가 이야기 하는데 성령에 의한 것인지 악령에 의해서 한 것인지, 분별하는 은사가 있다는 것이죠.
또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함을”, ‘각종 방언’이란 여러 방언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때의 방언은 오순절 방언과는 다른 방언이죠. 오순절 날엔 각자 세계 16개국 이상에서 온 사람들이 알아듣는 방언이었죠. 그런데 오늘 말하는 방언이란 누군가가 통역을 해 주어야 하는 천사의 방언입니다.
이처럼 바울은 여러 가지 은사를 말하고 있습니다. 다만 오늘날에는 영들을 분별한다거나, 방언을 통역한다거나, 하는 은사가 중요하지 않죠. 그 당시에는 기록된 성경말씀이 없었기 때문에, 누군가 해석하고, 통역하고, 또 저것이 자기 이야기인지 성령님의 이야기인지, 분별을 해야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경말씀이 있습니다. 그래서 2천 년 전 성경이 없던 시절의 은사와 오늘날의 시대 상황 속에서의 은사는 다른 형태로 다가올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일례로 의술과 약이 발달하지 않는 아프리카 오지에 들어가면 선교사들에게 신유 은사가 놀랍게 나타납니다. 하지만 의술과 의약이 발달한 우리나라에서는 의술과 의약을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로 받아들여도 좋죠.
11절에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그 많은 은사는 성령께서 행하시는데, 그 분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다시 말해 개별적으로 나눠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한 사람, 한 사람, 인격적으로 대하시고, 그 신앙 경륜과 자질을 보시고, 그에게 꼭 필요한 은사를 주시는 성령님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렇기에 내가 어떤 은사를 갖고 있다할지라도 자랑거리로 삼아서도 안 되고, 또 내게 주신 은사를 경시해서도 안 되는 것이죠. 모든 은사는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것이기 때문에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는 음성이 무엇입니까? 내가 더 크게 받았다고 하는 은사는 더 큰 봉사를 하도록 주셨다는 마음으로 겸손해야 한다는 것이죠. 그래서 은사는 공동체의 유익을 위한 봉사여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 은사는 반드시 성령의 열매와 함께 가야 한다는 것이죠. 내 인격이 변화되지 않고도 은사는 받고 행할 수 있지만, 열매와 함께 갈 때 탈이 없게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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