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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묵상DewSermon/고린도전서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고전12:12-31)

by 똑똑이채널 2024. 12.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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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고전 12장에서 성려의 은사에 대한 목회적 답변을 해 주고 있습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자신들의 영적 은사에 대해 우월감에 빠져 서로 자랑하며 싸웠죠. 바울은 그들에게 은사의 외적인 다양성과 본질적인 통일성을 말해 줬습니다. 은사는 외적인 형태가 다양하지만, 본질적인 원천은 삼위일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이죠. 그만큼 은사를 주신 목적은 교회의 유익에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그 은사를 자기 자랑거리가 아닌 교회 공동체 유익을 위해 봉사하라고 말이죠.

 

오늘 읽은 본문은 성령의 은사에 대한 연장선상에서, 우리 몸을 빗대 이야기해 주고 있습니다. 12절에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헬라어 원문에는 맨 앞에 ‘가르’(γάρ) 곧 ‘왜냐하면’이란 말이 들어 있습니다. 이른바 11절까지의 보충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몸이 하나인데 손과 발도 하나 밖에 없는 게 아니라, 여러 지체가 있다는 것입니다. 다만 그것들의 개별적인 특성이나 역할도 다르다는 것이죠. 교회가 그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교회의 각 지체는 저마다 다양하지만 주님의 한 몸이라는 통일성을 이루고 있다는 뜻이죠.

그래서 13절에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유대인과 헬라인, 종과 자유인이 함께 할 수 없는 상극의 사람들이었지만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6장에서 세례를 ‘그리스도와 연합’이라고 밝혔습니다. 그만큼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다른 그들이 한 몸의 지체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다.’는 뜻은 성령 세례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만큼 그 분 안에서 한 몸을 이루는 사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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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5절입니다. “몸은 한 지체뿐만 아니요 여럿이니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손과 발은 분명히 다릅니다. 그러나 다르다고 해서 손과 발이 떨어져 있는 건 아닙니다. 손과 발은 몸의 지체이고, 몸의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래서 16절에서 “또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 귀와 눈도, 손과 발처럼 소중한 지체라는 것입니다. 어느 것 하나 몸에서 떨어져 나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또 17절에 “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냐.” 온 몸이 눈으로 가득 차 있다면, 귀로만 가득 차 있다면 얼마나 흉측하겠느냐는 것이죠. 그만큼 하나의 지체만으론 몸이 성립될 수 없다는 뜻이죠.

그래서 18-19절에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만일 다 한 지체뿐이면 몸은 어디냐.” 우리에게 여러 지체가 있고, 어떤 지체는 귀하게 보이고, 어떤 지체는 홀대받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 모든 지체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만들어졌다는 것이죠. 어떤 지체도 의미 없는 게 하나도 없다는 뜻입니다. 비나 눈이 오면 자동차의 창문이 더럽게 됩니다. 그런데 와이퍼 물구멍은 0.1m도 안 되죠. 비나 눈이 오면 그것이 없이는 운전이 불가능하죠. 그처럼 불필요한 것처럼 보이는 것이 귀하다는 것입니다. 교회도 남 앞에 잘 드러나는 봉사자도 있지만 드러나지 않는 봉사자도 있죠. 하지만 그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이룬다는 것입니다.

20절,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헬라어 원문에는 맨 앞에 ‘데’(δέ) 곧 ‘그러나’라는 접속사가 들어 있습니다. 지금까지 몸은 하나이지만 지체는 많다는 논리 곧 단일성에서 다양성으로 나갔지만 그러나 20절부터는 그 반대로 나간다는 것입니다. 다양성에서 단일성으로 말이죠.

그래서 21절에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지 못하리라.” 눈이나 머리가 다른 것들보다 쓸데가 없다고 해서 떠나가라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하는 것이죠. 그 스스로 불구자가 될 뿐입니다. 교회에 보이지 않는데서 봉사하는 사람들이 없다면, 그 교회는 건강한 교회일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22-23절에 “그뿐 아니라 더 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느니라.” 우리 몸을 뜯어보면 더 허약해 보이는 지체가 더 요긴하다는 것입니다. 심장만 봐도 딱딱하지도 않고 크지도 않고 형편없이 약해 보이지만, 그것이 멎으면 아무리 멀쩡한 사지도 마비가 되고 말죠. 하잘 것 없는 머리카락도 얼굴과 머리를 아름답게 해 주는 것처럼 말입니다.

24절 “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그럴 필요가 없느니라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귀중함을 더하사.” 여기도 맨 앞에 ‘데’(δέ) 곧 ‘그러나’라는 접속사가 빠져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아름다운 지체에 따로 무엇을 요구할 게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 자체를 아름답고 고르게 해 주셨는데 무엇으로 더 가릴 게 있겠느냐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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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 몸을 고르게 하신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25절에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 몸을 고르게 하신 것은 분쟁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곧 서로 돌아보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고린도교회가 어떻다는 것입니까? 손과 발이, 눈과 코가, 서로 잘났다고 싸운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께서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서로 돌아보도록 하기 위해 교회의 몸을 이루게 하셨다는 것이죠. 그래서 26절에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망치로 손을 잘못 치면 목에서 비명이 터지고 눈을 찡그리게 되죠. 그야말로 온 몸이 아파하는 반응을 보입니다. 그만큼 온 몸의 고통도, 기쁨도, 실은 모두가 동참한다는 뜻이죠. 주님의 몸된 교회를 이루는 각 지체들의 모습이 그와 같다는 것입니다.

또 27절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몸’이란 헬라어로 ‘소마’(σῶμα) 곧 ‘바디’(body)입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소마’에는 정관사가 붙지만 여기엔 없습니다. 정관사가 없을 경우엔 ‘한 몸’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리스도는 두 몸이 아닌 한 몸이라는 것이죠. 그리고 우리는 그 분을 통해 구원받고, 그 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그 분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그 몸의 각 부분, 각 지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28절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을 행하는 자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에 몇 몇 지체를 세우셨다는 말씀이죠. 그 지체를 세우기 위해 각양 은사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눈여겨봐야 할 게 있죠.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방언으로 인해 서로 격돌하는 상황인데, 바울이 은사를 이야기하면서 방언을 맨 뒤로 빼고 있다는 점입니다. 왜요? 너희들이 방언을 모든 것으로 생각하고 있고 잘난 체 하지만 은사에는 결코 우열이 없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이죠. 모든 은사는 오직 주님의 도구로 쓰일 뿐이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29-30절 “다 사도이겠느냐 다 선지자이겠느냐 다 교사이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이겠느냐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이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이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이겠느냐” 결코 똑같은 은사를 모두가 가질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이제 31절을 통해 바울이 결론을 말합니다.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여기에서 더욱 큰 은사란 ‘탁월한 은사’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뭔가 더 크고 더 높은 은사가 있다는 게 아닙니다. 결과적으로 공동체를 유익하게 하는 은사를 사모하라는 말입니다. 그 좋은 길이 무엇이겠습니까? 사랑이죠. 사랑 안에 있을 때에 모든 지체가 서로를 돌 볼 수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예수님도 “서로 사랑하라”고 제자들에게 당부하셨던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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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이와 같은 말씀을 통해 성령님께서 깨닫게 하시는 게 있죠. 우리가 사랑의 사람이 되지 않을 때 우리는 암세포가 될 수 있다는 것이죠. 영양분이 몸에 들어오면 온몸에 배분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면 혼자 취하게 되죠. 자기 은사를 내세우지 않고 서로 돌보고 격려하며 살아야 할 이유입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은 교회뿐만 아니라 가정도 일터도 똑같습니다. 4차산업혁명의 시대 속에서 존중받는 사람은 혼자 똑똑하고 잘난 척 하는 사람이 아니라 공감하는 사람 협력하는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우리도 성령의 사람이라면 가정이든 일터든 함께 그 조직을 세워야 한다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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