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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도 말씀드렸지만 바울은 자기 동족들이 구원받는다면 자신이 저주를 받는다 해도, 자신이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진다 해도 원바는 바라고 했습니다. 그 정도로 자기 골육과 친인척들을 비롯해 모든 동족들이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사랑을 덧입었으면 좋겠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나 왜 그 동족 곧 유대인들이 구원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마지막에 밝혀주었습니다. 왜죠?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자의식만 강할 뿐, 그래서 율법을 자랑하고 자신들의 의로운 행위만 강조할 뿐,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긍휼에 대해서는 무지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참된 메시아요 구원의 주님으로 모시지 않았기 때문이죠. 바로 그런 동족들이 주님의 사랑을 덧입기를 바울은 그 누구보다도 간절히 소망했던 것입니다.
오늘 읽은 로마서 10장 초반부에도 그 사실을 다시금 강조하고 있습니다. 본문 1절에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함이라” 바울의 마음에 원하는 바도 그렇고, 하나님께 간구하는 바도 그것이라고 말합니다. 자기 동족 이스라엘이 구원받는 것 말입니다.
그런데 2-3절에서는 왜 그들이 구원을 받지 못한 것인지 밝혀주고 있습니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는 열심히 있지만 올바른 지식을 따른 열심히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도 모른 채 오직 자기들의 의만 내세우려는 열심일 뿐이라는 것이죠. 한 마디로 율법의 형식에만 치우친 열심 말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4절에 진정한 율법의 ‘마침’이 무엇인지 밝혀줍니다. 여기에서 ‘마침’이란 말의 원 의미는 ‘목표’입니다. 율법의 목표가 무엇이냐 하면 곧 그리스도 예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그것을 유대 동족이 모른 채 구약의 율법의 형식에만 치우쳐 왔고, 자기들의 행위를 의의 잣대로 삼아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아직까지 구원을 받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5-7절을 통해 유대인들이 아무리 자기 열심의 행위로 수고를 해도 결코 구원에 도달할 수 없음을 밝혀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의로운 행위로 하늘에까지 올라간다 해도, 심지어 무저갱에까지 내려간다 해도, 결코 예수 그리스도를 모셔올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들의 행위에 의해 통제받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들이 주님을 메시아로 모시고, 통제받는 가난한 심령이 될 때 그들에게 은혜를 부어주시는 분이시죠.
바울은 유대 동족들이 궁극적으로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을 제시합니다. 본문 9-10절 말씀이 그것입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는 길, 동족 유대인들이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을 때에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할 때 예수님의 어떤 부분을 믿는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주님이시라는 것, 또 예수님은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대신 죽으신 분이라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부활의 주님이라는 것, 바로 그것을 믿는 것이죠. 예수님이 주님이시고, 예수님의 나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죽으셨고, 예수님이 부활의 주님이심을 믿고 사는 자에게 구원 곧 영생이 주어지는 것이죠.
그런데 그것은 유대인 뿐만 그렇다고 바울이 이야기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죠. 12-3절에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주님의 그 구원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시 말해 동족 유대인들도 그렇고, 이방인인 우리 자신들을 향한 구원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세계 어떤 민족이든지, 어떤 형편에 처해 있든지 간에,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게 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의 구원하심에는 차별이 있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태복음 1장의 족보만 봐도 환히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속인 치사한 인간입니다. 야곱은 형의 복을 가로챈 사기꾼입니다. 다윗은 자기 부하의 아내를 빼앗고 그 부하를 죽인 흉측한 살인마입니다. 솔로몬은 1천 명의 처첩을 둔 희대의 탕아입니다. 다말은 시아버지와 통간했고, 라합은 기생이었고, 룻은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 여자였습니다. 밧세바는 남편을 두고 다윗과 간음한 여자였죠. 그런 그들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의 족보를 쓰는 인물이 될 수 있었습니까? 그들 스스로의 행위나 능력으로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을 덧입었기에 가능하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오늘도 마찬가지라는 사실이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과 부활의 능력을 믿는 자에게 그 어떤 흉측한 죄인이요 탕자라 할지라도 구원의 은혜 안에 들어올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본문 14-15절입니다.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무슨 말씀입니까? 주님의 긍휼과 사랑에 의해 구원받은 사람이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알고 믿게 되었는가? 누군가 나에게 복음을 전파해 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다면, 지금까지도 하나님의 사랑을 모른 채 죄 가운데 빠져 있을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군가를 동원해 우리를 초청하셨고, 이 자리로 부르신 것이죠. 그렇다면 우리도 누군가를 위한 주님의 도구가 되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영국의 유명한 스펄전 목사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수많은 사람들을 변화시킨 청교도 설교자였는데, 그가 주님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눈 오는 날 잉글랜드 벽촌을 지나가던 한 젊은이가 스펄전의 가슴에 복음의 불을 질러주고 갔다는 사실입니다. 그 청년의 이름이 무엇인지, 지금까지도 모르지만, 그 청년이 스펄전의 가슴에 복음의 불을 질렀기에 성령님이 도구삼아 역사하셨던 것입니다.
17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여기에서 ‘들음’이라는 단어가 두 번 나옵니다. 헬라어로 ‘아코에’로 똑같지만 의미는 다릅니다. 처음 ‘들음’은 hearing 곧 귀로 들어서 내 안에 들어오게 하는 것이죠. 뒤의 ‘들음’은 doing 곧 action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귀로 듣는 것을 끝나는 게 아니라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죠. “저 아이는 말을 참 잘 들어”라고 할 때, 그것은 귀가 밝다는 게 아니라 어른의 말을 잘 듣고 잘 행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17절 하반절에 그리스도의 말씀이 그 들음 곧 행함을 주도한다는 것이죠. 어떻게요? 주님의 말씀이 내 심령에 레마로 작용할 때 그렇습니다. 그때 비로소 살아 있는 능력의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그렇게 주님의 복음을 전하고, 그의 심령이 열릴 수 있도록 기도하는 가운데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해도, 이스라엘이 순종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본문 21절입니다. “이스라엘에 대하여 이르되 순종하지 아니하고 거슬러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하였느니라” 여기에서 ‘손을 벌렸노라’하는 말씀은 손을 ‘내 밀었다’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을 보내서 동족 이스라엘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전파하게 했어도 순종하지 않는 그들을 향해 주님께서 손을 내 밀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이 거부해왔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어떻습니까? 그렇게 거부하는 이들이라면 하나님께서 버리셨으니, 포기하고 내버려둬야 하는 것일까요? 이제 11장으로 넘어가면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꿔 말해 오늘 우리의 골육이나 친척이나 일터의 동료들이나, 그 누구를 알고 있든지 간에, 그들이 주님의 구원을 받지 못한 상태라면 결코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중보하며 그들에게 구원이 임하도록 전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아름다운 발걸음이요, 주님의 거룩한 성례와 같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주님. 선민이라는 유대인들이 율법의 형식만 중요하게 여길 뿐 율법의 내용과 의미는 등한시했습니다. 율법의 마침이자 목표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모시지 못했습니다. 그런 그들을 주님은 포기하지 않고 지금도 구원의 손을 내밀고 계심을 믿습니다. 오늘 저희 주변에 구원받지 못한 이들을 향한 주님의 손길도 계속 펼쳐보이는 저희들이 되게 하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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