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새벽묵상DewSermon/에스겔

거룩한 방이라(겔42:1-20)

by 권또또 2023. 6. 19.
728x90
반응형

오늘 읽은 에스겔 42장은 새 성전의 본체 건물 좌우의 제사장들의 방과 바깥담에 관한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좀 더 구분해 보면, 1-14절까지는 성전 본체의 남쪽과 북쪽에 있는 부속 건물인 제사장들의 방에 관한 양식을 보여주고 있고, 15-20절까지는 바깥으로 나아가 다시 성전의 바깥담들을 그려주는 모습입니다.

본문 1절에 그가 나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 북쪽 뜰로 가서 두 방에 이르니 곧 하나님께서 천사를 통해 에스겔을 북쪽 뜰로 데리고 가서 두 방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른바 성전의 북쪽과 남쪽으로 각각 10규빗 약 5.2m 너비의 통로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는 두 개의 건물 곧 제사장들의 방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주석을 보면 이 건물들이 테라스 위에 세워져서 꼭대기 부분이 아래 부분보다 더 좁은 삼층 건물로 돼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데 이 건물의 방들은 제사장들이 제물들을 먹거나, 이 거룩한 제한구역을 떠나기 전에 의복을 갈아입는 성물보관소 역할을 했습니다. 제사장들은 이 건물의 방에 있을 때 거룩한 예복을 입어야 했고, 또 밖으로 나갈 때는 예복을 벗어야 했습니다.

본문 후반부인 15-20절은 성전 구역의 바깥 주변을 측량하고 살펴보는 장면을 담고 있습니다. 성전 구역은 한 면이 500규빗 약 250m인 정방형으로 대칭구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성전 사방으로는 담이 있고, 그 담은 거룩한 성소와 일반 지역을 구분하는 경계가 되었습니다.

에스겔은 이 모든 것을 지금 환상으로 보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가 본 이 계시들은 장차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바빌론 포로에서 가나안으로 곧 예루살렘으로 불러들여서 회복시켜주시고, 또 무너진 성전을 재건케 하실 것을 의미하는 말씀이죠.

그러나 이 성전은 스룹바벨이나 에스라나 느헤미야가 재건했던 그 성전과는 다른 의미를 담고 있다고 했죠. 이 성전은 새 하늘과 새 땅의 천년왕국 때에 다가올 성전으로서, 하나님께서 이미 지어놓으신 성전이라고 했죠. 궁극적으로 에스겔서의 성전은 메시아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 질 구원의 회복과 하나님 나라의 거룩함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구별된 모습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했죠.

본문 13절을 보면, 제사장들의 방은 ‘거룩한 곳’이라고 지칭합니다. 그가 내게 이르되 좌우 골방 뜰 앞 곧 북쪽과 남쪽에 있는 방들은 거룩한 방이라 여호와를 가까이 하는 제사장들이 지성물을 거기에서 먹을 것이며 지성물 곧 소제와 속죄제와 속건제의 제물을 거기 둘 것이니 이는 거룩한 곳이라.” 제사장들의 방을 ‘거룩한 곳’이라고 칭합니다. 그렇게 지칭하는 것은 제사장들의 구별된 직무와 삶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나타내 주기 때문이죠. 제사장들은 구별 된 이 방에서 ‘지성물’을 먹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지성물’에 해당되는 히브리어는 ‘코드쉐 학코다쉼’입니다. 이 단어는 ‘지성소’를 일컫는 히브리어 단어와 동일한 어원을 가진 표현입니다. 또 이 단어 속에 ‘거룩한’이라는 어원이 반복적으로 사용되어 최상급의 의미를 담고 있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이 ‘지성물'을 먹는 구별된 제사장의 이 방은 ‘가장 거룩한 곳’이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제사장의 방이 중요한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그 방이 제사에 바쳐지고 난 뒤에 제사장의 몫으로 남겨진 소제와 속죄제와 속건제의 ‘제물을 보관하는 장소'이기도 하기 때문이죠. 그 말의 의미는 하나님께 드리는 제의와 같은 종교적인 측면만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 자신의 생활을 위해 먹고 마시는 육체적인 행위도 거룩한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배와 같은 직접적인 종교적 의식만 아니라, 거룩한 삶을 추구하고 거룩한 삶에 자신의 일생을 드리는 사람의 일상적인 삶, 곧 먹고 사는 것 또한 거룩한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죠.

 

본문 15절부터 시작되는 성전 외곽 담 측량부분에서 20절에 이 성전 담의 기능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곧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별하는 것이죠. 그런데 이러한 표현은 자칫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즉 담 안은 거룩한 곳이고, 그 바깥은 거룩하지 않다는 헬라의 이원론적인 사고를 갖게 하는 것입니다. 즉 담 안에만 거룩한 곳이기에 담 바깥을 멸시하거나 무시해도 된다거나, 담 안의 삶만이 의미를 가진다거나, 담 안에만 거주해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결코 그러한 뜻이 아닙니다.

본문 20절에 그가 이같이 그 사방을 측량하니 그 사방 담 안 마당의 길이가 오백 척이며 너비가 오백 척이라 그 담은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별하는 것이더라.” 여기에서 마지막 부분 곧 ‘구별하는 것이더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창세기 1장에서 4번이나 사용된 단어입니다. 이른바 빛과 어두움, 궁창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 낮과 밤, 다시 빛과 어두움을 나누는 내용과 관련돼 사용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창조주 하나님께서 질서가 없는 혼돈의 세계에서 하나님의 질서에 따라 생명을 만드시고, 각각 제대로 기능을 하도록 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새 성전의 외곽 담이 외부 세계와 성전 안을 구별한다는 본문 속의 이 표현은 하나님께서 새롭게 세우실 질서와 재창조에 관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에스겔서의 일차적인 독자들은 바벨론 포로로 끌려온 유다 공동체였습니다. 그들은 나라를 잃었고, 그들의 성전은 불타버렸죠. 그래서 바벨론에 끌려와 타국에서 살아가는 비참한 형편의 사람들이죠. 그런 그들에게 솔로몬성전보다 더 크고 영광스러운 면모를 갖추고 있으며, 성전을 떠났던 하나님의 영광이 다시금 되돌아오게 될 새 성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그들에게 새로운 성전이 주는 메시지는 하나님께서 새롭게 새우실 질서와 재창조에 있다는 점입니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창조질서와 하나님과의 관계의 질서에서 완전히 실패했죠. 그때 그들은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에서 떠났고, 온갖 우상과 불법과 불의와 폭력 속에 살았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보존해야 할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스스로 파괴한 꼴이었죠. 그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여러 선지자들을 동원해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은 물론이요,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회복해야 할 것을 주문했었죠.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 같은 경우에는 그런 메시지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포했던 것이죠.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행악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1:13-17)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나 창조세계의 회복은 고사하고, 재물만 가져온다 한들, 그래서 분향한다 한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겠느냐는 것이죠.

 

오늘 말씀을 속에서 우리는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왕같은 제사장(벧전2:9)으로 우리를 부르셔서 ‘담’ 밖의 세상에서 창조 질서를 회복하며, 정의와 평화로 다스리시는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회복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어떻게 거룩한 존재인지, 또 우리가 존재하는 사회와 이웃 앞에서 그 거룩함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를 말씀 앞에서 되돌아보는 오늘 하루가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728x90
반응형
LIST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