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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열기)(예화)현충일날 저녁에 미술학원을 운영하는 집사님 한 분을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작년에 지방회 목사님 한 분이 대상포진으로 3달간 고생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언젠가 나도 맞아야 되겠다고 생각했었죠.
그런데 그 미술학원 집사님이 저에게 대상포진예방접종을 맞도록 배려해줘서 감사한 마음으로 찾아간 것이었죠.
양파 한 봉지와 꽃아 한 봉지를 들고 찾아갔습니다.
그분이 베푼 사랑에 비하면 아주 작지만 그래도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자 함이었죠.
그런데 그분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아주 재미난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 분이 한 달 전에 서울 평창동에 있는 개럴리에서 작품전시회를 한 이야기였습니다.
대학 선배가 그곳 갤러리를 주선해줘서 부랴부랴 작품을 그려 그곳 갤러리에서 전시회를 한 것이었습니다.
평일은 목포에서 학원 아이들과 목포대 출강하면서 대학생들을 가르치고 주말이면 서울에 올라가 그 갤러리에 상주한 거죠.
주말이라고 해도 생활권이 목포라 서울에 아는 분이 없어 쓸쓸할 것 같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고 합니다.
갤러리 한쪽에서는 다른 여성 작가분이 작품을 전시했는데 그 작품을 보러 온 분들이 이 집사님 작품도 자연스레 본 것이죠.
그러다 그 작가 분이 선화예고 출신임을 알게 됐고 그러다 같은 대학 동문들도 많이 알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집사님의 작품을 관람하러 온 손님 중에는 전혀 뜻 밖의 손님이 있었습니다.
그 여성 작가분과도 관계가 없는 분이었죠.
이른바 비구니 스님, 다시 말해 여자 스님이 들어온 것이었습니다.
전혀 모르는 분인데, 그 스님이 왜 그 집사님의 작품을 전시하는 그 갤러리에 들린 것이었을까요?
전시회 기간동안 그 스님은 자기 벤츠에 그 집사님을 태우고 사찰도 소개하고 밥도 사 주면서 그런 이야기를 했다는 거죠.
자신은 본래 부잣집 딸이었는데 20살에 출가했고, 그림에 조예가 깊은 오빠 덕에, 고가 미술품 컬렉터가 됐다고 말이죠.
그런데 작년에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지금은 빚진 자의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자기 소유로 된 평창동 고가의 사찰을 재단에 넘긴 것도, 목포에서 올라온 집사님에게 따뜻한 환대를 베푼 이유도, 그 때문이었던 것이죠.
만약 그 집사님의 작품이 천만원하는 고가의 작품이었다면 그 스님이 사고 팔았겠지만 100만원하는 작품이라 그렇지 못했을 거라고 하더군요.
대신에 자기 사찰의 관계자들과 아는 지인들을 불러 그림들을 감상하고 살 수 있으면 사라고 권하는 모습을 봤다고 하죠.
(깨달음)무엇을 깨닫게 됩니까?
죽음의 문턱을 넘어설 뻔한 경험을 한 분들은 그렇게 이 세상의 것에 집착하기보다 더 나누고 베푸는 삶을 살지 않나 싶죠.
그 비구니 스님을 만난 그 집사님도 그래서 더 많은 사랑을 나누고 베풀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죠.
그 이야기를 들은 저도 그런 감동과 도전을 받았구요.
(적용)불자인 그 비구니 스님도 생에 빚진 자로서 사랑을 베푸는데 그리스도인인 우리도 사랑을 베풀고 나누는 건 당연한 일이죠.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예수님의 생명과 사랑에 빚진 자이기 때문이죠.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은혜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 아닙니까?
그 사랑에 빚진 자로서 또다른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님의 사랑을 베푸는 것을 주님은 가장 기뻐하시기 때문이죠.
그런 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마르지 않는 샘물의 복을 부어주실 줄 믿습니다.
‘상선약수’(上善若水)라는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말로 ‘최상의 선은 물과 같다’는 뜻이죠.
물처럼 자꾸자꾸 흘러보내야 고이거나 썩는 일이 없이 그 생명이 흐르고 마르지 않는 샘물이 될 수 있는 것처럼 말이죠.
예수님께서도 당신의 생명을 십자가에 내어 놓으셨기에 그 분의 생명이 마르지 않는 생수의 강이 되신 것이었죠.
그러니 예수님의 생명과 사랑을 받은 우리가 믿음의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풀고 나눌 때 더욱더 풍성케 하시는 축복의 샘물로 삼아주실 줄 믿습니다.
(역배)요한일서는 사도 요한이 A.D.90년 경에 에베소에 머물 때 그 지역의 성도들에게 쓴 편지입니다.
요한은 본래 야고보와 친형제로서, 베드로와 안드레 형제처럼, 갈릴리 호숫가에서 고기 잡는 어부였죠.
예수님께서 “나를 따르라, 너희로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막1:17)고 할 때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라나섰죠.
어떻게 그 형제들이 즉각적으로 예수님을 따라 나설 수 있었을까요?
그 전에도 베드로를 만날 때 그의 이름을 시몬에서 베드로로 고쳐부른 적이 있는데, 그때도 긴가민가 했었죠.
그런데 그 날은 밤새 그물을 내렸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상황에서 깊은 데 그물을 내려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죠.
그러자 그날은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엄청난 고기를 잡았는데, 그때 비로소 베드로가 “나는 죄인입니다”하고 고백을 했죠.
그때 주님께서 “나를 따르라, 내가 너희로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할 것이다”할 때 즉각적으로 주님을 따라나선 것이죠.
그 분의 부르심은 불가항력적인 부르심이이요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절대권능이 있음을 그들이 알았기 때문에 말이죠.
물론 그분의 부르심 앞에 즉각적으로 따란 나선 요한에게나 야보고에게 그리고 베드로의 형제에게 숨은 뜻이 없었습니까?
3년 동안 그들이 예수님을 따라나섰지만 요한과 그 동료들은 이 세상의 권세를 부여잡고자 하는 숨은 목적이 있었죠.
그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 곧 세상을 구원하실 메시아요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의 아들로 믿었지만 그때까지도 정치적인 메시아로만 생각할 뿐이었죠.
그랬던 그들은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체포당하고 골고다 언덕 위에서 십자가에 죽임당할 때 다 끝난 줄 알았죠.
그러나 예수님께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을 때, 갈릴리 바닷가에 찾아와 사랑을 확인시켜주실 때, 비로소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생겼죠.
그때부터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사람 낚는 어부로 그 인생을 살기 시작한 것이었죠.
그때부터 그들은 주님의 생명과 사랑을 이 세상에 흘러보내는 마르지 않는 샘물과 같은 삶을 살게 된 것이었죠.
그런데 사도 요한에게는 주님께서 특별한 삶을 부여하지 않았습니까?
십자가 위에서 죽으실 때 “요한아. 네 어머니다”하시면서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자신의 어머니처럼 봉양토록 말이죠.
이 세상에 누가 자기 친어머니도 아닌데 자기 친어머니처럼 밥하고 빨래하고 설거지를 하며 봉양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사도 요한은 그것 또한 이 세상에 주님의 생명과 사랑을 흘러보내는 일임을 알았기에 묵묵히 섬겼던 것이죠.
그런데 A.D.60년 중반 ‘마사다’ 항전에 이어 A.D.70년 로마의 티투스 장군이 예루살렘을 완전히 초토화시킨 일이 일어났죠.
그 전인 A.D.65년 바울은 지하감옥에서 순교당했고, 에베소에서 목회하던 디모데도 ‘5월 아데미 축제’때 군중의 돌에 맞아 순교당했죠.
바로 그 무렵에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에베소로 가서 집을 지어 살면서 에베소교회 목회자로 섬긴 거죠.
그리고 A.D.90년 경에 요한복음과 요한일이삼서를 남겼고 밧모섬에 유배를 다녀온 뒤에 요한계시록을 남기고 자연사했죠.
(전개)그렇다면 사도 요한은 왜 요한일서를 쓴 것입니까?
그 당시 로마 황제를 신으로 숭배하는 ‘황제숭배사상’이 만연했죠.
그러니 그 당시에 기독교인들이라 할지라도 황제를 신으로 섬기면서 절을 해야만 시장에 나가 물건을 사고팔 수 있었죠.
사도 요한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목격한 이상 이 세상에 그 어떤 황제도 신이 될 수 없음을 알기에 황제숭배상에 물들지 않도록 요한일서를 써 보낸 것이죠.
아울러 그 당시에 영지주의자라는 이단과 사이비 사상들이 교회 안에 파고 들었습니다.
영지주의란 기독교의 한 분파로서 영은 거룩하지만 육은 더럽고 추한 것으로 여긴 채 영의 구원을 주장한 분파였죠.
오늘날로 치면 영혼만 구원받으면 육체로는 부도덕한 일을 일삼아도 전혀 죄가 되지 않는다는 JMS나 구원파의 논리와 같죠.
그러나 사도 요한은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것은 영혼만의 구원이 아니라 영혼육의 전인적인 구원임을 강조한 것이었죠.
우리가 죽으면 육체는 땅에 묻히고 영혼은 천국가지만 예수님 재림할 때 그 육체도 부활체의 몸으로 다시 하나가 되는 거죠.
사도 요한은 바로 그와 같은 영지주의자들의 유혹을 분별하도록 요한일서를 써 보낸 것이었습니다.
(깨달음)어떻습니까?
저와 여러분들은 황제숭배사상에 물들지 않았습니까?
요즘에 누가 황제를 신으로 숭배한다고 생각하겠습니까?
하지만 오늘날의 황제란 맘모니즘 곧 돈과 권력을 황제처럼 숭배하며 따라다니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 않습니까?
돈이면 뭐든지 할 수 있다면서 돈을 황제처럼 숭배하며 섬기는 이들 말이죠.
돈으로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돈으로 못하는 것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돈으로 값비싼 집을 살 수 있어도 참된 가정은 살 수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돈으로 고급 침대는 살 수 있어도 돈으로 단잠은 살 수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돈으로 의사는 살 수 있어도 건강한 살 수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돈으로 사람과의 관계는 살 수 있을지 몰라도 참된 사랑은 살 수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죽음의 문턱을 넘어선 경험이 있는 분들은 더더욱 돈으로 살 수 없는 생명과 사랑 때문에 더더욱 흘러보내며 사는 것이죠.
저와 여러분들이 황제숭배사상 맘모니즘사상에 물들 게 아니라 예수님의 생명과 사랑에 물든 자로 살아야 하는 이유죠.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들은 영지주의에 물들지 않았습니까?
내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할 때 내 영혼만 구원받으면 됐지 내 육체로 방탕한 삶을 살아도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만약 하나님께서 그런 구원의 자녀만 원했다면 그분의 율례와 법도 곧 그 분의 십계명을 실천하라고 하지 않으셨겠죠.
구원받은 우리가 내 곁의 사람에 대한 예의를 지키는 것도, 내 곁의 사람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도 실은 영혼육의 구원을 완성하는 삶의 모습입니다.
그러니 사도 요한도 당시의 영지주의자들을 배격하도록 한 것처럼, 저와 여러분들도 영혼육의 전인적인 구원을 완성해가는 삶을 살아야 할 줄 믿습니다.
그렇지 않았던들 사도 요한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라고 권면하진 않았겠죠.
(본문)그런데 오늘 본문 1절은 그런 그리스도인들만 원하는 게 아니라 한 단계 더 나아가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원한다는 거죠.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니 또한 낳으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역본)이 부분에 대한 현대인의성경은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는 사람은 그분의 자녀들도 사랑합니다.”
(깨달음)무슨 뜻입니까?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해 영원한 생명의 메시아임을 믿는 자를 말하죠.
사도 요한이 3년간 예수님을 따라다녔지만 진정한 그리스도이심에 눈을 뜬 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였듯이 말이죠.
그런 예수님을 생명의 구원자로 믿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도 요한이 요한복음 1장 12-13절을 통해 말하는 것과 같은 이치죠.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예수님을 생명의 메시아로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 세상의 혈통이나 사람으로 뜻으로 난 게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난 자들이라는 것이죠.
그런데 그것으로 끝이라는 것입니까?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난 자들은 그분의 자녀들도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영원한 생명과 사랑을 받은 자녀는 또 다른 자녀들을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죠.
그것이 곧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에 빚진 자의 삶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예화)성애성구사 임선재 장로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분이 찢어지게 가난할 때 심장병에 걸렸다고 하죠.
그 당시 40만원이 없어서 수술을 못하고 병원 복도에서 죽어갈 판이었습니다.
그때 어떤 사람의 도움으로 수술을 받았는데 기적적으로 생명을 구한 것이었습니다.
임장로님은 생활형편이 나아지자 40만원을 들고 세브란스병원 심장병 담당 의사를 찾아가서 내밀었습니다.
의사는 웬 일이냐고 물었죠.
“네, 이 곳에서 나는 심장수술을 했습니다. 그때 40만원이 없어서 죽을 뻔했죠.”
“지금도 그런 환자들이 없으란 법이 있겠습니까?”
“긴급하게 돈 없는 환자가 오면 누구라도 좋으니 거절하지 마시고 이 돈으로 고쳐주십시오.”하고 말한 것이었죠.
임 장로님은 그 후로도 매년 1명의 심장병 환자의 치료비를 도와주었다고 합니다.
(적용)어떻습니까?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생명과 사랑을 받은 자의 모습이요, 주님께로부터 난 자의 모습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갈6:9∼10)
우리에게 기회가 있는 대로 주님의 생명과 사랑을 믿음의 사람에게 흘러보낼 때 마르지 않는 샘물과 같은 복을 베풀어주실 줄 믿습니다.
(주문)그렇기에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고자 하시는 은혜가 무엇인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은혜)주님은 저와 여러분들이 예수님의 생명과 사랑에 받은 자로서 그 사랑을 믿음의 자녀에게 흘러보내는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이죠.
(주음성)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그렇게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죽음의 고비를 넘긴 비구니 스님도 이 세상의 빚진 자로 사는데 너도 예수님의 생명과 사랑속에 다시 태어난 자 아니더냐?”
“사도 요한도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목격한 후에 이 세상의 삶에 참된 터닝포인트가 일어나지 않았더냐?”
“예수님께서 이 세상 사람을 위해 십자가에서 당신의 생명을 갈기갈기 찢어 영원한 생명을 흘러보내신 분임을 알기 때문에 말이다.”
“모두가 황제숭배사상과 영지주의에 물들어갈 때 오직 예수님의 생명과 사랑에 물든 자로 살도록 그래서 선포한 것 아니더냐?”
“성애성구사 임선재 장로님도 주님께서 보낸 누군가의 도움으로 다시 살아났기에 그 생명과 사랑을 지금도 흘러보내고 있지 않더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예수님의 생명과 사랑을 부여받은 자로서 누군가에게 주님의 생명과 사랑을 흘러보내며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
“네 생명의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선물받았으니 또 다른 주님의 자녀들에게 그 생명과 사랑을 흘러보내는 걸 주님께서 기뻐하지 않겠느냐?”
“물이 흘러야 고이거나 썪지 않듯이 너도 너에게 있는 생명과 사랑을 더 작고 연약한 이들에게 흘러보낼 때 주님께서는 너를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복을 부어주지 않겠느냐?”
“손에 있는 부귀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듯이 네 생명과 사랑을 흘러보낼 때 주님께서 더욱 귀하게 채워주시는 은혜의 자녀가 됐으면 좋지 않겠느냐?”
(찬양) 손에 있는 부귀보다 주를 더 사랑하는가 이슬 같은 목숨보다 주를 더 사랑하는가
사랑의 빛 잃어가면 주님 만날 수 없어 헛된 영화 바라보면 사랑할 수도 없어
잠시 머물 이 세상은 헛된 것들 뿐이니 주를 사랑하는 마음 금보다도 귀하다
큰 물결이 뛰놀아도 주를 더 찬양하는가 큰 환난이 닥쳐와도 주를 더 찬양하는가
깊은 잠에 빠진 영혼 주님 만날 수 없어 근심 걱정 많은 자는 찬양할 수도 없어
잠시 머물 이 세상은 헛된 것들 뿐이니 주를 찬양하는 마음 금보다도 귀하다
언제 다시 주 오실지 아는 이가 있는가 신랑으로 오실 주님 맞을 준비 되었는가
기름 없는 등불 들면 주님 만날 수 없어 재림 나팔 소리 나면 예비할 수도 없어
잠시 머물 이 세상은 헛된 것들 뿐이니 주를 맞을 준비함이 금보다도 귀하다
(예화)‘맨발의 천사’로 불리우던 최춘선 할아버지를 아시지 않습니까?
젊은 시절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공부해서 그 당시 5개국어를 하던 수재 중의 수재였죠.
일제치하에서는 고통받는 조국의 현실이 안타까워 김구 주석과 함께 광복군 활동을 하기도 했죠.
후에 목사가 된 그분은 해방 후에 교회를 짓고 양로원과 고아원을 운영하면서 굶주리고 불쌍한 사람들을 돌보았죠.
김포에 소유했던 당신의 넓은 땅도 살 곳 없는 사람들에게 그냥 나누어주었고요.
더욱이 최춘선 할아버지는 40년 넘게 지하철역을 두루 다니면서 복음을 전한 분으로 유명하죠.
맨발로 전도 문구를 모자와 가슴에 써 붙이고 다녔으니 누가 봐도 그는 미친 노인처럼 보였죠.
하지만 그분은 사람들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죽는 날까지 맨발로 복음을 전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죠.
당시 그를 취재했던 KBS 김우현 감독이 최춘선 할아버지에게 물어봤죠.
“할아버지. 왜 신발을 안 신으세요?”
그러자 대답하시기를 “통일이 오면 신어요.”했습니다.
“그렇게 다니면 안 힘드세요?”
“하나님의 은혜로 만사형통입니다. 예수는 나의 힘이요”하고 대답을 했죠.
그리고 김우현 감독에게 당부하기를 “충성은 열매 가운데 하나요”라고 손을 흔들며 사라졌습니다.
그 후에 수원행 전철에서 복음을 전하다 의자에 앉아 평화롭게 하나님의 품으로 가신 분이죠.
평소에 전도하다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겠다는 그 소망과 사명을 이룬 것이었습니다.
(깨달음)그렇게도 부유했고 그렇게도 수재였던 그 분이 무엇이 부족해 맨발로 복음을 전하며 통일을 꿈꿨겠습니까?
이유는 오직 하나였겠죠.
예수님의 생명과 사랑을 받은 자로서. 주님의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살고자 한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어찌 최춘선 할아버지처럼 살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내 곁에 지옥을 향해 가고 있는 그 누군가를 보고 있다면, 내 곁에 누군가 힘들어한다면, 얼마든지 주님의 생명과 사랑을 흘러보낼 순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어찌 사도 요한처럼, 임선재 장로님처럼 살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우리 각자에게 부여하신 주님의 생명과 사랑의 분량대로 그 사랑을 작게나마 흘러보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오른손이 한 일 왼손이 모르게 할 때 주님께서는 우리 시대에 마르지 않는 샘물과 같은 복을 부어주실 줄 믿습니다.
(내기도)그렇기에 우리가 주님께 기도를 드릴 때 어떤 기도를 기뻐받으시겠습니까?
“그래요. 주님.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의 은혜를 저에게 부어주지 않았다면 저는 지옥백성이 되고 말았을 거예요.”
“주님의 그 생명과 사랑을 저에게 부어주셔서 제가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가 되었고 하나님의 양자된 자녀가 되었어요.”
“주님. 주님의 생명과 사랑에 물든 자로 살게 해 주시고, 그 생명과 사랑을 흘러보내는 샘물처럼 살게 해 주세요.”
“제가 최춘선 할아버지처럼 땅을 나눠주거나 맨발로 복음을 전하진 못해도 내 곁에 지옥을 향하는 이들과 힘들어하는 이들에게 작은 사랑을 흘러보내며 살게 해 주세요.”
“그때 주님의 생명과 사랑이 마르지 않는 샘물과 같은 은혜의 통로로 사용해 주실 줄 믿습니다”
(찬양)내 주 예수 주신 은혜 한없건만 내 주 앞에 이 적은 것 다 드리니 주 예수여 내 정성을 받으소서
주 날 위해 보배로운 피 흘리사 그 귀하신 생명까지 다 주시니 내 천한 몸 이 생명을 왜 아끼랴
주 예수께 빚진 것이 한없건만 나 주 위해 드린 것은 참 적으니 주 예수여 너그럽게 보옵소서
날 위하여 십자가에 피 흘리신 주 예수의 은혜로써 인 치시고 내 모든 것 주의 소유 삼으소서
주 날 위해 그 귀하신 몸 버리사 이 내 몸을 피 값으로 사셨으니 내 생명도 주 예수께 바칩니다
(설교닫기)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죽음의 문턱을 넘어선 스님도 사랑의 빚진 자로 사는데 예수님의 생명과 사랑을 받은 우리도 주님의 생명과 사랑에 빚진 자로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당신의 생명을 갈기갈기 찢어주셔서 우리에게까지 흘러보내주셨기에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로 살 수 있는 것이죠.
이 땅에서 죽으면 영혼은 영원한 천국에서 눈을 뜰 것이요 예수님께서 재림하시고 백보좌 심판하실 때는 우리 몸도 영원한 부활체의 몸으로 하나가 될 것입니다.
그 은혜는 예수님의 생명과 사랑을 공급받은 자만 누릴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 아닙니까?
저와 여러분들이 사도 요한처럼, 임선재 장로님처럼, 최춘선 할아버지처럼, 살 순 없어도 주님의 생명과 사랑을 흘러보낼 순 있지 않겠습니까?
주님의 생명과 사랑에 물든 자로서 그렇게 흘러보낼 때 주님께서 마르지 않는 샘물과 같은 축복의 통로로 사용해주시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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