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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열기)(논지)예수님을 통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구약의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을까요?
구약의 율법은 모세때부터 신약의 예수님 때까가지 유효한 법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이죠.
예수님 이후에는 구약의 율법보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음으로 구원받은 것이라면서 말이죠.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구약의 율법을 폐하러 온 게 아니라 완전케 하러(마5:17) 왔다고 말씀하셨죠.
구약의 율법을 완벽한 지킬 수 있는 사람이 없기에 주님께서 그걸 완전케 하러 오셨다는 뜻이죠.
그런데 많은 성경학자들은 로마서 10장 4절을 보고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해석을 하죠.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예수님께서 율법을 완전케 하셨고 마침이 되셨기 때문에 더이상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는 거죠.
하지만 ‘마침’이란 헬라어 ‘텔로스’(τέλος)는 ‘끝’(termination)이란 말과 함께 ‘목표’(aim) ‘성취’(fulfillment)라는 뜻도 있죠.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음을 통해 율법으로 구원을 이루기에 부족한 부분을 온전히 성취하셨다는 거죠.
구약의 율법은 예수님을 목표로 하는 것이고 예수님 안에서만 율법의 열매를 거둘 수 있다는 뜻입니다.
(깨달음)예수님께서도 그렇고 사도 바울도 그렇고 신약시대 사도들도 율법을 지키라고 강조했습니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14:21)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요일3:22)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과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서 있더라”(계12:17)
예수님도 그렇고 신약성경의 말씀도 모두 율례와 법도와 같은 계명을 키켜야 한다고 말씀하죠.
그 계명은 십계명을 포함한 도덕법, 제사를 포함한 의식법, 배상을 포함한 시민법, 그리고 음식법으로 나뉘죠.
그 중 제사법과 음식법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을 통해 완전히 전환됐습니다.
나머지 십계명을 포함한 도덕법과 시민법은 예수 그리스도를 목표로 하며 지켜나가야 할 법들이죠.
중세시대 가장 영향력을 끼친 스페인 출신의 유대랍비 마이모네데스는 그 율법을 613가지로 분류했죠.
그렇게나 많은 율법조항들을 우리가 어떻게 다 완벽하게 지켜나갈 수 있겠습니까?
구약의 5대제사법과 음식법은 예수님께서 성취하셨기에 그 뜻을 새기는 게 중요하죠.
그렇지만 십계명을 포함한 도덕법과 시민법은 우리가 어떻게 지킬 수 있겠습니까?
책임감이나 의무감으로는 완벽하게 지킬 수 없지만 사랑하면 지킬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두 남녀가 사랑한다면 상대방이 좋아하는 관점에 자기 자신을 맞추기 마련이죠.
두 남녀가 사랑한다면 상대방이 싫어하는 것은 상대방을 배려해서 하지 않으려고 하듯 말이죠.
예수님께서 내 죄를 위해 죽으셨고 영원한 생명을 주신 분임을 안다면 십계명이라도 온전히 지킬 수 있는 것이죠.
(적용)1970년대 어느 시골 처녀가 서울의 한 장로님 댁의 부엌데기로 들어갔습니다.
그 장로님의 아들은 당시에 우리나라 최고라 하는 서울대를 다니고 있었죠.
그 처녀는 그 집 안에 들어가 밥도 짓고 빨래도 하고 청소도 하면서 온갖 허드렛일을 했죠.
그런데 어느날부터 서울대를 다니던 그 장로님의 아들 눈에 부엌데기 처녀가 들어온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가 아들에게 신붓감을 준비했다면서 선을 보도록 합니다.
그런데 그 아들은 따로 마음에 둔 처녀가 있다고 말을 했죠.
처음엔 말하기를 꺼려했는데 결국 자기 집 부엌데기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 장로님은 역정을 내면서 절대로 안 된다고 잘라 말했죠.
그러면서 서로 며칠간 기도해 보자고 했습니다.
1주일 넘게 기도하는데 그 장로님은 아들의 마음을 바꿔달라고, 아들은 그 반대로 기도를 한 거죠.
이제 다시 만나 이야기하는데 끝까지 고집을 꺾지 않는 아들로 인해 결국 부모가 승낙을 했습니다.
그로 인해 시골 부엌데기 처녀는 갑자기 신데렐라처럼 그 아들과 결혼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감사하고 또 감사했겠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으로 끝입니까?
도저히 자격이 되지 않는 자신을 사랑해서 아내로 맞아준 그 남편의 수준에 자기 자신을 맞춰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때부터 그녀는 남편의 수준에 맞게 공부를 했고 품격도 올려갔던 것입니다.
그 가문의 규율도 이전엔 부엌데기로서 지켰다면 이제는 아내와 며느리로서 사랑하며 지킨 것이죠.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통해 영적인 신부가 된 우리가 계명을 지켜야 하는 이유가 그것이죠.
책임감과 의무감 때문에 율법의 계명을 지키는 게 아니라 신데렐라처럼 주님의 사랑을 받은 자이기 때문에 말이죠.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이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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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배)요한일서는 사도 요한이 A.D.90년경 에베소에 머물 때 그 지역 성도들에게 쓴 편지라고 했죠.
처음 예수님께서 요한을 제자요 부르실 때 갈릴리 호수의 어부였던 그에게 자격이나 능력이 있는 건 아니었죠.
주님의 전적인 선택과 부르심 때문에, 좌절과 낙심 속에 있던 그를 사랑해주시고 격려해주셔서, 그가 주님의 제자요 사도가 된 것이죠.
그런 사랑과 격려에 힘입은 사도 요한은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봉양하다가 A.D.60-70년 사이에 에베소로 건너갔죠.
로마에 맞선 유대인들의 항전과 로마의 티투스 장군이 쳐들어와 예루살렘 성읍과 성전을 초토화시킬 그 어간에 말이죠.
그때도 사도 요한은 에베소에 집을 짓고 예수님의 어머니를 봉양했고 틈나는 대로 에베소교회 성도들을 섬겼죠.
그러다 A.D.90년 경에 요한복음과 요한일이삼서를 남겼고 밧모섬에 유배를 다녀온 뒤에 요한계시록을 남기고 자연사했죠.
그렇다면 왜 사도 요한이 요한일이삼서 곧 요한일서를 쓴 것입니까?
하나는 그 당시 로마의 황제숭배사상이 도시 곳곳에 만연했기 때문이죠.
로마의 황제를 신으로 절하지 않으면 시장에 나가 물건을 사고팔 수 없을 정도로 황제를 떠받들던 때였죠.
사도 요한은 로마 황제가 왕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만 왕의 왕이라고 알리고자 한 것이죠.
또 다른 차원이 있다면 그 당시 영지주의자들이 에베소 교회 안에 침투해 들어와 있었기 때문이죠.
영은 거룩하고 육은 더럽다는 이단적인 논리로 에베소교회 성도들을 유혹해 왔기 때문입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으면 영혼은 천국가지만 육체는 썩어 문드러지기 때문에 방탕하게 살아도 괜찮다고 한 것이죠.
하지만 사도 요한은 우리의 구원은 영혼만 구원받는 게 아니라 영혼육 전인적인 구원을 받는다고 알리고자 한 거죠.
그렇지 않았던들 “자녀들아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자”(요일3:18)고 하지 않았겠죠.
그렇지 않았던들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요일3:15)라고 말하지 권고하지 않았겠죠.
그만큼 예수님의 사랑을 덧입은 영적 신부라면 율법의 목표요 완성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십계명과 같은 도덕법과 시민법을 지키길 원한 것이죠.
(본문)오늘 본문에서도 다시 한번 그걸 일깨워주죠.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는 줄 아느니라.”(2절)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예수님께서 그리스도 곧 메시야요 구원자임을 믿는 자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혈통이나 육정으로 난 자가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라고 했죠.
그런데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자신에게 종착역이 되는 게 아니라 누군가에게 흘러가는 보내는 자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나누고 베풀 때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마르지 않는 샘물의 복을 부어주신다고 했습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께로 난 자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는 줄 알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들을 지킬 때 가능하다는 것이죠.
오늘 본문의 새번역성경은 보다 쉽게 이해하도록 번역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계명을 지킬 때 이것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을 사랑하고 섬기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계명들을 지킬 때 알 수 있다는 것이죠.
(원해)여기에 ‘계명’으로 번역된 헬라어 ‘엔톨레’(ἐντολή)는 구약에서 십계명과 같은 ‘계명’(νόμος)을 뜻하는 말이죠.
이 ‘엔톨레’라는 단어가 신약성경에 71회 사용이 됐습니다.
(원성)“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마19:17)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22:36-40)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내가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아노라 그러므로 내가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니라 하시니라”(요12:49)
(깨달음)예수님은 하나님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아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영생에 들어가려면 그분의 계명을 지켜야 한다고 말씀하셨죠.
그 계명을 압축하고 압축한 것이 십계명이고 십계명을 지키고 순종하는 게 영생이라는 말씀이죠.
그만큼 예수님의 대속의 은혜로 구원받은 자녀들도 그 계명을 지켜야 한다는 걸 말씀한 것이죠.
그런데 그 계명을 의무감이나 책임감 때문에 지켜야 한다면 온전하게 지킬 수 있겠습니까?
회사에 출근하는 시간이 9시전인데, 의무감이나 책임감 때문이라면 억지로 그 시간에 맞추겠죠.
회사나 자신이 맡은 일을 사랑한다면, 의무감이나 책임감을 넘어 자긍심을 갖고 출근하겠죠.
안식일을 지키라, 십일조를 드려라, 거짓말하지 말라, 는 계명도 마찬가지죠.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면 죽이라는 명령 때문에 죽을 것 같은 두려움 때문에 지키는 게 아니죠.
십일조를 드리지 않으면 화가 미칠 것 같은 의무감 때문에 순종하는 게 아니죠.
주님께 받은 사랑이 너무나도 커서 그 사랑에 응답코자 주님의 계명에 자부심을 갖고 지키는 거죠.안수집사요 권사요 집사이기 때문에 의무감으로 지킨다면 누가 과연 완전하게 지킬 수 있겠습니까?
그런 의무감이나 책임감 때문에 두려움 때문에 계명을 지킨다면 하나님 보시기에 흡족해하시겠습니까?
부엌데기 시골 처녀를 사랑해준 그 남편의 사랑 때문에 그 집안의 규율을 온전하게 지키는 거죠.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죽으셨기에 그 사랑에 힘입어 주일도 지키고 십일조를 드리는 것이죠.
사랑을 하고 사랑을 느끼면 상대방이 원하는 수준에 나를 끌어올려 맞춰나가는 것처럼 말이죠.
어느 서기관이 예수님께 나와 계명 중에 첫 번째 계명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도 그렇게 대답했죠.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막12:29-31)
하나님의 계명을 온전하게 지킬 수 없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덧입은 자로 그 계명을 지켜나간다면 하나님께서 부족해도 어여쁘게 여기시겠죠.
613가지 계명들을 조목조목 다 지키지 못해도 주님의 사랑에 눈먼 자로 산다면 십계명이라도 지킬 수 있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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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그렇기에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고자 하시는 은혜가 무엇입니까?
(은혜)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영적인 신부로 위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아래로 이웃을 사랑하는 계명을 지킬 수 있는 은혜를 부어주신다는 것이죠.
(주음성)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 성령님의 음성을 통해 주님께서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촌뜨기 부엌데기가 신데렐라가 아내가 된 것처럼 너도 지옥갈 자녀에게 천국갈 자녀로 영적인 신데렐라가 된 걸 알고 있느냐?”
“네가 구원받을 만한 자격이나 능력이 하나도 없는데도 십자가에 제물이 되기까지 너를 사랑하여 주심을 깨닫고 있느냐?”
“주님의 제자가 되고 사도가 될만한 자격이나 능력이 없던 사도 요한도 오직 주님의 사랑과 격려로 인해 제자요 사도가 된 것 아니더냐?”
“안식일을 지키고 십일조를 드리라는 계명, 간음하지 말고 짐승과 교합하지 말라는 계명을 책임감이나 의무감으로 온전히 지킬 수 있더냐?”
“주님의 십자가 대속의 사랑에 감사하여 살아가는 영적인 신데렐라와 같은 신부들은 책임감이나 의무감이 아닌 주님 사랑 때문에 지키는 것 아니겠느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네가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인지, 예수님을 온전한 너의 구원자로 믿고 네 심령의 왕좌의 자리에 주님을 모시고 살고 있는지 먼저 점검해봐야 하지 않겠느냐?”
“네 삶의 주인이 예수 그리스도요, 주님의 그 크신 사랑에 힘입어 네가 이 세상을 살고 있다면, 영적인 신부인 네가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니겠느냐?”
“일터와 직장을 사랑하고 그 일에 자부심을 갖고 살아간다면 책임감과 의무감을 넘어 진정으로 회사를 사랑하듯이 말이다.”
“네가 그렇게 일한다면 회사에서도 너를 더욱 존중하는 것처럼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계명을 지키는데 어찌 주님께서 더욱더 사랑하지 않겠느냐?”
(찬양)세상 흔들리고 사람들은 변하여도 나는 주를 섬기리
주님의 사랑은 영원히 변하지 않네 나는 주를 신뢰해
오직 믿음으로 믿음으로 내가 살리라
오직 믿음으로 믿음으로 내가 살리라
믿음 흔들리고 사람들 주를 떠나도 나는 주를 섬기리
주님의 나라는 영원히 쇠하지 않네 나는 주를 신뢰해
오직 믿음으로 믿음으로 내가 살리라
오직 믿음으로 믿음으로 내가 살리라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예화)서울 강북제일교회 윤덕수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1981년에 그 교회에 부임한 그 목사님은 1988년 서울올림픽이 있던 해 7월 24일 뇌출혈로 쓰러졌습니다.
그때 몸은 절반만 사용되는 불구가 되었습니다.
가족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기억과 모든 의식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얼굴은 뒤틀려서 의사도 돌아올 확률이 없다고 진단을 내렸죠.
그때 그 교회 장로님들은 목사님을 포기하지 않고 3년간 24시간 기도조를 짜서 병원으로 출근했습니다.
그때마다 목사님은 스스로 견디기 어려워 죽고 싶다고 했죠.
그럴 때마다 장로님들은 목사님을 붙들고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목사님, 그렇게 죽고 싶은 것이 소원이시면 저하고 손잡고 한 번이라도 일어섰다 죽으십시오.”
그렇게 하면서 강권하여 담임목사님을 운동시키는 조를 짜서 3년간 뒷바라지를 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 목사님을 회복시킬까?’ 그것만 생각하면서 말이죠.
다양한 방법 가운데 한 번은 제주도로 목사님을 모시고 가서 만장굴 앞에 세워놓고 이쪽으로 걸어와 보십시오, 했습니다.
비실비실하면서 걸음도 제대로 걷지 못하는 목사님이 사모님 손을 잡고 몇 발자국 움직여 장로님들 앞으로 왔습니다.
그때 장로님들은 “우리 목사님 만세!” 하면서 울고 또 울면서 기뻐했다고 하죠.
그 무렵 그 교회의 상회법인 노회에서는 설교 목사를 파송하려고 결의를 했습니다.
그때 그 교회 장로님들은 그렇게 말했다고 하죠.
“누구도 우리 교회에 오지 못합니다. 만약 노회가 설교 목사를 파송하면 우리는 노회를 탈퇴할 것입니다.”
“우리 목사님이 회복되어 이 강단에 설 때까지 누구도 강북제일교회 강단에 설 수 없습니다.”하면서 항거를 했습니다.
그러자 상위법의 그 노회도 그 장로님들의 행위에 두 손 두 발을 다 들고 말았다는 것이죠.
장로님들은 그렇게 담임목사님을 지키기에 생명을 걸었습니다.
드디어 3년 만에 목사님이 입을 열기 시작했습니다.
반신불수의 몸으로 어눌하지만 처음 설교를 하게 되었을 때 교회는 울음바다가 되었습니다.
윤덕수 목사님은 한국교회사에 설교 잘하기로 유명한 목사님인데 병중 설교는 알아듣기 어렵고 어눌했죠.
하지만 그 목소리만이라도 듣는 교인들은 울면서 행복해했습니다.
뇌출혈 당시 모든 기억이 사라져버렸기 때문에 그 목사님이 성경을 읽다가 “태초”라는 말이 뭔지 몰랐습니다.
사전을 펴보니까 “맨 처음”이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창조”라는 말이 뭔지도 몰랐습니다.
사전을 펴보니까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 이런 식으로 새롭게 어린아이처럼 글을 익혀간 것이죠.
너무나도 속이 타서 그렇게 한탄했습니다.
“이게 사는 길이냐, 차라리 죽자”하고 말이죠.
그때 하나님이 호통을 치셨습니다.
“이놈아, 너는 살아있지 않느냐? 반은 쓸 수 있지 않느냐? 책은 읽을 수 있지 않느냐? 밥은 먹을 수 있지 않느냐? 남아 있는 것 붙들고 감사하지 못하고 없는 것 때문에 왜 불평을 하느냐?”
그때 목사님이 깨졌습니다.
어눌하게 성경을 읽기 시작해 2주일에 성경 한 권씩을 읽어내니까 1년에 25번 성경을 읽었습니다.
어느 날 성경을 읽는데 갑자기 뇌에 전기 스파크가 팍! 팍! 일어나듯 온 뇌를 흔들더니만 기억이 살아나기 시작했습니다.
잃어버렸던 모든 언어도 회복이 되었습니다.
옛날에 암송해 뒀던 성경구절도 모두 생각이 났습니다.
교인들은 행복해했고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새로운 예배당이 건축되었습니다.
쓰러질 때 교인 수가 1,500명이었는데 3년 동안 교인 수가 늘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기적적으로 회보되었다는 소식에 엄청나게 많은 성도들이 몰려든 것이었습니다.
그로 인해 예배당 좌석 수가 600석 밖에 안 되는데 그 목사님이 설교를 6번이나 해야 할 판이었습니다.
그때 장로님들이 놀라운 결정을 한 것입니다.
“우리 목사님 살리려면 여섯 번 설교할 게 아니라 한번 만 설교하게 하십시다. 그러려면 3,000명 들어가는 예배당을 지읍시다.”
그렇게 해서 세운 예배당이 지금의 3천명이 한꺼번에 들어가는 예배당을 지었다는 것이죠.
그러다가 2005년 2월 13일 미국 남가주 안디옥교회에서 집회를 인도하다가 끝내 강단에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그로부터 열흘 후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게 되었습니다.
(깨달음)무엇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까?
교회법과 상회법은 목사님이 병들어 누워 있으면 설교목사를 파송해서 치리하는 게 법이라는 것이죠.
하지만 교회 성도들과 장로님들은 목사님이 회복할 수 있는 길을 택한 것입니다.
왜죠?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3년간 24시간 조를 짜서 목사님의 재활을 돕고자 한 것이고, 그 사랑에 감읍한 하나님께서 목사님을 다시 일으켜세운 것 아니겠습니까?
목사님도 반신불수인 자기 자신을 보고 자포자기 하고 싶을 때 주님께서 사랑으로 호통을 친 것이죠.
“이놈아, 너는 살아있지 않느냐?”
“반은 쓸 수 있지 않느냐?”
“책은 읽을 수가 있지 않느냐? 밥은 먹을 수가 있지 않느냐?”
“남아 있는 것 붙들고 감사하지 못하고 없는 것 때문에 왜 불평을 하느냐?”
(내기도)그렇기에 우리가 주님께 기도를 드릴 때 어떤 기도를 기뻐받으시겠습니까?
“그래요. 주님. 교회법도 있고 상회법도 중요하지만 사랑은 그걸 뛰어넘는 걸 알게 해 주시네요.”
“반신불수된 목사님을 교인들과 장로님들이 사랑으로 돌볼 때 주님께서 감읍하셔서 고쳐주셨네요.”
“그 목사님도 자포자기하고 싶을 때 ‘반은 쓸 수 있지 않느냐?’ ‘남아 있는 것 붙들고 감사할 수 있지 않느냐’ 호통치면서 다시 일으켜세워주셨네요.”
“주님. 주님의 계명에 비추면 남의 티보다 내 들보가 훨씬 더 형편 없다는 것을 알게 돼요.”
“주님의 사랑을 깨달으면 주님께서 말씀하신 계명도 지킬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돼요.”
“주님께서 십자가 사랑으로 사랑하여 주신 그 사랑에 힘입어 매일매일 형제를 용서하고 사랑하고 감싸주면서 살게 해 주세요.”
“그것이 율법이요 선지자의 강령인 줄 믿습니다.”
(찬양)갈릴리 바닷가에서 주님은 시몬에게 물으셨네
사랑하는 시몬아 넌 날 사랑하느냐 오 주님 당신만이 아십니다
사마리아 우물가에서 주님은 여인에게 물으셨네
사랑하는 여인아 넌 날 사랑하느냐 오 주님 당신만이 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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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닫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구원의 주님으로 모신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은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그 사랑을 흘러보내며 사는 자들이라고 말씀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모습으로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613가지나 되는 계명을 어떻게 다 지킬 수 있겠습니까?
십계명이라도 온전히 지키며 살아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 계명도 의무감이나 책임감 때문이 아니라 신데렐라와 같은 영적인 신부가 되었기에 지키는 것이죠.
위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아래로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며 사는 것이 온 율법이요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직장이나 회사나 심지어 교회도 법을 따지고 법대로 하라고 소리치는 이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대로 심판한다면 이 땅에 살아남아 있을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상대방의 티끌보다 나의 들보가 훨씬 더 크다는 것을 우리 자신이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기에 하나님의 법대로 심판하고 정죄하기보다 누군가의 허물을 감싸주고 덮어주는 것이 사랑하는 길이요 그런 계명을 지키는 자를 주님께서 귀하게 여기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누군가를 용기하고 감싸주며 살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더 큰 축복의 통로로 사용해 주실 줄 믿습니다.
그와 같은 은혜 속에 살 수 있도록 이시간 다짐의 기도를 주님앞에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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